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투어! 르네상스 심장부 답사에, 와인 감상을 더하다
[프레시안 알림]
구지훈 교수(국립창원대학교 사학과)는 르네상스 최고의 전문가이며 와인 전문가이기도 합니다. 지금 매스컴이나 유튜브 등을 통해 해박한 지식과 강의로 참여자들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던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당시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의 로베르토 바조라는 선수에 홀려 이탈리아를 알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한국외국어대학교 이탈리아어과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대학에서는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매일 술과 와인, 축구 등에 홀려 있더니, 구 교수의 말대로라면, 이력서 한 줄 더 채우고자 떠났던 이탈리아 어학연수에서 그만 이탈리아 미술사의 황홀한 매력에 빠져, 정신 차려보니 세계 최고(最古)의 대학이라는 볼로냐대학교 미술사 박사학위를 손에 쥐고 귀국 비행기를 타게 되었지요.
귀국 후, 숙명여자대학교 회화과를 시작으로 모교인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지대학교, 중앙대학교, 단국대학교, 서강대학교, 부산대학교, 영남대학교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가르쳐 왔으며 2021년 국립창원대학교 사학과에 임용되어 서양고·중세사와 르네상스사, 미술사를 중심으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와 서양미술에 관련한 십여 편의 논문이 있습니다.
방송인 알베르토 몬디, 이금희 아나운서, 축구해설가 박문성의 유튜브 채널에 출연하였으며 tvN의 <벌거벗은 세계사> 66회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편, 88회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진실’ 등 2회 출연하면서 이탈리아와 서양사, 서양미술사를 보다 가까이 전달하고자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이탈리아 르네상스 중심 현장에서 깊고도 넓은 지식으로 여러분을 신비로우면서도 화려하고 황홀한 르네상스 예술세계로 안내할 것입니다. 저녁에 열리는 와인 시음회는 답사의 피로를 풀고 여행의 흥취를 더할 것입니다.
구 교수의 답사 여행은 2024년 1월 17(수)-28(일)일, 12일간 진행됩니다. 회원님들의 많은 성원과 참여를 기대합니다. 구 교수의 얘기를 들어봅니다.
여기는, 콧등 시린 한겨울에도 파릇파릇한 세상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코로나 시국도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이제 여행도 조금씩 기지개를 켜고 있습니다. 송구영신하시길 기원합니다. 콧등 시리게 찬바람 부는 겨울, 그리고 새로운 희망으로 시작했던 2023년도 어느덧 절반 이상이 지나갔습니다. 조금씩 하늘길이 열리면서 늘 꿈에 그리던 유럽, 그리고 이탈리아가 더 생각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살갗을 찌르는 듯한 뜨거운 지중해의 기후 아래, 지중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키 작은 포도나무들, 그리고 올리브나무들의 기운들도 온 천지에 가득할 것 같습니다. 뾰족하고 웅장한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로마 병정들처럼 열맞춰 서 있는 토스카나의 들판들도 오랜만에 다시 찾는 발걸음을 기울여 볼 만합니다. 그리하여 여기, 다시 시작하는 이탈리아를 2024년의 시작과 함께 찾아볼까 합니다. 기본적이지만 남들은 들르지 않는, 주위에 가까이 있었지만 코로나와 관광 특수로 인해 모르고 지나쳤던 이탈리아의 멋진 곳들을 다시 찾는 것으로, 웅크렸던 심신을 일으켜 2024년 새해를 맞이하고자 합니다.
언제나 젊음이 새로운 시대를 이끕니다, 밀라노
<2024 르네상스와 와인>팀은 이탈리아의 첫 번째 도시로 밀라노를 찾아갑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치며 이탈리아는 많은 힘을 잃고 여전히 낡은 가치에 매몰되었지만 밀라노는 그런 이탈리아의 자존심이었습니다. 산업도, 문화도, 혁명도, 통일도... 다시 일어나려고 기지개를 켜는 이탈리아의 가장 앞에는 밀라노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국가 이탈리아’를 만드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도시는 바로 밀라노였습니다. 오랜 코로나 시국을 버틴 후 기지개를 켜는 우리와 아주 닮아있는 도시라 할 수 있습니다.
밀라노는 이미 200여 년 전부터 이탈리아에서 가장 앞서가는, 가장 젊고 뜨거운 도시였습니다. 물론 밀라노는 중세와 르네상스의 영향력이 컸던 도시지만 제가 여러분들과 살펴보려는 밀라노는 르네상스의 밀라노, 그리고 그 외에도 이탈리아에서 가장 세련되고 진보적이며 앞서있는 아방가르드의 도시인 밀라노입니다. 하얗고 거대한 위엄이 돋보이는 ‘밀라노 두오모’는 이탈리아 전역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전형적 후기고딕양식의 건축물입니다. 또한, 프랑스 역사학자 올리비에 파롱이 “이탈리아는 바로 이 곳에서 탄생했다”라고까지 말했던 세계 오페라 매니아들의 성지, ‘라 스칼라’ 극장을 단순히 세계 최고의 오페라 극장 중 하나로만 보지 말고 치열하고 뜨거웠던 이탈리아 현대역사의 현장으로 다시 한 번 바라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스칼라 극장과 함께 당시 이탈리아 전역에서 가장 새로운 문물과 산업기술, 그리고 신세계의 상징으로 여겨진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갤러리’를 방문하고 ‘이탈리아의 탄생’을 돌아보겠습니다. 동시에 르네상스 주역으로서의 밀라노를 상징하는, 밀라노에서 가장 고귀한 예술품 중 하나인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심판>을 감상합니다. 언제나 젊음이 넘치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밀라노에 이탈리아 최초로 생겨난 ‘스타벅스’를 들러보는 작은 이벤트도 포함합니다. 스타벅스가 관광지가 될 수 있는 나라라니!! 흥미롭지 않은가요??
이탈리아에서, 밀라노에서의 본격적인 첫 날을 기념하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가장 기분 좋을 때 마시는 ‘프란치아코르타 스파클링’ 와인으로 첫 날을 만끽해 봅니다. 밀라노 최고의 미술관이라 말할 수 있는 브레라 미술관을 들러 중세부터 현대까지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적 예술가들의 정취를 누려보고자 합니다. 여기에는 중세부터 현대미술까지 모두 아우르는 컬렉션을 가진 브레라 미술관이기에 가능합니다. 이 브레라 미술관 자체도 이탈리아의 탄생에 크게 기여한 성지 중 하나입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활발하면서도 가장 생기 넘치는 도시인 밀라노에서, 이탈리아에서의 첫 밤이란 얼마나 설레는 것인지! ‘Salute(살루떼)!’를 외치며 이탈리아에서의 시작을 기념합니다.
후기 르네상스 건축의 대부, 안드레아 팔라디오의 도시, 비첸차
이탈리아 르네상스기를 모두 통틀어 가장 위대한 건축가를 꼽으라고 한다면 피렌체의 아름다운 쿠폴라를 올린 브루넬레스키를 손꼽을 것입니다. 이후로 이탈리아의 모든 건축가들은 브루넬레스키가 연구하고 창안해 냈던 원근법을 치열하게 공부해야 했습니다. 브루넬레스키의 가장 큰 미술사적 공헌은 피렌체 두오모의 쿠폴라를 올린 것이 아니라, 자신 이후의 모든 건축가들로 하여금 자신이 만든 건축언어를 반드시 공부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튼튼한 기반을 다진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의 후반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린 사람, 그가 바로 비첸차 출신의 안드레아 팔라디오입니다. 피렌체 북부에서, 브루넬레스키가 만들었던 고대 로마 건축 측량의 비밀을 완벽히 이해한 그는 베네치아를 비롯해 이탈리아 북부의 여러 곳에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을 남겼습니다. 브루넬레스키가 그러했던 것처럼, 팔라디오 이후의 건축가들은 팔라디오를 반드시 연구해야 하는 레퍼런스로 삼았던 셈이죠.
그 중에서도, 올림피코 극장은 팔라디오가 고향인 비첸차에 남긴 가장 기념비적인 건물입니다. 고대 그리스 희비극을 비롯해 몇몇 정해진 작품들을 상연하기 위해서 ‘리모델링’된 올림피코 극장은 정확한 수학적, 기하학적 연구를 통해 엄청난 원근법적 눈속임이 가미된 후기 르네상스 건축의 백미라 할 수 있습니다. 단정하고 정갈하면서, 웅장하고 조화로운 팔라디오 건축의 특징들을 비첸차에서 마음껏 누려보실 수 있습니다.
굽히지 않는 뚝심과 끈기로 만들어진 바다 위의 제국, 베네치아
베네치아인들이야말로 어쩌면 이탈리아에서 가장 굽힐 줄 모르는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버티고 이겨내기 위해서... 그렇게 흘린 땀의 결정체가 바로 지금의 빛나는 베네치아입니다. 르네상스 시기에 베네치아는 피렌체 못지않은 강력한 힘과 부를 누렸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유럽에 대한 국력과 영향력이라면 베네치아는 지중해 전체에서도 독보적으로 강력한 국가였습니다. 예술가는 피렌체가 많았는지 모르지만 전체적인 문화는 베네치아가 훨씬 더 크고 화려했습니다.
비잔틴제국의 예술이었던 모자이크에서 출발하는 베네치아의 미술은 자신들의 독창적인 색채감을 수립한 이후 낭만주의와 인상파에게까지 영향을 주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은 나폴레옹이 유럽의 응접실이라 격찬했던 산마르코 광장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괴테를 비롯해, 헤밍웨이, 토마스 만 등등 정말 수많은 세계 최고의 예술가들이 베네치아를 방문해 자신의 예술적 영감을 찾았습니다. 심지어 세계 미술품 수집 역사상 가장 공격적이고도 가장 성공적인 커리어와 컬렉션을 완성했던 페기 구겐하임은 기라성 같은 화가들의 작품으로 가득한 자신의 저택을 바로 이곳 베네치아에서 낙점했습니다.
유서깊은 베네치아 도제궁을 장식한 틴토레토는 베네치아의 반짝이는 바다 위의 빛을 그대로 화폭에 구현한 화가입니다. 염색장이의 아들이었던 그가 자신의 최고의 걸작을 남긴 산 로코 형제회도 입장하여 그의 빛나는 색채감각을 눈으로 익혀보십시오. 물론 ‘선의 피렌체, 색의 베네치아’라는 평가를 들었을 만큼 빛나는 예술품들은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잘 소장되어 있습니다.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베네치아 르네상스가 낳은 최고의 문제작, <폭풍우 Tempesta>를 소장하고 있는 중요한 미술관입니다. 벨리니(Belllini)-조르조네(Giorgione)-티치아노(Tiziano)로 이어지는 베네치아 색채의 계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이나 문화가 아니더라도 베네치아는 바다 위에서 만들어진 그 풍경만으로도 전세계에서 가장 인상적인 파노라마를 만들어 냅니다. 아무 곳에서나 셔터 12번만 누르면 1년치 달력을 만들 수 있는 너무도 아름다운 곳, 베네치아에서 그들만의 감성을 느껴 보십시오. 비단 겉으로 드러난 풍경뿐만이 아닙니다. 베네치아 출신의 유명한 방송인 알베르토 몬디는 “베네치아를 가장 잘 즐기는 방법은 베네치아 뒷골목에서 길을 잃어보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베네치아가 속한 베네토 지역에서 만들어 내는 이탈리아 최고의 스파클링 와인인 ‘프로세코 발도비아데네’ 와인을 들고 도시 곳곳을 다녀 보는 것이 사실은 가장 즐거운 베네치아 여행이기에, 얼마든지 용납되는 일탈일 것입니다. 역사와 도시를 무에서 유로 창조한 이들의 삶의 흔적들을 오롯이 받아들이면서 반짝이는 베네치아 대운하의 물결을 호흡해 보십시오.
학문적 자유가 빚어낸 이탈리아 과학의 산실, 파도바
파도바는 베네치아와 함께 성장해 온 도시입니다. 베네치아와 파도바는 서로 결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주 오래전인 중세부터 파도바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 파도바대학교가 있기 때문입니다. 파도바대학교는 이탈리아에서도 손꼽히는 오래된 대학이며 전통의 명문입니다. 볼로냐대학교가 교회법의 명문대학이 되면서 초창기에 다소 보수적 성향을 띄게 되자,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지키고자 했던 여러 교수들과 학생들은 파도바대학교로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그러한 전통으로 인해 파도바대학교의 역사는 당시 교회의 교리와는 조금 다른 자연과학에 일찍부터 관심을 갖게 되었고 전반적으로 학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학풍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자연과학의 시작점이자 그리고 근대과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자신의 고향인 피사보다 파도바대학교에서 더 행복하게 지냈던 것은 물론 훨씬 높은 연봉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고리타분한 피사의 학풍보다 파도바대학교의 자유롭고 물러섬 없는 학문에 대한 태도도 당연히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전통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팔라초 델 보 Palazzo del Bo’에 있는 해부학 강의실입니다. 자연과학과 사람의 신체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퍼져 나가던 무렵 해부학을 공개적으로 강의하기 위해 생겨난 파도바대학교의 해부학 강의실만큼은 세계 최초로 생겨난 공개 해부학 강의실이었고 이 뒤를 이어 이탈리아의 볼로냐, 네덜란드의 레이덴 등에서 유사한 해부학 강의실을 앞다투어 마련하게 되었지요.
이러한 대학이 생겨난 곳은 반드시,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상공업과 무역업이 번성했던 곳이었는데 파도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중세 북부 이탈리아에서 가장 거상이었던 엔리코 스크로베니라는 고리대금업자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 위해 건립한 스크로베니 예배당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화려한 중세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서양미술사의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킨 조토(Giotto)라는 화가의 최전성기 프레스코화들입니다. 이러한 스크로베니 가문의 고리대금업에 대해서는 중세 유럽 최고의 시인인 단테(Dante Alighieri)가 쓴 <신곡>에서도 언급이 될 만큼 스크로베니 예배당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반드시 둘러보아야 할 예술품이자 건축물일 것입니다.
이렇게 중세와 르네상스의 파도바를 체험하고 나면 그 벅찬 감동을 이제 실제로 만끽할 시간입니다. 무엇으로? 바로 커피입니다. 파도바에는 베네치아의 ‘카페 플로리안’과 함께 두 번째로 오래된 카페테리아인 ‘카페 페드로키’가 있습니다. 멋드러진 19세기 건물과 화려한 내부 장식의 독특한 분위기 아래에서, 민트핫초코의 맛을 마음껏 음미해 주십시오.
맛과 지성과 아름다움이 모두 공존하는 역사와 전통의 도시, 볼로냐
예로부터 뚱보와 지성인, 그리고 붉은 벽돌이 많은 도시로 알려진 볼로냐. 사실 볼로냐는 관광지로서 반드시 찾아가 봐야 할 만한 부분들이 다른 로마, 베네치아, 피렌체 등에 비하면 적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반드시 볼로냐를 들러야 합니다. 이탈리아인들에게조차 ‘이탈리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손꼽히는 곳이 바로 볼로냐입니다. 따끈하고 진득한 볼로녜제 라구 파스타를 비롯해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최고의 이탈리아 음식들을 맛보며,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의 공기를 마시며, 보통의 여행자들은 누릴 수 없는 치열하면서도 유쾌한 볼로냐의 분위기를 마음껏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볼로냐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계 최고의 미식 도시임을 숨기지도 않고, 숨길 생각도 없습니다. 맛있는 요리 문화를 가진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야말로 볼로냐 요리는 이 따뜻하고 유쾌한 사람들의 자존심인 셈입니다. 정말 ‘진.정.한’ 이탈리아의 음식을 맛보세요. 여러분의 이탈리아가 달라집니다. 이것이 진짜 이탈리아 음식임을 알게 되실 겁니다. 치즈와 토마토, 육수 등 깊고 풍성한 볼로냐의 음식에 가장 잘 어울리는 볼로냐의 산지오베제 레드와인도 좋지만, 밝고 유쾌한 볼로냐 사람들의 정서와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피뇰레토’ 스파클링을 맛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문화와 예술에 있어서도 볼로냐는 결코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 등의 주요 도시에 모자라지 않습니다. 현존하는 세계 유수의 명문대학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공인받은 볼로냐대학교의 도서관은 대단히 아름답고 화려합니다. 아르키진나시오 도서관에는 볼로냐대학교에서 유학했던 수많은 유럽의 명문자제들 집안의 문장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파도바에서 보았던 해부학 강의실은 볼로냐에도 있습니다. 두 곳이 모습이 아주 많이 다르기에 함께 비교해보시면 좋은 경험이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이탈리아에서, 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두 곳의 대표적인 강의실을 둘러보시며, 중세와 근대의 대학 속에 깃든 학문에 대한 옛날 사람들의 열정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볼로냐의 대학로라고 할 수 있는 잠보니 거리와 베르디 광장에서 맥주를 마시며 전세계에서 몰려든 젊은 대학생들의 에너지와 열정에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일반인들조차 천재들이었던 르네상스의 성지, 피렌체
피렌체 답사의 시작은 역시 ‘메디치 가문’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어떤 문헌과 사료, 어떤 새로운 이론과 연구가 나오더라도, 피렌체와 메디치 가문의 관계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피렌체를 찾는 모든 사람이 ‘메디치’를 알고 찾아옵니다. 그러나 진짜 메디치의 흔적들은 찾지 않습니다. 메디치가 만든 피렌체 르네상스의 흔적들은 메디치 가문이 남긴 건축물과 자신들의 구역들을 구석구석 발로 찾아 뒤져야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양 고대·중세사와 르네상스문화사를 강의하는 인솔자는 메디치 가문이 어떤 의도로 어떤 미술품을 주문했으며 그 미술품들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를 하나하나 자세히 뜯어서 풀어드릴 것입니다. 그렇게 메디치 가문이 살았던 메디치 저택과 메디치 예배당, 그리고 일반 관광객들은 거의 찾지 않는 ‘산 로렌초 성당’을 답사하면서 메디치 가문이 만든 피렌체 속의 메디치와 그 뒷이야기들을 풀어드릴 것입니다. 피렌체에서의 첫날은 바로 ‘메디치 데이’로 채워집니다.
메디치 가문의 정치적 위상과 탄생은 일단 메디치 저택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국내에서 메디치 저택이 왜 그 자리에, 그 위치로, 그 모습으로 세워져야 했는지 연구한 사람은 인솔자밖에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피렌체-메디치의 숨은 관계가 보입니다. 그리고 메디치 가문에서 산 로렌초 성당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산 로렌초 성당은 대체 왜 메디치의 대표적인 건축물인지 직접 들어가 봐야 합니다. 이 성당 속의 각 방들의 의미, 프레스코화의 의미 등은 오랜 기간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이 가졌던 힘을 그대로 보여주는 성당입니다. 국내 관광객들은 아무도 가지 않지만, 가더라도 전혀 그 의미를 읽어내지 못하겠지만 여러분들은 다를 것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세심한 손길이 곳곳에 묻어난 메디치 예배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르네상스기의 메디치와, 매너리즘 시대의 메디치는 또 아주 많이 다릅니다. 피렌체를 통치하는 성향부터 극단적으로 달라지게 되죠. 그때의 메디치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피렌체, 아니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두 미술관, 우피치와 피티 궁전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사무실과 레지던스라는 의미를 지닌 두 건물과 수집예술품들을 감상하며 ‘메디치 데이’를 마무리합니다.
그러나 피렌체는 메디치‘만’의 도시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피렌체는 오히려 한 가문이 통치할 수 있는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이 도시를 화려하게 꾸민 것도 사실이지만 ‘피렌체 공화국’과 ‘공화국의 자유’를 도시의 아름다움이자 자존심이라고 생각하며 피렌체에 대한 찬가를 불러왔던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만든 피렌체가 오히려 더욱 더 피렌체 정통에 가까웠습니다. 피렌체 공화국을 만들었던 이들이 남긴 피렌체의 흔적들 역시 살펴봅니다. 피렌체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라 불리우는 산타크로체 성당에서 피렌체 르네상스 주역들의 영묘를 방문하고 이 교회 내에 있는, 지금은 피렌체에서 잊혀졌던 파치(Pazzi) 가문의 예배당을 답사합니다. 자유공화국 피렌체의 상징이자 심장부였던 팔라초 베키오와 오르산미켈레,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 등을 답사하면 메디치 밖에서도 독자적인 역사를 꾸려온 피렌체 사람들의 르네상스가 보입니다.
그리고 이번 피렌체 여행에서는 매우 특별한 코스를 추가하였습니다. 바로 ‘산탄드레아 별장’입니다. 르네상스가 낳은 최고의 ‘천재’,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르네상스가 낳은 최고의 천재, 마키아벨리가 피렌체 제2서기관에서 쫓겨난 후 <군주론>을 비롯해 그의 모든 사상들을 정리했던 곳, 아련하게 브루넬레스키의 쿠폴라가 보이던 이곳에서, 시오노 나나미의 말을 빌자면 ‘생각하는 것 외에는 할 것이 없어진’ 그의 후년을 되짚어 보고자 합니다.
이렇게 예술과 사상이 자유롭게 넘쳤던 피렌체에서도 즐거움을 맛보아야 합니다. 바로 두툼한 피렌체식 스테이크입니다. 전통과 역사가 넘치는 피렌체 스테이크 맛집 두 곳을 섭외했습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가 자랑하는 최고급 레드와인인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를 곁들여 스테이크 맛을 비교해 보시면서, 중세 및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연회의 기분을 마음껏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중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로 시간이 멈춰버린 곳, 시에나
이탈리아 중부를 책임지는 토스카나 주(州)에는 피렌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많은 토스카나의 마을들이 각자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하는데요, 그 중에 한 곳을 들러볼 생각입니다. 토스카나의 여러 마을들이 각자의 전통과 역사를 잘 보존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고도 근본 있는 도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곳 중 하나가 바로 시에나입니다. 고풍스럽고 중후한 분위기가 도시의 회랑과 광장에 맴도는 시에나의 골목을 걷고 있으면 길에서 절로 관복을 입은 중세 이탈리아의 관료들이 양피지로 된 책을 들고 서로 토론과 논쟁을 벌일 것 같은 장면이 절로 그려집니다. 실제로 시에나는 외국인을 위한 국립대학교와 일반 국립대학교가 같이 공존하는 두 개의 도시 중 하나입니다. 가장 학구적인 선비의 모습을 가진 이들이 시에나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시에나만이 가진 매력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니콜라 피사노, 도나텔로, 핀투리키오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꾸며진 후기 고딕 양식의 시에나 두오모에서 출발합니다. 시에나 두오모 건물 자체도 아주 뛰어난 중세의 건축물이며 그 내부에는 시에나 화파의 대부인 두초 보닌세냐의 장미화관 스테인드글라스를 비롯해 도나텔로의 조각들, 그리고 우아한 화풍을 자랑했던 핀투리키오의 프레스코로 정말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작품들을 마음껏 감상하십시오.
그리고 이어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인문학자로 명성을 날렸던 교황인 피우스 2세가 고향인 시에나의 대주교로 있던 시절 사용했던, 아름답기 그지없는 도서관이 있습니다. 핀투리키오의 최고 역작이라 할 수 있는 이 도서관 프레스코와 성가대 악보집을 보면서 중세 교회 문화를 그려보실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시에나가 자랑하는 것. 그것은 바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빠지지 않는 ‘캄포 광장’입니다. 시에나 사람들의 일상은 중세부터 지금까지 항상 이 광장에서 벌어져 왔습니다. 토스카나 농민들의 땀과 삶이 스며든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 한 잔 기울이시며 토스카나의 공기를 가득 담아 보내시기 바랍니다.
고대 로마와 에트루리아, 그리고 르네상스의 공존, 페루자
페루자는 매우 특별한 도시입니다. 역사가 오래된 이탈리아에서도 가장 오래된 역사는 바로 ‘에트루리아 문명’입니다. 이탈리아 북부부터 중부까지 이탈리아 반도의 고대를 살아갔던 이들이 바로 에트루리아 인들이었고 이들은 로마 문화와는 달리 색다른 문화를 지어냈습니다. 페루자는 이러한 에트루리아 문화부터 시작해 고대 로마, 그리고 르네상스의 화려한 문화까지가 모두 최고 수준으로 공존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도시입니다.
외부인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언덕의 꼭대기에 요새를 짓고 삶을 시작했던 에트루리아 인들. 그렇게 공격은 피했으나 가장 큰 문제인 물을 확보하기 위해 큰 우물과 수로를 지어야 했던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에트루리아 인들의 현명했던 기술의 흔적들부터 고대 로마의 화려했던 수영장 모자이크, 그리고 ‘라파엘로’의 스승이었던 페루지노의 작품들과, 소년 라파엘로가 유학을 와 고향을 그리며 앉아 보냈던 언덕까지 모두 살펴보려고 합니다. 페루자는 그럴 만한 매력이 충분히 넘치기 때문입니다.
에트루리아 인들의 삶의 고민의 흔적인 대형 우물과 수로, 에트루리아의 문을 통해 페루자의 시작을 살펴본 후, 페루자의 중세로 넘어갑니다. 페루자 광장의 분수와 두오모 역시 가장 대표적인 이탈리아 중부의 문화입니다. 에트루리아 인들이 쌓았던 성벽을 요새화했던 ‘로카 파올리나’를 답사한 후, 페루자의 르네상스 예술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올해는 페루지노의 사망 500주년입니다.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페루지노는 당대에는 그 누구보다도 큰 성공을 거뒀던 예술가입니다. 레오나르도, 보티첼리와 같이 베로키오 공방에서 공부했지만 보티첼리와 레오나르도는 넘보지도 못할 인기와 성공, 부를 누렸으며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서 그의 작품을 얻고 싶어 했습니다. 페루자에는 이러한 페루지노 최전성기의 최고 걸작인 ‘환전상 길드 프레스코 벽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북부부터 로마까지 이탈리아 전역으로 불려다니며 다양한 건축물들을 남긴 당대의 명 건축가 아고스티노 디 두초라는 건축가의 걸작인 산 베르나르디노 오라토리오를 방문합니다. 코로나19를 겪은 우리들은 다시금 역병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요, 이 오라토리오 내에 중세인들이 흑사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성모의 은총에 기대고 싶어 했는지를 보여주는 벽화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여행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서 이곳도 방문할 생각입니다.
그 외에도 페루자는 고대 로마의 모자이크부터 미니-메트로라 불리우는 귀여운 트램까지 매우 다양한 흥밋거리가 가득합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언덕 위로 올라왔던 에트루리아 인들처럼, 넓디넓은 이탈리아 중부의 평원을 내려다보며 페루자에서만 맛볼 수 있는 세련되고 비단결 같은 ‘몬테팔코 디 사그란티노’ 와인을 즐기시면서 흥겨운 페루자 사람들을 만나보십시오.
순수한 흰색으로 뒤덮인 종교와 평안의 마을, 아시시
여행은 이제 종반을 향해 갑니다. 이탈리아는 문화와 예술의 나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종교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이탈리아뿐 아니라 유럽의 중세는 신과 교회가 삶에 깊이 배어들어 통제하는 시대였습니다. 청빈하고 희생적인 성인(聖人)의 등장은 교회와 민중들 모두에게 큰 지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는 그러한 의미에서 이탈리아의 중세를 가장 대표할 수 있는 성인입니다. 화려한 부자집 아들로 태어나 모든 것을 하루 아침에 버리고 고행을 이어간 그의 삶이 오롯이 녹아있는 아시시에서,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과 산타 키아라 성당, 그리고 프란체스코 성인의 소박함과 자연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 산 다미아노 수도원을 동시에 도보로 답사하게 되면 절로 삶에 대한 명상을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물론 종교인이 아닌 분들에게도 맑고 깨끗하며 평화롭고 눈부신 아시시의 풍광은 정서적 치유를 느끼게 해 줄 것입니다. 서양미술사를 자신의 등장에서부터 양분해 버린, 조토의 필치가 곳곳에 그려진 아시시를 거닐면서 삶과 여행, 그리고 사랑의 의미를 되새겨 봅니다.
절벽 위에 지어진 수천 년의 역사, 슬로우시티로 거듭난, 오르비에토
이탈리아의 중부를 수놓았던 에트루리아 문명은 페루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로 향하는 길에 들른 오르비에토에도 있습니다. 페루자가 산 위에 세워진 도시라면 오르비에토는 절벽 암반 위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역시 에트루리아 인들이 세웠던 도시답게 가파른 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어 그 특유의 흔적들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매우 매혹적이면서도 독특한 도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시에나의 두오모와 함께 오르비에토의 두오모는 가장 전형적인 이탈리아의 후기고딕 양식의 건축물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두 건축물은 매우 비슷하게 생기기도 했는데요. 시에나 두오모에 핀투리키오의 프레스코가 있다면, 오르비에토의 두오모에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의 모티브가 되었던 루카 시뇨렐리의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많은 르네상스 작품들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친 어마어마한 작품입니다.
오르비에토 인들은 절벽 위에 도시도 세웠지만 절벽 위라 공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찾아낸 방안이 바위 아래로 땅을 파고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르비에토에는 어느 곳에나 찾아보기 쉽지 않은 지하도시가 생겼습니다. 오르비에토의 대표적인 우물은 산 파트리치오 우물도 그 결과물입니다. 장엄하다 못해 으스스하기까지 한 파트리치오 우물과 오르비에토의 지하도시를 감상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명물이던 오르비에토의 푸니쿨라(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체험, 매우 즐거우실 겁니다.
게다가 오르비에토는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의 삶에 브레이크를 건, 최초의 슬로우시티입니다. 모든 것을 여유있게 느긋하게 처리하는 그런 마을입니다. 이러한 슬로우시티의 자랑이라면 이탈리아 중부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오르비에토의 화이트와인이죠. 여행 막바지라 지친 몸을 몸에 좋고 시원한 오르비에토 와인으로 달래보시는 건 어떠실까요.
서양 문명의 어머니이자 영원의 빛으로 뒤덮인 도시, 로마
여행의 마무리는 역설적으로 서양의 문명이 시작된 로마에서 지으려고 합니다. 명상과 경건한 삶에 대해 생각해 본 후, 로마로 이동해 가볍게 로마를 거닐겠습니다. 로마는 걸어다니면서 보는 것이 훨씬 더 많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로마와 함께 호흡해 온 ‘콜로세움’에서 출발합니다. 물론 이 인근에는 포로 로마노를 비롯해 카이사르의 동상 등 여러 다른 많은 흔적들을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로마는 크게 ‘걸으면서 보는 것’과 ‘들어가서 보는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로마에서의 첫 날은 가볍게, ‘로마의 휴일’이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고대 로마의 원형 건축물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판테온, 로마 사람들의 정서적 휴양지인 나보나 광장 등을 답사하며 로마에서 우리가 밟고 디디는 돌바닥 하나하나가 모두 로마의 역사입니다. 물론 미술관도 빠질 수 없죠. 정작 로마의 중요 미술품들은 다 모여있지만 한국인들은 잘 몰라서 안 가는 ‘로마 국립고전미술관’을 찾을 생각입니다.
여기에는 이탈리아 바로크가 배출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초상화가 있으니 어떤 작품일지 찾아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역사와 예술, 문화는 크고 장엄하고 웅장한 것만이 아닙니다. 로마의 돌길 조각 하나를 열심히 깎았던 이름 모를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 역시 이탈리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너무 맛있어서 “여기다! 여기다!! 여기야!!!”라고 독일의 주교가 외쳤다는 에스트 에스트 에스트! ‘EST! EST!! EST!!!’ 화이트 와인을 맛보면서 여독에 지친 몸을 풀고 편안하게 로마에 녹아드시면 되겠습니다. 마지막 로마에서의 화려한 일정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서의 이틀째는 로마의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이어집니다. 로마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중부가 낳은 두 명의 거장들,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혼이 담긴 작품들로 이뤄집니다. 성부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로 탄생한 바티칸으로 들어가면 그 내부는 종교와 정치, 미술의 삼위일체로 이뤄졌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니콜라오 5세부터 레오 10세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종교와 정치, 예술을 꾸며왔던 여러 교황 성하들과 예술가들을 만나봅시다.
신 중심의 세계였던 중세에서도 인간을 구하고 찾으려 했던 르네상스의 예술이 어떤 모습으로 종교의 본산인 바티칸 내부에서 자리 잡았는지를 확인합니다. 흔히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성 베드로>상, 베르니니의 중앙 제단들을 보고 황홀경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성 베드로 성당 내에는 미술사적으로 이해했을 때 더욱 더 멋지고 환상적인 교황 성하들의 영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여유있게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를 차분히 둘러보겠습니다.
바티칸 미술관 내에서도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서명의 방>도 물론 놓치지 않고 찾아보겠지만 여러 당시의 문헌이나 기록 등에서 ‘엄청나게 화려한 곳’이었다는 증언을 찾아볼 수 있는 ‘세계 지도의 방’(마파 문디)도 천천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로마에서 더 친숙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은 르네상스보다 바로크입니다. 특히 로마의 바로크를 만든 두 명의 천재, 보로미니와 베르니니의 흔적들을 추적해 보는 것은 피렌체에서 메디치의 흔적을 따라가 보는 것과 같은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 곳곳에 흩어진 베르니니의 성당과 조각들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답사하면서 서양미술사의 한 장면을 장식했던 걸작들을 모두 만나보겠습니다.
베르니니의 걸작이 있는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 보로미니의 걸작인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이 두 성당을 방문하는 것은 로마를 예술적으로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발걸음입니다. 단순히 조각뿐만 아니라 건축과 외관에서도 베르니니와 보로미니의 라이벌 대전을 쫓아가다 보면 로마의 모더니티를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화려함과 가문, 권력, 정치가 어우러진 로마의 색다른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십시오.
그렇게 이탈리아에서의 마지막 밤을, ‘몬테풀치아노 다브루초’ 레드와인으로 장식하겠습니다. 예술과 음식, 미술(美術)과 미술(味術)에 취해 이탈리아에서의 마지막 밤을 눈과 가슴에 깊이 넣어두십시오. 함께 트레비 분수에서 던진 동전들이 다시 우리를 이탈리아에 돌아오게 해줄 거라 믿습니다.
이번 구지훈 교수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와인> 여행은 2024년 1월 17(수)-28(일)일, 12일간 진행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열정 투어! 르네상스 심장부 답사에, 와인 감상을 더하다> 기사를 확인 바랍니다.
[프레시안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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