'비석쯤이야' 쌍봉사 거북의 여유…사찰 문화재에 숨겨진 미학
부도의 백미 '철감선사탑' 배흘림기둥에 서까래도 생생하게 표현
개성 넘치는 운주사 석탑·석불…송광사 수장고에 숨겨진 화엄경변상도
(장흥·화순·순천=연합뉴스) 이세원 기자 = "(거북이는 등에 짊어진 비석이) 무겁지만 '이 정도쯤이야'라고 하면서 (지켜보는 사람 마음의) 부담을 덜어준 것 같아요." (최선주)
전남 화순군 쌍봉사에서 대웅전 북서쪽으로 오솔길을 따라 200m쯤 올라가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돌로 된 거북이 한 마리가 있다.
신라하대의 고승인 철감선사 도윤의 탑비인 보물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비'다. 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는 없어지고 거북 받침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그런데도 이 문화재가 돋보이는 것은 거북의 오른쪽 앞발 덕분이다.
발톱 3개를 지면에서 들어 올린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역동적인 과정을 순간 포착한 것 같은 모습이다.
국립경주박물관장을 지낸 최선주 중앙대 객원교수는 쌍봉사 철감선사탑비를 찾아간 일행에게 거북이 비석을 지고도 여유 있는 것처럼 형상화했다고 해석했다.
거북은 뒷발을 옆으로 뻗어 힘차게 지면을 박차고 있다. 힘을 쓰느라 그런 것처럼 꼬리는 오른쪽으로 말려 있다.
최근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이 전국 각지의 성보박물관 학예사 등을 모아 실무 교육의 일환으로 전남 지역의 사찰을 답사하는 현장에서는 평소 알지 못했던 문화재에 얽힌 스토리를 접할 수 있었다.
비석이나 불상 등은 언뜻 보면 평범하지만, 최 교수의 이야기를 들으며 찬찬히 살펴보니 천 년 이상의 시간을 뛰어넘어 장인의 땀방울을 느낄 수 있는 단서가 숨겨져 있었다. 휴가철에 들르게 된다면 한 번쯤 눈여겨볼만한 문화유산이다.
우여곡절 끝에 빛깔 되찾은 현존 최고 철불
전남 장흥군 소재 보림사 대적광전에는 국보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이 불상은 왼쪽 팔에 새겨진 글 등을 통해 제작연대가 상당히 확실하게 파악돼 있다. 858년에 발원해 859년에 완성한 것으로 판단되며 제작 시기가 밝혀진 현존 철불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신라 말∼고려 초 철로 만든 불상이 유행했는데 그 선두 주자라고 할 수 있다.
이 불상은 연한 초콜릿 색깔이라서 흔히 보는 금빛 불상에 비하면 수수하게 느껴진다. 현재의 모습을 되찾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사찰에 남은 기록에 의하면 보림사 철불은 1998∼1999년에 표면에 금박을 입히는 개금(改金) 작업이 실시돼 철불이지만 한동안 금빛으로 보존됐다.
문화재심의위원회 등에서 원형을 되살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2006∼2007년 도금을 벗겨내는 작업을 실시했다.
보림사에 갈 기회가 있다면 사천왕도 눈여겨 볼만하다.
중종 10년(1515년)에 만들어졌고 이후 두 차례 중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전에 만들어진 유일한 현존 목조사천왕상이다.
조선 후기에는 목조가 아닌 흙을 빚어 만든 소조 사천왕이 다수를 이루는 것과는 대비된다.
배흘림기둥에 서까래까지…"가장 아름다운 부도" 철감선사탑
쌍봉사에는 철감선사탑이 있다. 부처의 사리를 안치한 탑인 부도로 분류되며 국보로 지정돼 있다.
8각 기둥형 탑으로 상륜부가 사라져버렸지만, 불교 문화재를 공부한 이들이 주저하지 않고 가장 아름다운 부도로 꼽을 만큼 섬세하게 조각됐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지붕이다. 암키와와 수키와의 조합을 형상화했고 서까래까지 새겼다. 돌을 쪼아서 만들었다는 것이 잘 실감 나지 않을 정도다.
사리를 모시는 탑신의 각 모서리 기둥은 위·아래보다 가운데가 굵은 배흘림기둥 양식으로 돼 있다. 각 면에는 사천왕상, 비천상 등이 조각돼 있다.
탑을 지탱하는 기단은 밑돌, 가운데돌, 윗돌 등 세 부분으로 나뉜다.
윗돌은 2단으로 구성되는데 위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의 모습이 개성 있게 새겨져 있다. 기둥을 소반의 다리처럼 곡선으로 표현해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밑돌에는 사자가 구름 위에 앉아 저마다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연구자 애먹이는 운주사의 기형탑·개성 넘치는 불상
사찰 한 곳에서 많은 탑과 불상을 보려고 한다면 전남 화순군 소재 운주사가 적격이다.
중종 25년(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석탑과 석불이 각 1천개씩 있다고 기록됐다. 이 때문에 천불천탑(千佛千塔)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운주사에 따르면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석불 80여개, 석탑 21개 정도라고 한다.
석탑에는 ×, ◆, |||와 같은 기하학적인 무늬가 많으며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원형 석탑도 있다.
돌부처의 얼굴은 세로로 길쭉한 모양이 많고, 입체이면서도 평면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섬세하다기보다는 단조롭고 투박하고 소박하다.
널빤지처럼 바위벽에 기대고 있는 불상은 권위와는 다소 거리가 있으며 크기도 제각각이라서 개성이 넘친다.
그래서 미술사 연구하는 이들이 이곳에 있는 탑이나 불상의 양식을 분류하는 데 애를 먹는다고 한다. 숲속 곳곳에 세워진 석탑을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4중 철문 속 화엄경변상도…스님이 수행하는 국보 건물
전남 순천시 소재 송광사 성보박물관에는 목조삼존불감, 혜심고신제서, 화엄경변상도 등의 국보가 보관 중이다.
화엄경변상도가 단연 눈길을 끈다. 이 탱화는 현존하는 조선시대 화엄경변상도 중 가장 먼저 만들어졌고 '화엄경'의 7처9회(七處九會, 7곳에 9번 모임·부처가 화엄경을 설할 때 일곱 군데의 장소에서 아홉 번 모임을 가졌던 일) 설법내용을 충실하고 효과적으로 그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록에 의하면 영조 46년(1770년) 무등산 안심사에서 조성됐다가 이후 송광사로 옮겨진 것으로 전해지는데 방문객이 통상 직접 볼 수 있는 것은 전시실에 있는 모사본이다.
원본은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성보박물관 로비에서 4개의 육중한 문을 통과해 2수장고에 들어간 뒤 박물관 관계자가 미닫이문처럼 설치된 그물망 형태의 철제 프레임을 끌어당기자 펼쳐진 채 수직으로 매달린 화엄경변상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정된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문화재의 손상을 최소화하기 위해 택한 보관 방법이다. 작품 윗부분에 가해지는 압력을 줄이도록 그림 테두리 부분에 군데군데 한지를 끼워서 자석으로 프레임에 고정했다.
전시실에 있는 모사본을 정면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철제 프레임에 고정된 원본을 측면에서 보니 비단 폭에 채색된 보현보살과 형형색색 등장인물이 더욱 입체감 있게 느껴졌다.
송광사의 또 다른 국보인 국사전(國師殿)은 현재도 사용되는 건물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현주건조물인 셈이다.
김태형 송광사 성보박물관 학예실장은 사람이 사는 건물은 "거미줄이라도 한 번 더 걷어낸다"면서 빈집 상태로 놓여 있을 때보다 사용할 때 관리가 잘 되는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국사전은 고려 공민왕 18년(1369년)에 처음 지었고, 두 차례에 걸쳐 보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소에도 일반인의 접근이 거의 허락되지 않으며 마침 하안거(夏安居) 기간을 맞이해 스님들이 수행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어 멀리서 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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