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테처럼 정성스레 새긴 붓의 흔적, 지나온 시간도 켜켜이 [박미란의 속닥이는 그림들]

2023. 7. 29.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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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주 - 가는 획 가득 머금은 구름처럼
70년대초 개념·실험적 작품 제작
80년대 고전 회화 방식으로 회귀
국내 화단 주류 경향과 거리두며
자신만의 조형 언어 발전에 집중
세필로 수없이 쌓아올린 단단한 형상
화가의 몸짓, 그리기의 시간 오롯이
회화의 신체성·촉각성·시간성 고찰

구름을 닮은 얼룩 하나. 한 걸음 다가설수록 섬세한 붓의 흔적이 시야를 빼곡히 메운다. 고유한 지문처럼, 오래된 나이테처럼 정성스레 새겨 그린 화면이 온유한 명상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느다란 획을 쌓아 만든 단단한 형상은 그리는 이의 지나온 시간을 켜켜이 간직하고 있다. 화면 가장자리를 따라 둔탁하게 바른 물감의 질감이 화면 내부의 섬세한 형상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직접 대면하지 않고는 온전히 감상할 수 없는 작품들이 있다. 시각적 형상을 인식하기에 앞서 촉각적 물성을 감지해야 하는 화면들이 그렇다.

김홍주(1945∼)는 세필을 사용해 그린 회화 연작으로 알려진 화가다. 김홍주의 작품 활동은 70년대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국내 화단의 보편적 관심사와 결부하여 시작되었고, 80년대 다양한 실험을 거듭하면서 전개되었다. 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한국미술의 주류와 결을 달리하면서 특유의 세필 기법에 몰두한 그는 끝내 시류에 휩쓸리지 않으며 자신만의 회화 세계를 구축해냈다.
작업실의 김홍주.
◆1970∼80년대 한국 화단과 김홍주

김홍주는 충청북도 회인에서 태어나 1969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1981년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학부 졸업 및 군 복무를 마친 이후 충주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72년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기 위해 상경했다. 1973년부터 이론가 김복영과 작가 이건용을 주축으로 결성된 전위적 개념미술 그룹 ‘ST(Space and Time)’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국내 화단에 성행했던 개념미술 경향 및 매체적 실험에 관심 갖게 됐다. ST는 탈 오브제 및 반(反)회화적 표현을 추구하면서 신체성, 퍼포먼스, 이벤트, 개념미술에 몰두하는 면모를 보였다. 김홍주 또한 1974년까지 개념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을 제작했다.

김홍주는 1975년 들어 작업의 방향을 회화로 전향했다. 물질성을 거부하는 개념미술이 자신의 생활 감각에 맞지 않으며, 관념적인 유희에 집중한다고 여겨져 회의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림 그리는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모더니즘 회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며 자신만의 회화적 표현을 탐색했다. 80년대 초반까지는 회화 이미지와 창틀, 거울 등의 실물 오브제를 결합하여 선보이는 실험을 지속했다.

당시 김홍주의 작품은 작업 방식에 있어 그리기라는 고전적 방식을 고수하면서도 개념적 오브제를 활용하는 복합적 성격을 보인다. 회화의 관습적인 형식으로부터 탈피하는 한편 작품의 ‘현대성’을 획득하고자 한 노력이다.

80년대 초 서구 미술계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담론과 함께 신표현주의, 뉴 페인팅 등으로 불리는 표현주의적 형상 회화가 부상했다. 우리 화단에서도 국제 흐름을 인지하는 동시에 70년대 주류를 이룬 ‘단색화’에 대한 반발 심리 및 80년대 역동적인 사회 분위기에 힘입어 새로운 경향의 형상 회화를 실험하는 작가들이 활동했다.

그 가운데 사회적, 정치적 현실을 적극적으로 주제 삼은 형상 회화는 ‘민중미술’의 형태로 전개됐다. 이때 젊은 작가들이 주축이 되어 선보인 ‘신형상 회화’는 극사실주의에 가깝던 70년대 형상 회화와 구분되는 한편, 메시지에 주목하는 민중미술에 비해 형상 자체에 관한 탐구에 몰두했다는 점에서 분별성을 지닌다. 이들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표현을 지양하며 일상의 풍경과 대상을 형상으로 나타냈다. 실제 눈에 보이는 사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으며, 극도로 세밀한 묘사를 통해 대상의 본질에 파고들고자 했다.
왼쪽은 김홍주의 ‘무제’(2020), 오른쪽은 진 마이어슨의 작품들. 에스더쉬퍼 베를린 설치 전경. 조현화랑·에스더쉬퍼 서울 제공
김홍주의 회화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신형상 회화의 경향 안에서 논의될 여지를 지니는 한편, 해당 범주에 한정해 바라볼 수만은 없다. 정연심 홍익대학교 교수의 평론이 짚어내듯 전반적 작품세계의 흐름에서 보았을 때 “형상과 이미지의 복권보다는, 오히려 반대로 거울과 틀, 문짝 등과 같은 오브제들을 통해 … 회화의 한계와 경계, 확장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으며 “그림의 안과 밖이라는 경계를 서로 보게” 만드는 “반회화적 선택의 결과”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김홍주는 1983년에 연 두 번째 개인전 이후 현대성의 개념에 대한 회의적 시각을 갖게 되면서 고전 회화의 방식으로 회귀하여 자신만의 표현을 구축해 나아갔다. 이후 국내 화단의 주류 경향과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발전시키는 데 집중했다. 세필을 사용하는 기법이 화면에 정착하게 된 것은 1987년에 이르러서다.

◆서울 및 베를린에서 선보이는 김홍주의 회화

김홍주가 2002년에 그린 회화 ‘무제’ 1점을 한남동 소재 에스더쉬퍼 서울 전시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베를린 본사와 동시 개최한 전시 ‘뒤집기’의 출품작으로서다. 베를린 본점에는 작가의 2002년 작 ‘무제’ 1점과 2020년 작 ‘무제’ 2점을 포함하여 총 3점의 작품이 전시된다. 8월 19일까지 진행되는 해당 기획전은 에스더쉬퍼 서울 개관 1주년을 맞아 마련한 것으로 서울에서는 7인, 베를린에서는 8인의 한국 작가 작품세계를 소개한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전시명은 “안과 겉, 위와 밑을 뒤바꾸는 것, 일련의 사건을 되짚어 재정렬하거나 그 결과를 부정하는 행위”를 뜻하는 순우리말 단어로 지었다. 에스더 쉬퍼는 1990년대부터 도미니크 곤잘레스 포에스터, 리암 길릭, 피에르 위그, 필립 파레노 등 저명한 작가들과 가까이 관계 맺고 협업해 온 갤러리스트이다. 1989년 독일 쾰른에 자신의 이름을 딴 갤러리를 열었고, 1997년 베를린으로 이전한 이후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히토 슈타이얼, 아니카 이, 라이언 갠더 등 오늘날 세계 미술 현장의 중심에 서 있는 많은 작가들이 에스더 쉬퍼 소속이다. 2022년 가을에 파리와 서울 분점을 냈다.
‘무제’(2002).
‘무제’(2002).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김홍주의 회화 4점 중 2점은 2002년에, 다른 2점은 2020년에 그린 작품이다. 1990년대에 이르러 김홍주의 화면 위에는 글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화들, 한국의 도시 풍경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마치 흙덩이 같은 추상적 기호로 나타나는 형상들 등 독해할 수 없는 이미지들이 나타난다. 한편 1990년대 중반부터 10여년간 꽃을 포함한 식물 형상을 주요 소재로 삼은 회화를 제작했다. 출품작 중 2점의 2002년 작에서는 구체적 형상을 해체함으로써 수행적 작업 방식과 회화의 물성 자체를 강조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보인다. 구름처럼 흩어지는 형상을 가득 메운 세밀한 붓의 흔적이 화가의 몸짓 및 그리기의 시간을 함축하여 드러낸다. 2020년에 제작된 근작 회화 2점은 물감을 흘려보내는 기법을 활용하여 형상 사이 밀도의 간극을 강조한 점이 특징적이다.
‘무제’(2020).
노란 씨앗의 모양을 닮은 ‘무제’(2020)의 두꺼운 부피 아래 여린 물감의 색채가 가지런히 흘러내린다. 검은 구름을 연상시키는 ‘무제’(2020)의 형상 또한 세필로 물감을 수없이 쌓아 올린 결과물이다. 캔버스 천 본연의 성질을 변모시켰다고 할 만큼 묵직한 밀도로 채색된 형상이 인상적이다. 반면 그 아래 흘러내린 물감 줄기들이 대조적인 가벼움을 드러낸다.

가느다란 붓이 구름 위에 실어 날랐을 수많은 물방울들을 상상해 본다. 어느 흐린 날 먹구름이 빗방울 떨구듯, 가득 채워 저절로 흘려보낼 때까지 반복되는 쌓기의 시간을 가늠하여 보는 것이다. 가는 세필의 무수한 자국들이 행위의 집적을 드러낸다. 화가의 반복된 행위성을 강조하는 화면은 회화의 신체성과 촉각성, 시간성에 관한 고찰을 두루 이끌어낸다. 한국 현대미술의 발전과 동행하여 지나온 삶의 여정 속에서 김홍주가 끝없이 질문하고 탐구해온 것은 회화 자체의 가능성이며, 그리기라는 행위의 본질에 다름없다.

박미란 큐레이터, 미술이론 및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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