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핑크 하노이 공연…“‘베트남=한국, 태국=일본’ 공식이 성립하는 이유” [박종현의 아세안 코너]
아세안 일본 마당인데 현대차 판매 많아
중립 외교·젊은 생산인구·여성지위 강점
신간 ‘베트남 라이징’, “한·미·중·일 경쟁”
1975년 4월 30일 월남 패망, 1992년 12월 22일 한국·베트남 외교관계 수립, 2022년 12월 22일 한·베 수교 30주년.
29일과 30일 K-팝 걸그룹 블랙핑크(BlackPink)의 베트남 하노이 공연을 즈음해 한·베트남 관계를 상징하는 날짜를 꼽아보았다. 한국은 수교 이전에도 베트남과 물밑 교류를 확대해 왔다. 정부의 외교보다 빠른 게 기업들의 경제활동이었다. 한국은 1963년부터 제3국을 통해 베트남과 간접교역을 했다. 이때 베트남 입장에서 한국은 일본, 싱가포르, 홍콩에 이어 공산권을 제외한 4번째 교역국이었다.
한국은 탈냉전과 북방외교, 동구권 수교로 조성된 외교적 자신감을 발판으로 공산권의 영향력이 강했던 대륙부 동남아에 접근했다. 그 핵심 대상이 베트남이었다. 수교 이후 한 세대를 거치면서 양국은 의존도를 더욱 높여왔다. 협력 대상은 월남으로 통칭됐던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이 아닌, 전쟁을 통해 남·북베트남을 통일한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었다. 그렇기에 1992년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과 수교는 외교관계 재수립이 아닌 최초수립이었다. 한국과 베트남의 국가형성사를 연구한 윤충로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은 저서 ‘두 번째 베트남전쟁’(푸른역사)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양국은 문화학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규정한 ‘아시아 패러독스’의 흔적을 강하게 드러내 왔다. 영남대 박홍규 교수는 사이드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을 옮기면서 아시아 패러독스를 “역사 문제 혹은 영토 문제 등으로 인한 갈등과 불신이 존재하는 국가들 사이에 경제적인 상호 의존관계가 증대하는 현상”이라고 했다. 한국과 중국, 한국과 일본 관계가 그러한 사례에 해당될 것이다. 한국과 베트남 사이가 이에 못지않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을 묶는 아시아 4개국 개념이 필요할 수도 있다.
블랙핑크 공연이 아니더라도 베트남의 한국 사랑은 강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베트남을 알고 있을까. 수교 30주년 하고도 반년을 넘긴 시점에 이를 위한 적절한 도구와 통로를 찾았다. 전문가를 만나면 된다. 때마침 그런 전문가를 접할 수 있었다. 베트남 전문가 유영국 작가는 블랙핑크 콘서트는 베트남 문화공연계의 새로운 이정표로 기록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설명을 따라가 본다.
베트남과 관련된 다른 이야기를 들어보자. 베트남에서는 팥빙수와 냉면 등 차가운 음식 사업이 잘 안 된다. 한류 열풍과 베트남의 기후조건을 고려하면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기업들이 뛰어들지만 실패를 경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현지를 치열하게 파악하며 현지인의 시각을 분석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라며 “저의 경험을 전해보자면, 베트남 지인들 대부분은 ‘음식은 뜨겁게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고 했다.
신간의 내용은 물론 베트남을 포함한 아세안 전반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유 작가는 베트남으로 돌아가면 가까운 시기에 베트남투자경제연구소(가칭) 설립을 통해 현지 진출을 보다 체계적으로 다루고 경험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런 뜻에 공감하며 이후의 문장에서는 그를 연구소 소장으로 칭한다. 유 소장이 신간에서 다루고, 강연과 모임의 대화에서 언급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2023년 베트남 키워드를 살펴본다.
◆ 美·中·佛과 전쟁한 베트남의 자주 노선
베트남은 중립이다. 베트남은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단적으로 베트남은 미국과 중국, 어느 나라 편도 아니다. 역사적 경험에서 체득한 교훈일 것이다. 베트남은 자국에서 벌어진 전쟁을 통해 사실상 미국을 몰아냈고, 1970년대 말 캄보디아를 둘러싼 갈등 와중에 자국을 침공한 중국을 물리쳤다. 앞서 식민통치한 프랑스와 겨뤘으며, 2차세계대전에서는 제국주의 일본을 경험했다.
베트남 외교에서 ‘국익·중립’을 향한 고민과 실천은 강대국 사이에서만 표출되는 게 아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도 베트남은 이런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겉으로 봐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 편을 들 법도 하지만, 베트남은 이 사안에서도 중립이다.
유 소장에 따르면 베트남에는 러시아 유학파이면서 우크라이나와 인연이 있는 정·재계 지도층이 폭넓다. 미국 경제전문 포브스가 2023년 발표한 베트남 억만장자 6명 가운데 3명이 우크라이나에서 공부했거나 사업의 기틀을 다졌다. 베트남 일반 국민은 강대국 러시아의 침공으로 고통을 받는 우크라이나에 우호적이라고 한다. 러시아의 침공 논리는 1979년 중국의 침공을 기억하는 40대 이상의 베트남 국민들로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유 소장은 설명했다.
러시아를 마냥 비판하기도 힘들다. 유 소장은 베트남은 구소련 시절부터 러시아와 사실상 혈맹 관계를 맺어왔다고 설명한다.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했을 때, 러시아는 중국 견제를 위해 베트남을 도왔다. 국제사회의 러시아 비판이나 제재 동의에 베트남이 ‘기권’을 선택하는 배경이다. 물론 전쟁을 치렀던 미국이 동중국해 등에서 자극하는 중국을 견제하는 우방으로 거듭나는 처지에 베트남 외교가 향후 다른 보습을 보여줄 개연성은 있지만, 원칙은 분명해 보인다.
베트남은 젊고 강하다. 베트남에서는 해마다 신생아 100만 명이 태어난다. 올해 인구 1억 명을 돌파할 가능성이 크다. 2023년 현재 평균 연령은 32.5세다. 젊고 강한 생산력을 배경으로 2035년까지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달성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이상, 인구 1억 명 이상의 2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나라는 미국, 일본, 러시아, 중국, 멕시코 5개국뿐이다. 국민의 평균 연령까지 젊어 베트남의 미래는 밝게 그려진다. 밝은 미래는 도시화를 통해서 빨라질 것이다. 스마트시티 건설에는 한국의 여러 기업이 힘을 보태고 있다.
인구구조, 생산 활동과 관련해 유 소장이 강조한 대목은 여성의 경제활동 인구다. 베트남은 잘 알려진 대로 여성의 사회적 기여가 높은 나라다. 최초의 독립국가 토대를 마련한 이들은 쫑짝, 쫑니 자매였다. 프랑스와 독립전쟁 중에는 응웬 티 민 카이를 비롯해 보 티 사우 등 여러 여성 운동가들이 있었다. 여성에 대한 존중과 참정권 보장을 위한 노력은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과 10월 20일 ‘베트남 여성의 날’ 기념식을 통해 재확인된다. 1년에 여성의 날을 2차례 기념하는 나라가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르겠지만, 여성의 위상이 남다른 점은 분명하다.
유 소장은 2021년 국제노동기구(IL0)의 내용을 인용하며 “베트남은 생산가능 인구에 포함되는 여성들 중 경제활동을 하는 비율이 70%가 넘는 나라”라고 확인했다. 세계 평균 비율은 50%가 안 된다. 기자가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음식점과 커피숍을 찾으면서 유 소장의 생각과 크게 공감했던 부분이 여성의 사회활동 참여였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같은 집안에서도 남편은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서 시간을 보낼 때 여성은 출근해 가게 문을 열 준비를 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봤다.
◆ 현대기아차 사랑…‘사랑이 뭐길래’와 한류
‘베트남은 한국’이라고 할 수 있다. 유 소장은 “베트남은 한국이고, 적어도 아세안의 한국”이라며 베트남의 현재와 미래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태국과 견주어 비유했다. 베트남은 한국을 닮았고, 태국은 일본과 유사하다는 게 그의 비교이다. 태국 방콕포스트의 지난 3월 보도에 따르면 아세안 전체에 진출한 일본 기업은 1만5000개 정도인데, 태국에는 6000개가 진출했다. 동남아에 진출한 한국 기업 숫자를 온전히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베트남에는 9000개 정도가 진출해 있다는 게 유 소장의 설명이다. 그의 비교를 통한 설명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베트남=한국, 태국=일본’의 비교는 탁월해 보인다. 대칭 비교법을 사용했지만, 아세안에 대한 이해가 높지 않은 이들이라면 더 좋은 설명법으로 보인다. 자리를 함께 했던 고영경 연구원은 “(유 소장의 견해처럼) 베트남에 대한 이해는 한국 외교와 경제에 기회가 될 것”이라며 “정부의 적극적인 전략 마련과 전문가들의 도전적인 분석제시, 비즈니스 현장의 실천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고영경 연구원은 지난 4월 인도와 아세안 주요 6개국의 기업사례와 성장전략을 소개한 ‘7UPs in Asia’(박영사)를 내놓았다.
유 소장이 베트남에 대해 긍정적인 시선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은 사실이다. 현지에 오래 체류하며 애정을 갖고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애정을 두기 힘들었다면 그렇게 오래 머물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베트남 친화적인 그의 시선에 약간의 틈을 두면서 신간을 접하면 독해의 소화력은 더 강해질 것이다.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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