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테처럼 정성스레 새긴 붓의 흔적, 지나온 시간도 켜켜이 [박미란의 속닥이는 그림들]
70년대초 개념·실험적 작품 제작
80년대 고전 회화 방식으로 회귀
국내 화단 주류 경향과 거리두며
자신만의 조형 언어 발전에 집중
세필로 수없이 쌓아올린 단단한 형상
화가의 몸짓, 그리기의 시간 오롯이
회화의 신체성·촉각성·시간성 고찰
구름을 닮은 얼룩 하나. 한 걸음 다가설수록 섬세한 붓의 흔적이 시야를 빼곡히 메운다. 고유한 지문처럼, 오래된 나이테처럼 정성스레 새겨 그린 화면이 온유한 명상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느다란 획을 쌓아 만든 단단한 형상은 그리는 이의 지나온 시간을 켜켜이 간직하고 있다. 화면 가장자리를 따라 둔탁하게 바른 물감의 질감이 화면 내부의 섬세한 형상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직접 대면하지 않고는 온전히 감상할 수 없는 작품들이 있다. 시각적 형상을 인식하기에 앞서 촉각적 물성을 감지해야 하는 화면들이 그렇다.
김홍주는 충청북도 회인에서 태어나 1969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1981년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학부 졸업 및 군 복무를 마친 이후 충주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72년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기 위해 상경했다. 1973년부터 이론가 김복영과 작가 이건용을 주축으로 결성된 전위적 개념미술 그룹 ‘ST(Space and Time)’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국내 화단에 성행했던 개념미술 경향 및 매체적 실험에 관심 갖게 됐다. ST는 탈 오브제 및 반(反)회화적 표현을 추구하면서 신체성, 퍼포먼스, 이벤트, 개념미술에 몰두하는 면모를 보였다. 김홍주 또한 1974년까지 개념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을 제작했다.
김홍주는 1975년 들어 작업의 방향을 회화로 전향했다. 물질성을 거부하는 개념미술이 자신의 생활 감각에 맞지 않으며, 관념적인 유희에 집중한다고 여겨져 회의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림 그리는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모더니즘 회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며 자신만의 회화적 표현을 탐색했다. 80년대 초반까지는 회화 이미지와 창틀, 거울 등의 실물 오브제를 결합하여 선보이는 실험을 지속했다.
당시 김홍주의 작품은 작업 방식에 있어 그리기라는 고전적 방식을 고수하면서도 개념적 오브제를 활용하는 복합적 성격을 보인다. 회화의 관습적인 형식으로부터 탈피하는 한편 작품의 ‘현대성’을 획득하고자 한 노력이다.
80년대 초 서구 미술계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담론과 함께 신표현주의, 뉴 페인팅 등으로 불리는 표현주의적 형상 회화가 부상했다. 우리 화단에서도 국제 흐름을 인지하는 동시에 70년대 주류를 이룬 ‘단색화’에 대한 반발 심리 및 80년대 역동적인 사회 분위기에 힘입어 새로운 경향의 형상 회화를 실험하는 작가들이 활동했다.
김홍주는 1983년에 연 두 번째 개인전 이후 현대성의 개념에 대한 회의적 시각을 갖게 되면서 고전 회화의 방식으로 회귀하여 자신만의 표현을 구축해 나아갔다. 이후 국내 화단의 주류 경향과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발전시키는 데 집중했다. 세필을 사용하는 기법이 화면에 정착하게 된 것은 1987년에 이르러서다.
◆서울 및 베를린에서 선보이는 김홍주의 회화
가느다란 붓이 구름 위에 실어 날랐을 수많은 물방울들을 상상해 본다. 어느 흐린 날 먹구름이 빗방울 떨구듯, 가득 채워 저절로 흘려보낼 때까지 반복되는 쌓기의 시간을 가늠하여 보는 것이다. 가는 세필의 무수한 자국들이 행위의 집적을 드러낸다. 화가의 반복된 행위성을 강조하는 화면은 회화의 신체성과 촉각성, 시간성에 관한 고찰을 두루 이끌어낸다. 한국 현대미술의 발전과 동행하여 지나온 삶의 여정 속에서 김홍주가 끝없이 질문하고 탐구해온 것은 회화 자체의 가능성이며, 그리기라는 행위의 본질에 다름없다.
박미란 큐레이터, 미술이론 및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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