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스스토리] 33년차 베테랑 경찰관의 '사모곡'(영상)

김세정 2023. 7. 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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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경찰서 교통조사팀 장남익 경위
어머니 그리워 민요 시작…'소리꾼' 14년

경기 구리경찰서 교통조사팀 장남익 경위는 현재 소리꾼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남양주=김세정 기자

[더팩트ㅣ김세정 기자] 깃발을 앞장세운 행렬 뒤로 망자를 태운 꽃상여가 지나간다. 신작로에 구슬픈 상여소리가 울려 퍼진다. 산골짜기 소년은 기묘한 슬픔에 이끌렸다. 어느 날은 잔칫집도 기웃거렸다. 장구와 꽹과리 소리 위로 넘실대는 민요가락에 가슴이 떨렸다.

학교에 가려면 개울을 건너고, 산을 넘어야 했다. 마을 어귀 성황당을 지날 때면 흩날리는 천 조각에 오금이 저렸다. 귓가에 맴돌던 잔칫집 가락과 상여소리를 몰래 흥얼거리며 외롭고 무서운 십리길을 달랬다.

변변치 않던 살림은 소년의 어깨를 무겁게 눌렀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는 남의 집 살림을 도우며 5남매를 키웠다. 어린 소년은 소리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조차 감히 하지 않았다. 안정적 직업을 어서 찾으려 제대 직후인 1991년 경찰 제복을 입었다. 경기 구리경찰서 교통조사팀 장남익(54) 경위의 이야기다.

장 경위는 교통사고 조사를 처리하는 베테랑 경찰관이지만, 뒤늦게 살아난 소리에 대한 열정으로 소리꾼으로도 활동한다. 풀내음이 싱그러이 풍겨오던 초여름 어느날, 공연을 앞두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장 경위를 만났다.

고생만 하다 떠난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바람이 아프도록 차던 겨울밤. 땔감이 떨어졌다. 파출부 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는 혹여나 자식들이 추위에 떨까 지친 몸으로 칠흑같은 야산에 들어갔다. 한참이 지나서야 어머니는 눈 덮인 생솔가지를 한 아름 안고 돌아왔다. 붉게 튼 어머니의 두 볼에 어린 아들은 눈물을 몰래 삼켰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솔가지를 아궁이에 넣으며 어머니는 노랫가락을 흥얼거렸다.

생업에 지쳐 흔한 유행가도 모르고 살던 어머니는 알 수 없는 가락만 첫 마디처럼 달고 사셨다. 생솔가지와 노랫가락에 대한 기억은 장 경위를 종종 슬픔에 잠기게 했다. 어머니가 부르던 노래는 대체 뭐였을까. 차츰 생활에 여유가 생길 때쯤, 깊은 궁금증을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차올랐다. 2009년 민요학원 문을 두드렸다.

장 경위는 '서도소리'로 민요의 세계에 입문했다. 40줄이 돼서야 뒤늦게 적성을 찾은 것이 아쉽기보다는 되레 행복했다. 목청이 조금씩 영글어 갈 때마다 희열이 찾아왔다.

"경찰이 민요를 하겠다니까 많이들 신기하게 생각하죠. 사실 흥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수줍음이 많았는데 마음속에는 흥이 있었나 봐요. 민요를 배운 게 밖으로 분출하는 계기가 됐죠. 성격도 외향적으로 변했어요."

알수록 배움의 갈증은 커졌다. 황해도 무형문화재 3호 '놀량사거리' 보유자인 한명숙 명창을 찾아가 사사받았다. 소리와 함께한 지 어느덧 14년. "소리와 결혼했다"고 스스로 표현할 정도로 푹 빠졌다. 이론 공부를 위해 16학번 늦깎이 신입생이 되기도 했다.

바쁜 업무 와중에도 장 경위는 우리 소리의 매력을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남양주=김세정 기자

어머니가 흥얼거리던 노래는 '정선아라리'였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구름이 막 모여든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날 넘겨주게"라는 가락으로 당신의 고달픈 삶의 무게를 견뎠을 게다. 때때로 장 경위는 어머니 산소를 찾아 정선아라리를 부른다. 목놓아 부르면 어머니에게 마음이 전해지지 않을까. 그에게 민요는 '사모곡'이다.

바쁜 업무 와중에도 장 경위는 소리의 매력을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무대에 오르고 한달에 두번씩 요양원을 찾아 공연도 한다. 장 경위의 우렁찬 "얼씨구" 소리에 관객들의 어깨가 들썩인다.

소리에 빠졌다고 경찰 업무를 소홀히 하지도 않는다. 소리는 오히려 일의 기폭제다. 순경 시절 같이 장 경위는 아침 일찍 출근해 경찰서 청소부터 도맡아 한다. 도로교통사고감정사 공인자격증도 취득하는 등 업무 관련 계발도 잊지 않는다.

"경찰은 실체적 진실을 발견해야 해요. 사건을 맡다 보면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을 많이 보거든요. 보통 억울해도 법률적 지원 같은 걸 받기 어렵더라고요.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제가 더 힘들더라도 더 시간을 투자해서 조사를 마무리하면 보람차요."

일과 소리를 함께 하는 것이 힘들지 않냐는 물음에 손사래를 친다. 그는 "소리가 두루 도움이 된다. 경찰 일을 하다보면 시민들 앞에 나서서 때때로 결정을 해야하지 않나. 그런 부분에서 소리가 씩씩하게 활동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됐다"고 답했다.

소리에 빠졌다고 해서 경찰 업무를 소홀히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장 경위가 열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됐다. /남양주=김세정 기자

장 경위의 꿈은 소박하면서도 원대하다. 맛있게 소리를 표현하는 '시김새'를 잘하고 싶다. 배울수록 욕심이 생긴다. 언젠가는 명창의 반열에 오르지 않을까하며 오늘도 목을 가다듬는다. 또 '순경의 마음' 그대로 경찰 생활을 마무리하는 것도 인생 목표다.

"모든 예술이 그렇지만 소리는 자기와의 싸움인 것 같아요. 스스로 노력해서 느끼고 터득하는 순간이 오는데 저는 아직 그 순간을 맞지 못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업무도 또 잘해야죠. 저는 경찰을 정말 사랑해요. 그래서 순경처럼 초심을 유지할 거예요. 씩씩하게 활동하다 떠나고 싶어요."

sejungkim@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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