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로 미래로] 정전협정 70년, 통일촌 50년
[앵커]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로, 한반도엔 군사분계선이 설치됐습니다.
70 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남과 북은 이 군사분계선을 마주 보며 여전히 대치하고 있는데요.
분단의 갈등 속에서도 DMZ 서부전선 인근에선 통일에 대한 꿈과 희망을 늘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파주 통일대교 북쪽, 민간인 통제구역 안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 통일촌 이야기입니다.
1973년에 조성돼 어느덧 반세기를 맞았다는 이 마을에, 정전협정 체결 70년 기획 마지막 순서로 최효은 리포터가 다녀왔습니다.
[리포트]
평양, 개성 방향의 도로를 따라 임진강 너머,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된 지역으로 향합니다.
서부전선 최북단에 자리한 전망대에서,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까이에 있는 북녘을 바라봅니다.
[최효은/리포터 : "잘 보이는데요. 굉장히 크게 모여있는 공단같은게 모여있다라는 느낌을 어렴풋이 봐도 딱 느껴지거든요."]
개성공단과 북한의 선전 마을인 기정동 마을이 한눈에 보이는데요.
이곳을 찾은 외국인들에게도 남북 분단의 현실은 더욱 생생하게 전해지는 듯합니다.
[카사이 노부유키/일본인 관광객 : "가능하면 좀 더 민주적인 곳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이후 이제 약 7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포성은 멈췄지만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군사분계선은 우리가 넘지 못하는 금단의 선으로 남아있는데요.
북녘 가까운 이곳 민간인 통제구역엔 통일이 되지 못해 남아있는 역사의 현장이 있습니다.
평범해 보이는 이 마을은 군사분계선에서 불과 4.5km 떨어진 통일촌입니다.
[이완배/통일촌 이장 :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1973년 8월, 마을이 조성될 때부터 이곳에 살았다는 이완배 이장.
반세기 마을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이완배/통일촌 이장 : "장단지역 실향민들 40세대 군에서 제대하신 분들 40세대 해서 80세대를 갖고 통일촌이란 이름을 지어서 이 마을이 만들어진 겁니다."]
통일촌은 남북 간 체제 경쟁이 치열했던 시기, 이상적인 마을을 표방하면서 전선 방위와 남는 경작지 활용이라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전략촌이었습니다.
그래서 70년대엔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한다’는 구호 아래, 마을 사람들은 군사 훈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완배/통일촌 이장 : "우리 주민들은 전부 다 남자들은 예비군이고, 여자분들도 1년에 두 번씩 사격 훈련을 다 받았어요."]
당시, 북한의 공습에 대비해 만든 방공홉니다.
좁은 통로를 지나면, 넓은 지하공간이 나옵니다.
물기로 축축한 바닥과 엉성한 간이 화장실은 당시 방공호의 열악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방공호는 판문점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났던 1976년에 마지막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요.
[이완배/통일촌 이장 : "우리 주민들은 8.18사건때는 여기서만 있었지. 어디 나가지도 못하게 했어요 상황 끝날 때 까지 이틀동안 여기서 생활하고..."]
현재는 물과 방독면, 구급약품이 구비된 최신식 대피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2015년 8월 목함지뢰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이곳에서 이틀간 대피했습니다.
[이완배/통일촌 이장 : "대북 관계가 나빠져서 북한에서 이쪽으로 포를 쐈다 그러면 여기로 수시로 들어오는 거죠."]
분단으로 인한 긴장감이 여전히 팽배한 이 마을은 조성 자체가 도전이었습니다.
주민이자 마을 역사가인 민태승 관장은 6.25 격전지였던 땅을 개간하는 과정이 주민들에겐 목숨을 건 일이었다고 회고합니다.
전쟁 때 묻었던 지뢰와 터지지 않은 불발탄이 큰 위협이었습니다.
[민태승/통일촌 마을박물관장 : "한 대여섯 사람 피해를 입었어요. 발목 나간 사람 있고 죽은 사람도 있고..."]
개간하면서 발견된 항아리들은 실향의 상징입니다.
포화를 피해 피난길에 오르면서도 돌아올 것에 대비해 쌀 등을 담은 것인데 대부분의 주인들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민태승/통일촌 마을박물관장 : "옛날에 여기 살던 사람이 피난 나가면서 땅속에 묻었던 걸 캐내서 여기다 진열 시킨 거예요. 그래서 주인이 누군지 지금 몰라요."]
1973년 마을이 완성됐을 때 초기의 집은 어떤 형태였을까요?
단층으로 본체와 부속 건물로 구성됐습니다.
[민태승/통일촌 마을박물관장 : "본채가 15평, 여기 부속사가 10평이에요. (다 똑같은 집이었어요?) 똑같았어요."]
세 개의 방에 마루가 있었던 집.
6가족과 함께 살았다는 민태승 관장에겐 소중한 보금자리였다고 합니다.
[민태승/통일촌 마을박물관장 : "이게 좋은 집이였어요. 그 당시만 해도 좋은 집이라고. 그때 별 불편 없이 살았어요. 여기서."]
이처럼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는 통일촌에는 현재 145가구, 450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입주 초기 통일촌 주민들은 도처에 묻힌 지뢰에도 불구하고 삶의 터전을 묵묵히 일궈 왔습니다.
그리고 지난 50년간 이곳 주민들은 분단의 갈등을 직접 피부로 느껴왔는데요.
하지만 통일촌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통일을 꿈꾸며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있습니다.
좁은 길을 따라 가다보면, 넓게 펼쳐진 경작지가 나타납니다.
주민들은 힘을 모아 황무지였던 땅을 개간했고, 현재는 콩과 벼농사 등을 짓고 있는데요.
특히 과거 통일촌이 속한 장단군의 이름을 딴 장단콩은 주민들의 자부심이 됐습니다.
[권영한/통일촌 주민 : "먹어보면 맛이 달라요. 확실히 여기 토질이 콩하고 토질이 맞는다고 여기가."]
맛과 풍미가 좋은 장단콩을 지역의 특산물로 육성하며 마을 분위기도 바뀌었다고 합니다.
[권영한/통일촌 주민 : "그때보다는 상당히 나아졌죠. (마을분위기도 달라졌어요?) 마을 분위기도 조금 여유가 있으니까 달라지죠."]
1세대 주민들이 협력해 마을의 명물을 만들었다면, 2세대들은 통일촌의 미래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면서 변화를 꾀했습니다.
허름했던 창고를 개조해 문을 연 커뮤니티센텁니다.
["(여기있는 사진들은 누가 찍은 건가요?) 주민들이 찍은 거에요.(여기는 위치가 어딘가요?) DMZ 안에, 마을 인근에서 찍은 겁니다."]
옛 동서독 접경지 마을과 결연을 맺어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고, 국제 학술교류의 장을 만들어 통일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겐 전초기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박세영/통일촌 마을연구소 소장 : "통일촌이 옛날에는 안보의 전략적인 마을로 세웠다면 이젠 통일과 화해의 마을로서의 전략적으로 필요하다."]
민통선 안에 있어 여전히 출입이 통제돼 외딴섬 같지만 그 현실을 딛고 일어서 통일촌을 중심으로한 실질적인 소통 공간을 조금씩 조금씩 넓혀간다는 계획입니다.
[박경호/통일촌 커뮤니티 센터장 :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 속에서의 아픔과 희노애락을 같이 한번 고민해볼 수 있는 과정으로서 (예행연습 같은 건가요.) 그렇죠. 어떻게 보면 통일 모델하우스."]
정전협정 70년의 역사에서 대외선전용 마을로 탄생한 통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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