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꽃의 영화뜰] 시대 따라 변한 영화 속 '선생님'… 그럼에도 여전한 건
[미디어오늘 박꽃 이투데이 문화전문기자]
고등학생이던 시절, 학기 초마다 주민등록등본을 의무 제출하곤 했었다. 학교가 학생의 인적 사항이나 전학·입학 정보 등을 파악한다는 이유였는데 대다수 교사들은 편의에 따라 “각 번호 1번 대 서류 걷어와!” 하기 일쑤였다. 학급번호 1번, 11번, 21번, 31번 친구들이 본의 아니게 한부모가정 같은 또래 친구들의 가정사를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만이 유일하게 이 서류를 '직접' 걷으러 다니셨다. 민감한 가정사를 지닌 학생들을 위한 남다른 배려는 다 큰 어른이 된 지금껏 기억에 남아있다.
오랫동안 영화 속 교사의 역할은 대개 폭력적이거나 야만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계열의 최고봉은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를 시전한 곽경택 감독 영화 '친구' 속 담임선생님(김광규)일 것이다. 부모 직업에 따라 노골적으로 학생을 무시하고 차별하던 70년대 교단의 민낯을 잘 보여줬다. 90년대 교실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이성한 감독의 '바람'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책걸상 전부 싹 다 밀어라” 교사는 자율학습을 도망친 학생을 꺾은 대걸레 몽둥이로 매질한다. 당시 교사들의 과도한 체벌을 짐작하게 하는 장면이다.
최근 묘사되는 교사들의 처지에는 눈여겨볼 만한 변화가 있다. 과거 역할과 달리 학부모에게 수모를 당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초년생과 다름없는 젊은 교사들이 주요 '타깃'이 된다. 김지훈 감독의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에서는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학교폭력 가해를 저지른 자식을 감싸려는 진상 학부모들이 여교사(천우희)를 압박하고, 김수인 감독의 '독친'(개봉 예정)에서는 가정 내 문제를 학교 탓으로 몰고 가는 비이성적인 학부모 때문에 남교사(윤준원)가 무고한 상황에 휘말리게 되는 식이다.
영화가 시대를 일정 부분 반영하는 대중예술이라고 볼 때,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작품 속 묘사가 점차 안타까운 모습으로 바뀌고 있는 건 곱씹어 볼 만한 문제다. 곽경택 감독의 '친구'나 이성한 감독의 '바람'이 70~90년대 교사들의 만행을 꼬집는 역할을 일부 수행했다면,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나 '독친'같은 최근 작품들은 역으로 교사 인권이 지독하게 침해당하는 현실을 묘사하고, 그로 인해 직업적 의지를 잃어가는 교사들의 위기상황을 지목한다. 크고 작은 취재를 거쳐 완성되는 영화 시나리오 특성상 교사 인권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돼 온 최근 수년간의 현실을 기민하게 반영한 것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영화는 여전히 어떤 '선생님'들의 가치 있는 존재를 힘 있게 보여주기도 한다. 베를린국제영화제 초청 후 국내 극장 상영 중인 이지은 감독의 '비밀의 언덕'(2023)에서 담임선생님 애란(임선우)의 존재감이 그렇다. 사회초년생 초등 교사로서 늘 좌충우돌하지만, 초등학생 주인공 명은에게만큼은 어엿한 어른이 되고자 노력한다. 가정환경을 숨기고 거짓으로 글짓기를 한 사실이 탄로나 가족에게 상처 줄 것을 걱정하는 아이에게 '때로 솔직함보다 중요한 건 상대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러주는 식이다. 돌이켜 보면 김보라 감독의 '벌새'에서 중학생 주인공 은희에게 삶의 희망을 넌지시 건넨 것 역시, 가족도 친구도 아닌 젊은 한문 선생님 영지(김새벽)이었다.
'비밀의 언덕'과 '벌새' 속 주인공들에게 정서적 후원자가 돼 주었던 선생님들을 볼 때, 오래전 손수 주민등록등본을 걷으러 다니셨던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을 떠올렸다. 예나 지금이나 말 한마디, 행동 한 번으로 채 어른이 되지 않은 아이들의 어떤 순간을 한 번쯤 따뜻하게 보듬어 주었던 선생님들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야 할 이들이 터무니없는 수모나 모욕 끝에 스스로 무너지는 일이 없는 사회이기를, 간절히 소망하게 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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