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우릴 살려주겠지” 희망찾아 떠났지만...제주인 100년 수난사 [방방콕콕]

송은범 기자(song.eunbum@mk.co.kr) 2023. 7. 29.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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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로 일손 턱없이 모자란 일본서
1923년 제주~오사카 항로 ‘개설’
고무·방직등 일본인 꺼리는 일에 투입
제주 인구 ‘4분의 1’ 이상이 일본 생활
차별 속 기회의 땅이 ‘고난의 땅’으로
영화 ‘피와 뼈’에서 1923년 제주인들이 오사카를 보고 환호하는 모습을 그린 장면.[자료=유튜브 채널 ‘영화돌 : 좋은영화 맛집’]
“대판(오사카)이여, 대판”

재일교포 故 최양일 감독의 영화 ‘피와 뼈’의 첫 장면은 1923년 배를 탄 제주인들이 굴뚝으로 가득 찬 일본 오사카를 ‘기회의 땅’처럼 바라보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오사카를 신세계로 여기는 듯 두루마기와 치마저고리를 입은 제주인들은 연신 ‘대판’을 외치며 환호하는데, 20세기 초 유럽 이민자들이 미국 뉴욕의 모습을 보고 흥분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제주 사람들이 몸을 실은 배는 제주와 일본 오사카를 잇기 위해 1923년 취항한 연락선 ‘군대환(君が代丸·기미가요마루)’이다. 일제강점기에 부산과 시모노세키(하관·下關)를 잇는 ‘관부(關釜)연락선’이 있었다면, 제주에는 오사카(대판·大阪)로 향하는 ‘제판(濟阪)연락선’이 운영됐다.

1934년 군대환에서 내리는 제주인들. [자료=수기하라 토오루(杉原 達) 교수의 저서 ‘越境する民’]
▲제주인 대이동=100년 전인 1923년 제주와 오사카를 정기적으로 잇는 제판항로가 개설되면서, 제주인들의 오사카 대이주가 시작됐다. 당시 오사카는 ‘동양의 맨체스터’라고 불릴 정도로 섬유·고무·유리 등 공장지대가 확장되고 있던 시절이라 일손이 귀할 때였다.

우리나라 내륙의 경우 농업이 노동력의 대부분을 흡수하고 있었던 반면 제주는 ‘장남 상속’의 문화 특성 등으로 새로운 일거리를 찾는 젊은 인구가 비교적 많았다. 실제 제판항로 취항을 전후로 오사카의 기업가들이 제주에서 취업 설명회를 열 정도였다.

제판항로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취항 첫해인 1923년 연락선 이용 인원이 8340명에 불과했지만, 1924년 1만9385명, 1925년 2만5552명, 1926년 2만9362명, 1927년 3만6087명, 1928년 3만1465명, 1929년 3만8078명으로 매년 증가했기 때문이다. 실제 1929년 9월 8일 오사카아사히신문에서는 ‘제주도에는 20만명 정도의 인구가 있고, 그 1할이 매월 오사카를 왕복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후 1934년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제주인은 5만명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20만명이었던 제주도 인구의 4분의 1이었다.

해방 후 제주인들은 대거 귀향 행렬에 나섰지만,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제주섬에 4·3이라는 대혼란이 불어닥치면서 살기 위해 ‘밀항선’에 몸을 싣고 일본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10일 제주대학교가 공개한 ‘재일제주인 1세대 생활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재일제주인은 1989년 11만7687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이후 2021년에는 7만4279명으로 크게 줄었는데, 이는 재일제주인 3~4세대를 거치며 일본으로 귀화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제주인들이 밀집한 오사카 이카이노 거리에서 오물 수거 손수레를 끌고 가는 청소부의 모습. 1960~70년대에는 당국이 오물을 제대로 수거하지 않아 동포들이 직접 청소부에게 의뢰해 오물을 치우는 작업을 맡겨야 했다고 알려졌다.[자료=안해룡 작가]
▲처참한 일본 생활=꿈만 같을 줄 알았던 일본에서의 생활은 처참했다. 일본인들의 차별은 둘째 치고, 당장 먹고사는 일이 문제였다.

제주인들은 일본인이 취업을 꺼리는 유리·금속·고무·화학·방직공장 등에서 하루 14시간 이상 일을 했다. 고된 노동의 대가는 한 달에 약 20엔이었는데, 이마저도 절반 이상은 고향으로 송금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 1927년 100엔20전으로 서귀포시 소재 토지 1840평을 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터전을 마련하는 것도 문제였다. 제주인들은 아쉬운 대로 개천가의 버려진 땅에 옹기종기 판잣집을 마련해 비바람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사람들에게는 돼지나 키우던 하찮은 들판(猪飼野)이었지만 오갈 데 없던 제주인들에게는 소중한 보금자리였다. 이곳은 훗날 오사카 재일동포들의 중심지인 이쿠노구(生野區)로 발전한다.

2019년 제주4·3연구소가 발간한 ‘4·3과 여성 그 살아낸 날들의 기록’에는 박승자 할머니(1922년생)의 얘기가 담겼다. 그녀는 1935년 군대환을 타고 도일, 메리야스 공장에서 일했다. 건강상의 이유로 1년 만에 귀국했지만, 4·3이 발발하자 고깃배를 타고 9살 자녀와 함께 다시 일본으로 넘어갔다.

박 할머니는 “일만, 일만 죽을락 살락하며 살았어… 딸들 보육원 가니까 신청하는 날 있다고 해서… 아랫아이 업고 큰년 손잡고 가니까 받아주지 안했어.… 남자가 나를 상담해서 ‘안 됩니다’하는 거야. ‘다스께데 구다사이’ 살려달라고 했지. 아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 갈 때도 과자가 어딨어. 아무것도 못 해줬어. 나중에 보니 수학여행 갈 때 친구들 부끄러워서 자기만 나무 아래 앉아서 먹었다고… 죽을락 살락 일을 해도….”

일본에서의 고된 생활은 제주어 노래로도 남아 있다. “무정한 군대환은 무사 날 태워 완(와서) 이추룩(이처럼) 고생만 시켬신고(시키는가)/창천 하늘엔 별도 많지만/내 몸 위에는 고생만 많구나…/나신디(나에게) 날개가 이서시믄(있었으면)/나랑이라도(날아서라도) 가구정 허건만(가고 싶지만)/날개가 어신 것이(없는 게) 원수로다.”

또한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1993년), ‘피와 뼈’(2004년), ‘박치기’(2004년), ‘용길이네 곱창집’(2018), ‘파친코’(2022년) 등 재일제주인을 주제로 한 영화와 드라마도 다수 제작됐다.

오영훈 지사는 지난 1월 28일 도쿄 정양헌에서 열린 재일본관동제주도민협회(회장 양일훈) 신년 인사회에 참석했다. [자료=제주도]
▲그래도 ‘고향’=고된 생활 속에서도 재일제주인들은 고향을 잊지 않았다. 제주에 남아 있는 가족들을 위해 월급의 절반 이상을 보냈고, 의료시설, 감귤 묘목, 전기·전화·수도·도로포장, 마을회관 등 고향 발전을 위한 활동도 전개한 것이다. 실제 제주도가 1960년대부터 2000년까지 집계한 재일제주인의 기증실적은 9533건·452억6700만원에 달한다.

이러한 재일제주인의 헌신은 역대 제주도지사들이 매년 일본으로 향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매년 1월 도쿄와 오사카에서 각각 ‘재일본관동제주도민협회’, ‘관서제주특별자치도민협회’의 주관으로 열리는 신년 인사회에 도지사는 물론 제주도의회 의장, 제주도교육감, 제주시장, 서귀포시장, 제주대학교 총장 등 주요 기관장들이 총출동하는 것이다.

올해 처음으로 신년인사회에 참석한 오영훈 지사는 “재일제주인들의 진심 어린 고향 사랑이 오늘의 제주를 이뤄낸 원동력이 된 것처럼, 글로벌 제주인들의 마음과 역량을 한데 모아 1000만 제주인 시대를 힘차게 열어나가겠다”며 “올가을에 열리는 세계제주인대회를 글로벌 제주인이 하나 되는 축제의 장으로 만들어 초대하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제주도는 지난해 총 2억8000만원의 예산을 투입해 △마을과 연계한 재일제주인 고향방문 초청 △재일제주인 공헌자의 밤 개최 △재일제주인 공덕비 공헌자 조사 △재일제주인 1세대 생활 실태조사 등 재일제주인 1세대 지원 및 공헌자 보은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 ‘방방콕콕’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발생하는 따끈따끈한 이슈를 ‘콕콕’ 집어서 전하기 위해 매일경제 사회부가 마련한 코너입니다. 지방자치단체의 소식부터 지역 경제 뉴스, 주요 인물들의 스토리까지 다양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현장에서 열심히 발로 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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