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폭행 가해자 도운 범법자, 대한적십자사 '기관장' 되다

김다린 기자 2023. 7. 29.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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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視리즈] 직장 내 괴롭힘과 진실 말할 권리➊
어느 공공기관의 모럴해저드
8년 전 벌어진 직장 내 괴롭힘 사건
동부혈액원 상급자가 후배 직원 폭행
당시 인사책임자 피해자에게
“참고 견뎌라” “양주 먹고 자라”
폭행 문답서 등 가해자에게 넘겨
이 문제로 법적 처벌까지 받아
이 책임자 동부혈액원 원장 복귀
대한적십자사 기관장급 고위 임원
헌혈, 적십자회비로 운영되는
대한적십자사 심각한 도덕적 해이

# 8년 전, 동부혈액원에서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이 터졌다. 상급자가 후배직원을 틈만 나면 폭행했다. 사건이 공론화했는데도 동부혈액원 행동강령책임관은 해괴한 말만 늘어놨다. "참아라." "괴로우면 양주 먹고 자라." 이 책임자는 가해자에게 피해자의 폭행 문답서를 건넨 혐의로 벌금형까지 받았다.

# 그런데, 가해자는 여전히 대한적십자사에 있다. 문제의 행동강령책임관은 지난 3월 동부혈액원 원장으로 복귀했다. 지금 대한적십자사에 없는 이는 '피해자'뿐이다. 이 납득하기 힘든 일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더스쿠프가 동부혈액원에서 벌어진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을 단독 취재했다.

8년 전 대한적십자사 신입직원이 상급자로부터 폭행을 당했다. 사진은 괴롭힘 사건이 벌어졌던 동부혈액원 혈액보관소.[사진=연합뉴스]

지난 3월 28일 대한적십자사는 인사 발령을 냈다. 문원일 전북혈액원 원장을 서울 동부혈액원장 자리에 앉혔다. 같은 원장 자리지만, 국내 헌혈 실적이 서울에 집중된다는 걸 고려하면 전보轉補라기보단 사실상 영전榮轉이었다.

대한적십자사는 전국에서 14개 혈액원을 운영 중인데, 이중 서울지역 3개 혈액원(중앙ㆍ남부ㆍ동부)이 규모가 가장 크다. 대한적십자사 관계자는 "내부적으론 서울 3개 혈액원을 1급지, 전북혈액원 같은 지방 혈액원을 3급지로 분류한다"면서 "동부혈액원은 전북혈액원과 비교해 시설이나 규모 면에서 훨씬 더 크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인사 직후 동부혈액원 내부에서 문원일 원장은 수군거림의 대상이 됐다. 문 원장이 8년 전 바로 이 동부혈액원에서 '직장 내 괴롭힘 사건'에 휘말린 전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일로 감사실로부터 '주의 조치'도 받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전근대적인 폭행 = 시점은 2015년 5월, 장소는 서울 동부혈액원. 등장인물은 고참직원 A씨와 신입사원 B씨다. 두 사람은 혈액 운송을 담당하는 기사실에서 함께 근무했는데, A씨는 갓 입사한 B씨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았다. 이듬해 4월 B씨는 A씨를 폭행사건으로 고소했는데, 법원 판결문에서 드러난 범죄 사실은 다음과 같다.

"동부혈액원 공급실 앞 주차장에서 A씨는 후배 B씨가 말을 잘 못 알아듣는다는 이유로 손으로 B씨의 귀를 잡아당겨 폭행했다(2015년 5월 4일)." "동부혈액원 공급실에서 A씨는 B씨가 웃으면서 인사를 한다는 이유로 손바닥으로 오른쪽 가슴을 3회 때려 폭행했다(6월 9일)." "A씨는 공급실 안에서 혈액박스 포장을 제대로 못 한다는 이유로 손바닥으로 B씨의 오른쪽 가슴 부위를 1~2회 때려 폭행했다(6월 11일)." "A씨는 혈액공급이 늦는다는 이유로 주먹으로 B씨의 오른팔 부위를 3회 때려 폭행했다(6월 15일)." "A씨는 아무 이유 없이 손으로 B씨의 오른쪽 귀를 잡고 다른 직원의 머리와 부딪치게 하는 식으로 폭행했다(10월 초순)." "A씨는 아무 이유 없이 손바닥으로 B씨의 가슴 부위를 1회 때려 폭행했다(10월 16일)."

A씨의 폭행은 전근대적이었다.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웃으면서 인사한다는 이유로, 어떨 때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B씨를 향해 손찌검을 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2019년 7월)을 시행하기 전이었고, 피해자가 증거를 일일이 수집하기 어려웠다는 점에서 실제 폭행 수위는 훨씬 더 가혹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한적십자사는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제대로 조치하지 못했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 심각한 후속조치 = 더 큰 문제는 후속 조치였다. 동부혈액원은 괴롭힘 피해자 B씨의 울타리 역할을 하지 않았다. 2016년 5월 B씨가 A씨를 고소하기 전에 이미 사건은 공론화했고, 징계위원회(2015년 11월)도 열렸다.

그 결과, A씨가 징계(견책)를 받긴 했지만 동부혈액원 측은 A씨와 B씨를 분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B씨는 직원 고충 처리를 담당하는 행동강령책임관으로부터 황당한 얘길 들었다. "괴로워서 잠이 안 오면 양주라도 마시고 자라." "참고 견뎌라." 사건을 축소하거나 두둔하는 뉘앙스로 해석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문제의 행동강령책임관은 다름 아닌 문원일 원장이었다. 당시 문 원장은 동부혈액원의 총무팀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문 원장의 발언은 사실상 '2차 가해'에 가깝다.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은 고충 처리 담당자의 관심과 처벌 의지가 중요한데도, 가해자 측에 편향적인 자세를 취했기 때문이다.

민간공익단체 직장갑질119의 오진호 집행위원장은 "인사 책임자가 사건을 두고 안일한 인식을 갖고 있으면 2차 피해 문제가 커질 수밖에 없다"면서 "대한적십자사가 가장 모범적이어야 할 공공기관이란 점에서 더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동부혈액원의 실질적인 도움을 받지 못한 B씨는 2016년 1월 끝내 사표를 던졌고, 그해 2월 대한적십자사 감사실에 '문 원장이 폭행 피해자를 위한 보호 조치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취지로 민원을 냈다.

사표를 던진 후 감사를 요청했던 거였다. 문 원장은 그로부터 한달 후 '관리책임 및 고충대응 소홀'을 이유로 주의 조치를 받았다. 고충 처리를 담당하는 책임자로서 적절치 못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문 원장은 주의 조치를 받았지만, B씨는 이미 사표를 던지고 동부혈액원을 떠난 상태였다. 대한적십자로선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이었다.

누군가는 '좀 더 참지'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B씨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다. 지독한 폭행 사건을 겪고도 가해자와 함께 생활한 것도 모자라, 고충 처리 담당자란 사람은 "참아라"는 해괴한 말을 늘어놓기 바빴기 때문이다.

정부는 대한적십자사에 혈액사업을 위탁해왔다.[사진=뉴시스]

■ 새롭게 드러난 범죄 = 문제는 문 원장의 폐단이 여기서 끝이 아니었단 점이다. 언급했듯 B씨는 문 원장이 주의 조치(2016년 4월)를 받은 직후인 A씨를 폭행 혐의로 고소했는데(2016년 5월), 이 과정에서 문 원장의 또다른 범죄 사실이 드러났다. 다름 아닌 '비밀 누설' 혐의였다.

시계를 다시 문 원장이 A씨와 B씨의 폭행 사건을 맡고 있던 2015년 10월로 돌려보자. 당시 B씨는 동부혈액원에서 폭행 사건과 관련한 문답서를 작성했다. 그런데 이 자료가 가해자 A씨에게 넘어갔다. 민감한 문서를 제공한 건 문 원장이었다. 문 원장이 사건 관련 대화 내용을 기록한 '문답서'를 가해자인 A씨에게 넘긴 것을 확인한 B씨는 2020년 5월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를 들어 문 원장을 고소했다.

당시 재판부는 범죄 사실을 인정하면서 벌금 200만원을 선고했다. "개인정보를 처리하는 자는 업무상 알게 된 정보를 누설하거나 권한 없이 다른 사람이 이용하도록 제공하는 행위를 해선 안 된다. 그럼에도 문 원장은 2015년 11월 A씨에게 B씨의 인적사항 및 폭행사건에 관한 내용이 기재된 문답서를 A씨의 휴대전화를 이용해 촬영하도록 허락하는 방법으로 제공했다."

■ 더 심각한 문제 = 이처럼 8년 전 동부혈액원 총무팀장 재직 시절, 가해자를 두둔하는 말을 피해자 앞에서 내뱉고, 피해자와 나눈 '폭행 문답서'까지 가해자에게 제공한 문 원장은 지난 3월 버젓이 동부혈액원 원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대한적십자사는 문 원장이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으로 벌금 200만원을 부과받은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대한적십자사 측은 "문 원장이 피해자의 문답서ㆍ개인정보 등이 담긴 내부자료를 유출한 다음 가해자에게 줬다가 법적 처벌을 받은 사실을 본사에 알리지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이는 명백한 도덕적 해이다.

대한적십자사 복무규정엔 "직원은 개인정보를 업무 외적으로 무단조회, 열람하거나 직무상 알게 된 개인정보를 부당한 목적을 위해 사용해선 안 된다"는 '개인정보보호 의무'가 들어있다. 이를 지역혈액원 원장급 인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확인하지 않은 건 대한적십자사가 시스템에 얼마나 큰 구멍이 뚫려 있는지 시사한다.

그럼에도 대한적십자사 측은 "문 원장이 동부혈액원에 온 건 기관장의 순환배치를 위한 통상적인 인사였고, 주의 조치는 징계가 아니라서 인사에 고려하지 않았다"면서 잘못한 게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런 대한적십자사의 행태를 지켜본 한 내부 관계자는 이렇게 꼬집었다. "본사가 인사 조치를 할 땐 개인정보호법 위반 사실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법적 처벌 사실을 인지한 지금은 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는가. 전형적인 제식구 감싸기 아닌가."

■ 구조적인 문제 = 8년 전 벌어진 이 사건은 '직장 내 괴롭힘'을 얼마나 뿌리 뽑기 힘든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피해자 B씨의 사례를 한번 더 짚어보자. A씨가 B씨를 폭행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A씨와 B씨는 한 공간에서 근무했다.

B씨의 울타리 역할을 해야 할 행동강령책임관은 오히려 가해자를 두둔했다. 심지어 이 책임자는 피해자 B씨가 회사에서 작성한 '폭행 문답서'를 가해자에게 제공하는 범법 행위까지 벌였다.

그런데 동부혈액원을 떠난 건 되레 폭행을 당한 B씨다. 가해자 A씨는 여전히 대한적십자사에 재직 중이다. B씨를 벼랑으로 몰았던 행동강령책임관은 되레 '기관장급'으로 승진했다. 우리가 동부혈액원 밑단에서 잠자고 있던 이 '폭행 사건'을 취재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피해자 B씨는 최근 문 원장이 동부혈액원 원장으로 영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간 묻어뒀던 이 사건을 꺼내놓기로 했다. 최근 그는 문 원장을 상대로 300만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도 추가로 제기했다. 피해자 B씨의 울분을 들어보자.

"소장을 수령했는지 문 원장이 손해배상금 300만원 중에서 250만원을 줄 테니 소송을 취하하라는 식으로 메일을 보냈어요. 어떤 반성도, 어떤 사과도 없었죠. 개인정보를, 그것도 힘없는 피해자의 정보를 가해자에게 넘겨주는 사람이 어떻게 동부혈액원의 원장이 될 수 있나요?"

대한적십자사 측은 문 원장에게 어떤 조치도 취할 계획이 없음을 밝혔다. 동부혈액원 원장에 오르기 전의 일이란 이유에서다.

대한적십자사 임직원들이 약속하는 반부패ㆍ청렴 실천 결의문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고도의 윤리적 가치관을 토대로 공정하게 업무를 처리하고 부패방지와 청렴한 공직풍토 조성을 위해 노력한다." 국민의 헌혈과 적십자회비로 먹고사는 대한적십자사는 대체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 조직일까.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강서구 더스쿠프 기자
ks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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