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선수도 스타 감독이 될 수 있음을 입증한 이승엽
(시사저널=김양희 한겨레신문 기자)
2022 KBO리그 와일드카드 결정전이 막 끝난 직후인 10월14일. 두산 베어스는 '신임 감독 이승엽'을 공식화했다. 계약액(3년 18억원)만으로는 역대 최고 신인 감독 대우였다. 선동열 전 감독은 2004 시즌 후 삼성 라이온즈 수석코치에서 감독으로 승격하면서 5년 15억원에 계약한 바 있다.
그야말로 파격적이었다. '국민타자'는 2017년 현역 은퇴 후 지도자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다. 코치를 거치지도 않았다. 그저 JTBC의 예능 프로그램 《최강야구》에서 은퇴 선수들을 이끄는 감독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선배 김한수 수석코치 영입이 '신의 한 수'
스스로는 현장 복귀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부담이 있었다. '코치 이승엽'은 그 이름값만큼 해당 팀 감독에게 부담을 줄 수 있었다. 선동열의 경우 스승이었던 김응용 전 삼성 감독 밑에서 1년간 수석코치를 하다가 삼성 구단 지휘봉을 물려받았다. 이승엽 감독은 자신의 뿌리나 다름없는 삼성에서 지도자 생활을 할 수도 있었으나 이는 삼성이나 자신에게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이승엽=푸른 피의 삼성 라이온즈' 공식은 그렇게 깨졌다.
'반달곰 사령탑 이승엽'의 첫 행보는 꽤 영리했다. 든든한 아군을 최측근으로 뒀다. 초보 사령탑이 겪을 수 있는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김한수 전 삼성 감독을 수석코치로 앉혔다. 이 감독은 이에 대해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분이었다"면서 "현역 시절 주전 3루수로 같이 뛰었고 삼성에서 코치, 감독으로도 있었다. 언젠가 지도자가 되면 같이 야구를 하고 싶었다"는 이유를 댔다. 더불어 "선수단을 이끌면서 내가 약간 망각하거나 지나치고 갈 수 있는 부분을 잡아줄 수 있을 것 같다.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줄 수 있는데 내 후배라면 이런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도 했다. 프로 현장 지도자 경험이 전혀 없는 이 감독에게 김 전 감독은 최고의 어드바이저가 됐다.
모그룹이 비상경영을 끝낸 두산 구단 나름의 선물도 있었다. 두산그룹은 2020년 두산중공업(현 두산에너빌리티)이 파산 위기에 몰리면서 두산인프라코어·두산솔루스·두산타워 등 주요 자산을 매각했다. 이 와중에 야구단 매각설까지 흘러나왔다. 실제로 야구단 운영도 타격을 받아 2군 구장인 이천 베어스파크를 담보로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로부터 자금을 차입해야만 했다. 이후 두산그룹은 재정비됐고 야구단 운영 또한 숨통이 트였다. 그리고 포수 양의지를 전격 복귀시켰다.
양의지는 두산 베어스 전성기를 이끌다가 FA로 NC 다이노스로 이적해 NC의 창단 첫 우승(2020년)을 이끌었던 터. 두산은 NC, 한화 이글스와 몸값 줄다리기 끝에 FA 역대 최고액(151억원)을 양의지에게 안기면서 재영입에 성공했다. 두산그룹으로서는 '양의지 영입' 하나만으로도 그룹의 건재를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모그룹의 전략적 투자와 함께 이승엽 감독은 천군만마를 얻었다. 7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우승 3차례)했다가 작년 9위로 미끄러졌던 두산 또한 반등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제는 선수가 주연, 나는 조연일 뿐"
그러나 개막 직전까지 두산을 강팀으로 꼽는 시선은 거의 없었다. 양의지가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김재환, 김재호, 정수빈 등 주축 선수들의 나이가 상당했고 세대교체는 더디기만 했다. 게다가 프로선수 지도 경험이 전혀 없는 초보 사령탑이 지휘하는 터. 개막 직전 열린 미디어데이 때 "가을야구에서 만날 것 같은 팀을 두 개씩 골라 달라"는 질문에 어떤 감독도 두산을 선택하지 않았던 이유다.
4월 야구가 시작되자 이승엽 감독의 야구는 호불호가 갈렸다. 두산은 작년까지 김태형 감독 밑에서 빅볼을 추구하는 팀이었다. 그러나 이 감독은 번트를 비롯한 작전 야구를 많이 하는 올드 스쿨식 야구를 선보였다. 경기 운용 경험이 없으니 투수 교체에도 미숙함을 드러냈다.
두산은 4월 12승11패1무(승률 0.522), 5월 11승11패(승률 0.500), 6월 10승14패(승률 0.417)의 성적을 냈다. 외국인 선발투수 딜런 파일이 부상으로 들쑥날쑥하고 외국인 타자 호세 로하스도 기대 이하였다. 김재환 등도 슬럼프에 시달렸다. 6월말 두산의 순위는 6위(33승36패1무·승률 0.478)였다.
하지만 딜런을 방출하고 브랜든 와델을 새롭게 영입하는 등 팀 분위기를 쇄신하면서 살아났다. 7월 들어 연승을 이어가며 5할 승률을 넘기고 3위로 도약했다. 이 감독은 후반기 첫 경기였던 7월21일 광주 KIA 타이거즈전에서 승리하면서 데뷔 시즌에 10연승을 기록한 사령탑이 됐다. 베어스 감독 최초의 업적이다. 25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전을 승리로 이끌며 김인식(2000년 6월16~27일), 김태형(2018년 6월6~16일·이상 10연승) 전 감독도 경험하지 못한 11연승 고지를 밟았다. 두산 구단 역대 최다 연승이다.
이 감독 스스로는 열린 소통을 팀 상승세의 원동력으로 꼽는다. 이 감독은 "선수들이 잘하고 있어서 내가 조금 더 잘하면 팀 성적이 더 좋아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고 자신을 낮추면서 "지도자 경험이 없기 때문에 투수 교체나 작전, 타이밍 싸움에서 미숙했던 게 많았다. 실수하면 다음 날 야구장에서 코칭 스태프와 경기를 복기하면서 조금씩 개선해 가는 과정을 거쳤다. 실수를 인정하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고 생각했고 (전반기 동안)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코치들에게는 자신의 과오에 대해 가감 없이 얘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로 팀의 발전적 방향을 모색했다. 열린 사고를 바탕으로 시행착오를 줄여갔던 셈이다. 이 감독은 이전 인터뷰에서 "자만심으로 똘똘 뭉쳐 일본에 갔지만 여러 일을 겪으면서 겸손을 배웠다"고 말한 바 있다. 초보 감독은 '감독'이 아닌 '초보'에 방점을 찍으며 지도자로 성장해 가고 있다.
이승엽 감독은 개막 직전 스스로에게 다짐한 것이 있다. '고생길이겠지만 내가 선택한 일에 후회하지는 말자. 지금은 '선수 이승엽'이 아니라 '감독 이승엽'이다. 선수단을 잘 아울러서 좋은 팀 만들어보자.' 그리고, 그는 이런 말을 했었다. "나는 주인공을 많이 해봤다. 이제는 선수가 주연, 나는 조연이다. 야구장의 조연으로 주연 선수들이 야구장 안에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낼 수 있도록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주겠다."
스포츠계에는 '스타 선수는 스타 감독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사자 우리를 나와 반달곰 동굴로 걸어 들어간 '라이언 킹'은 통념을 깨는 포효를 이어가고 있다. 반달곰으로 변한 사자의 발톱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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