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아들이 모두 사랑했다...잊을 수 없는 달콤함, 마시기 딱 좋네 [전형민의 와인프릭]
“여러분이 영국이나 영연방, 전 세계 영토 어디에 살든 그리고 배경이나 신념이 어떻든지 간에, 저는 평생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을 충실함과 존경, 사랑으로 섬기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2022년 9월9일, 지난 70년 간 재위했던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의 서거 소식을 알리고, 영국 윈저 왕조 제5대 국왕으로 즉위한 찰스 3세는 첫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주 시절 “내 삶이 길건 짧건, 평생을 그대들을 섬기는 데 바치겠다” 고 선언했던 엘리자베스2세의 유지(遺旨)를 잇겠다는 의지로 읽힙니다.
찰스3세는 어머니의 서거에 대한 애도 기간을 갖고 지난 5월6일에야 대관식을 열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군주제에 대한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만, 역사의 주요 사료로 남은 대관식을 온라인으로나마 구경하는 것은 꽤 흥미로웠습니다. 전통대로 기원 전 700년 대관식에서부터 쓰였다는 ‘운명의 돌’을 넣은 대관식 의자가 등장했고, 4톤짜리 황금마차를 타고 버킹엄으로 돌아오는 ‘왕의 행렬’도 70년 만에 재현됐죠.
즐거운 날에 술이 빠질 수 있나요. 이날 대관식에도 어김없이 와인이 등장해 세계 와인러버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는데요. 와인을 좀 아시는 분이라면 고개를 갸웃할만한 와인이어서 더 관심을 샀습니다. 어떤 와인이었을까요?
영국 왕실도 샴페인을 참 좋아합니다. 찰스3세의 왕세자 시절 고(故) 다이애나 왕세자비와의 결혼식에 쓰인 조셉 페리에를 비롯해 왕실이 공식 인증하고 납품받는 샴페인만 6종류입니다. 모엣 샹동 등 몇몇 샴페인 하우스는 대관식을 앞두고 찰스3세 헌정 샴페인을 출시하기도 했고요.
대관식은 새 왕의 즉위 사실을 널리 알리는 공식 행사인 만큼 크게 축하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날 대관식에는 샴페인 대신 와인 업계에선 비교적 덜 알려진 크로아티아의 한 화이트 와인이 올라 많은 이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습니다. 일록 셀라(Ilocki Podrumi)라는 와이너리에서 양조한 트라미나츠 프린시포바츠(Traminac Principovac) 2019입니다.
여기엔 어머니인 엘리자베스2세를 기리고자 하는 찰스3세의 마음이 담겼다는 해석이 나옵니다. 트라미나츠가 70년 전인 1953년 6월2일 엘리자베스2세의 대관식에서도 사용된 와인이기 때문인데요. 젊은 시절 엘리자베스2세가 특히 좋아했던 와인으로, 당시 대관식에는 1947 빈티지 1만1000병을 주문했다고 합니다.
와인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와린이들끼리 공부 모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친구가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먼저 가져온 와인을 열어 시음 하고 있었는데, 늦게 온 그 친구가 테이블에 앉자마자 잔에 코를 대지도 않고 “어? 게부르츠트라미너네?” 라고 말해 모두를 놀라게 했던 적이 있습니다.
게부르츠트라미너의 특징 때문인데요. 향이 아주 강하고 인상적입니다. 달콤한 열대과일, 리치의 향이 짙게 베어나와 한 번 맡아보면 왠만해서는 잊혀지지 않죠. 늦게 온 그 친구는 이미 게부르츠트라미너를 접해봤기 때문에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초짜이던 당시엔 생소하고 긴 이름을 자연스레 발음하는 그를 사뭇 존경(?)의 눈으로 바라봤던 기억이 납니다.
양조자의 의도에 따라 살구, 복숭아 같은 핵과류 과실미를 보여주기도 하고, 아주 드라이한 경우 옅은 꽃향과 허브향이 나기도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육두구나 정향, 계피 같은 향신료도 느낄 수 있죠. 청포도인데 포도송이가 묘한 붉은 빛을 띄는 것도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생산지가 다양하고 비싸지 않은 가격에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강점입니다. 원산지인 프랑스 알자스(Alsace)를 비롯해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페인 등 잘 알려진 와인 양조국 뿐만 아니라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루미니아, 마케도니아, 터키 등 동유럽까지 전방위적으로 키웁니다. 신세계에서는 미국을 비롯해 뉴질랜드, 호주, 캐나다, 아르헨티나 등에서 키웁니다.
특히 라벨에 방땅쥐 따흐디브(Vendange Tardive·늦수확)나 셀렉시옹 드 그랑 노블(Selection de Grain Noble·귀부 포도 선별)이라고 적힌 녀석들이 보인다면, 구매해서 도전해보시길 권합니다. 방땅쥐 따흐디브는 일부러 포도를 늦게 수확해 과숙시키는 방법으로 당도를 끌어올린 후 양조한 와인, 셀렉시옹 드 그랑 노블은 보르도의 소테른처럼 귀부균을 활용해 수분을 날린 귀부와인입니다.
마침 찰스3세 대관식에 사용된 트라미나츠 프린시포바츠도 귀부와인이라고 합니다. 일록 셀러의 수석 양조학자 이바나 라구즈(Ivana Raguz)는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트라미나츠 2019 빈티지는 당도가 높은 엄선된 포도로 생산된 약간 달콤한(Semi sweet) 화이트 와인”이라며 “눈에 띄는 꿀향과 귀부 특성(Botrytis character)을 가지고 있어서 구조감이 있고 조화로운 와인”이라고 밝혔습니다.
지난 2011년 찰스3세의 장남인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 미들턴의 결혼식에는 트라미나츠 2007 빈티지 아이스와인이 선택됐고, 차남인 해리 왕자의 2018년 결혼식에도 트라미나츠 셀렉티브 베리 피킹 2015 빈티지가 쓰였다고 합니다.
이쯤되면 영국 왕실 경사 전용 와인이 아닌가 싶은데요. 전통과 유산을 중요시 하는 영국 왕실이 찰스3세 다음 군주의 대관식, 혹은 다른 경사에 다시 한 번 트라미나츠를 선택할지도 이색 관전 포인트가 될 전망입니다.
사실 처음 맛보는 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 게부르츠트라미너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결혼식이나 대관식 같은 중요한 행사에 참석해준 하객들에게 잊지못할 좋은 기억을 남기기 위한 선택으로 나쁘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달달한 맛과 향은 즐거운 날의 분위기를 좀 더 흥겹게 만드는 윤활유로도 손색이 없을테고요.
어쩌면 찰스3세가 게부르츠트라미너를 내놓은 이유 중 하나는 대관식에 와준 모든 하객들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음료를 내놓고 싶었던 마음이지 않았을까요? 혹시 근시일 내 경사에 반가운 손님이 방문할 예정인가요? 영국 왕실이 사랑하는 게부르츠트라미너를 준비해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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