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할 권리'로 1년 동안 자동차 500만대 도로서 없앨 수 있다

2023. 7. 29.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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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發光] 전자 쓰레기와 도시 광산, 수리할 권리

[권승문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기획위원]
아프리카 가나의 수도인 아크라는 세계에서 가장 큰 전자 쓰레기(e-waste) 처리장이자 세계 최악의 유독물질 위험지역이다. 가나는 중고 전자제품을 연간 15만~21만t 수입하고 있는데 85% 이상이 유럽연합(EU)에서 온다. 수입된 전자 쓰레기 중 35%만 재활용되고 나머지는 버려진다. 가나와 같은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에서 버린(수출한) 전자 쓰레기(중고 전자제품)의 최종 처리장(수입국)이 되었다.

전자제품 쓰레기에는 납, 크롬, 망간 등 유독성 화학물질이 포함된 경우가 많아 처리 과정에서 주민들은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전자 쓰레기 처리장 근처에 풀어 놓은 닭이 낳은 달걀에서 유럽식품안전청 기준치를 220배 초과하는 다이옥신이 검출됐다. 다이옥신은 인간이 만든 물질 중에서 가장 독성이 높은 것 중 하나로, 체내에 축적되면 암과 장애를 일으킨다. 쓰레기 처리 과정 현장엔 어린이들도 있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작은 손이 분해 작업에 더 유리하다는 이유로 어린이들이 전자 쓰레기를 처리하기도 한다. 이렇게 전자 쓰레기 때문에 위험에 처한 아동이 약 1800만 명에 이른다.

전자 쓰레기를 저소득 국가에 수출하는 선진국

2019년 기준 전 세계에서 버려진 전자 쓰레기는 약 5400만t에 달했다. 에펠탑 5400개 무게이자 지구에서 가장 무거운 인공물인 만리장성(약 5300만t)을 쌓고도 남는 양이다. 한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1.5%(81만8000t)이지만 1인당 발생량은 15.8kg으로 세계 평균의 2배(7.3kg) 이상이다. 전 세계 전자 쓰레기는 2030년에는 40% 증가해 약 7500만t에 이를 전망이다.

하지만 2019년 한 해 동안 처리 허가를 받은 업체에서 재활용된 전자 쓰레기는 17.4%에 불과했다. 또한 재활용되지 못한 82.6%(4400만t)의 행방은 묘연하다. 대부분은 불법적으로 처리되거나 고철로 가장해 전자 쓰레기에 대한 적절한 처리 시스템이 없는 저소득 국가로 수출된다. 1992년에 발효된 바젤협약에 따라 유해폐기물의 국가 간 이동 및 교역은 금지됐다. 하지만 전자 쓰레기는 위험물이 아닌 구호품과 기부라는 이름으로 계속 거래되고 있다.

전자 쓰레기는 유해 물질을 함유하고 있지만, 자원 가치도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자제품에는 금, 은, 구리, 철, 알루미늄 등 일반적인 금속뿐만 아니라 코발트와 같은 희소금속도 들어있다. 핸드폰 100만대에는 금 24㎏, 구리 1만6000㎏, 은 350㎏, 팔라듐 14㎏이 포함돼 있다고 한다. 핸드폰 한 대(200g)를 만들기 위해 금, 구리, 텅스텐, 니켈 등 각종 귀금속 광물 10~15㎏(50배 이상)을 채굴해야 하는 만큼 핸드폰 등 전자제품의 재활용은 필수적이다.

전자 쓰레기의 자원 가치와 도시 광산

폐전자제품에서 금속자원을 추출해 재활용하는 산업을 도시 광산(Urban Mining)이라고 한다. 일본 정부는 최근 전기자동차 배터리 등에 사용되는 금속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동남아 국가들과 전자제품 폐기물 수거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금속원료·소재를 제조하는 글로벌 기업인 벨기에의 유미코어(Umicore)는 폐가전, 핸드폰 등 폐자원으로부터 금속을 회수하는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2021년 기준 국내 폐전자제품류는 9.4만t 수준으로 전체 폐기물의 0.4%이지만 최근 6년 동안 연평균 10.5%로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1인당 발생량은 세계 평균의 2배가 넘는다. 재활용률은 99.5%에 달하지만, 재활용되는 금속이 몇 종류고 얼마나 추출되어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국내에서 도시 광산 산업이 활성화되려면 정확한 재활용량을 파악해야 한다. 한국의 도시 광산 기업의 기술력은 해외 유명 기업에 비해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국내 도시 광산 기업은 대부분 중소기업으로 영세하기 때문에 기술력이 높은 해외 기업으로 자원이 유출돼 가공된 후 다시 수입되고 있다고 한다.

핸드폰 교체 주기 33개월…계획적 진부화 때문?

국내 핸드폰 교체 주기는 평균 33개월로 전 세계 평균인 43개월보다 빠른 편이다. 또한 핸드폰을 포함해 사용하지 않고 집에 방치해 놓고 있는 전자제품이 1인당 매년 4~5kg에 이른다고 한다. 핸드폰 교체 주기가 짧은 이유로는 우선 핸드폰이 '계획적 진부화' 전략이 자리 잡은 대표적 상품 중 하나라는 점을 들 수 있다.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도 지난 대선 후보들에게 '생활밀착형 5대 소비자 정책'을 제안하면서 "기업에서 새로운 상품의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상품을 제작할 때 일부러 상품의 개발을 진부화하거나, 노후화되도록 하는 계획적 진부화 현상으로 소비자가 스마트폰 등 제품을 오래 사용할 수 없게 되거나 수리를 받을 수 없어 이를 폐기물로 처리하는 과정은 환경오염을 발생시키고 소비자의 비용을 증가시킨다"고 지적한 바 있다.

또한 제품 설계 단계에서부터 수리를 어렵게 만들어 빨리 교체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배터리를 교체나 분리할 수 없게 만들거나 메모리를 추가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또한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의 조사를 보면, 한국 소비자들의 65%가 휴대전화를 사용하면서 파손 및 고장을 경험하는데, 고장이나 파손 시 수리를 하지 않는 이유가 비싼 수리비용 때문이라는 응답이 42.6%였다.

미국과 EU를 중심으로 '수리할 권리' 확대

탄소중립과 순환경제사회를 위한 '수리할 권리(right to repair)'가 미국과 EU를 중심으로 점점 확대되고 있다. 전자제품을 수리해 오래 사용할수록 당연하게도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일 수 있어서다. 유럽환경국(EEB)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유럽연합(EU)의 모든 스마트폰의 수명을 1년 연장하면 203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매년 210만t 감소시킬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스마트폰과 노트북, 세탁기, 진공청소기 등의 수명을 5년 연장하면 2030년까지 매년 거의 1000만t 줄일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는 1년 동안 자동차 500만대를 도로에서 없애는 효과와 같다.

미국 정부는 2021년 행정명령을 통해 소비자의 수리할 권한을 보장했고, EU도 2020년 신순환경제 실행계획을 발표하면서 스마트폰 등 5개 전자 제품군에 대해 수리할 권리를 보장하도록 했다. 이에 애플은 2021년 말부터 미국에서 아이폰 제품의 자가 수리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삼성전자도 지난해 8월 미국에서 해당 프로그램을 도입한 이후 최근 국내에도 자가 수리 프로그램을 일부 도입했다.

미국과 EU에서는 수리 방식 및 업체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수리에 필요한 부품이나 장비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 수리 보증을 장기간 요청할 수 있는 권리에서 나아가 수리하기 편한 제품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까지로 확장해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EU 계획의 핵심은 제품 내구성과 소비자의 수리권을 법으로 보장한다는 것이다. EU는 제품 생산 단계에서부터 수리 가능성, 내구성, 재활용성을 고려해 설계하도록 하는 '에코디자인 지침'을 두고 있다.

EU에서는 핸드폰을 최소 5년 이상 사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사회적 기업 '페어폰(Fair Phone)'이 만든 페어폰은 원료 채굴부터 제품 생산·폐기까지 공정무역에 초점을 두고 있다. 페어폰처럼 모듈화된 기기로 만들어 누구나 손쉽게 부품을 교체하거나 수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국내에서도 수리할 권리가 제대로 도입되려면 교체 주기가 세계 평균보다 짧은 것에 대한 인식 전환도 중요하지만, 이처럼 핸드폰을 오래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

한국은 지난해 연말 자원순환기본법을 순환경제사회 전환 촉진법으로 전부 개정해 오는 2025년 시행을 앞두고 있다. 수리권을 보장하는 내용의 법안이 2021년과 지난해에 두 건 발의되기도 했다. 하지만 도시 광산 산업과 수리할 권리에 관한 관심과 논의는 여전히 부족하다. 전자 쓰레기 문제는 국제 무역과 환경 정의, 순환경제와 산업 전환을 아우르는 중차대한 사안임에도 소소한 '소비자 권리'로 취급되고 있는 것 같다. 수리할 권리를 촉구하는 시민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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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승문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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