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직후 출산'…보호받지 못했던 아기들 [세상을 바꾼 법정]㉓
친생부인 허가 청구제 신설…"사각지대 해소 위해 대상 확대해야"
[편집자주] 판결은 시대정신이다.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가치와 때론 나아 가야할 방향을 담고 있어서다. 우리 사회는 짧은 기간 압축적으로 성장하면서 여러 차례 격변기를 거쳤다. 이 때문에 1년 전에는 옳다고 믿었던 시대정신이 오늘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역사의 변곡점에서 과거와 정반대의 판결이 많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판례를 통해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짚어봤다.
(서울=뉴스1) 이장호 기자 = # 2005년 4월 최모씨는 유모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러나 둘의 언약은 평생을 가지 못했다. 둘의 사이는 멀어지기 시작했고, 결혼한 지 6년여 만인 2011년 12월 이혼에 합의했고 2012년 2월 이혼신고를 끝으로 남남이 됐다.
사실상 결혼이 파탄된 상태에서 최씨는 송모씨를 만나 동거했고 이혼 후 8개월 만인 2012년 10월 딸을 출산했다. 그런데 출생신고를 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아이의 성을 친부인 송씨의 성을 따라 출생신고를 하려고 했으나, 구청으로부터 전 남편의 성인 유씨로밖에 출생신고를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들었다.
혼인 관계가 끝난 날로부터 300일 이내에 출생한 자녀는 전 남편 친생자로 추정한다는 민법 조항 때문이었다. 출생신고를 하려면 딸 성을 유씨로 한 뒤 법원에 전남편을 상대로 친생부인의 소를 제기해 바로잡아야만 했다. 아이 성을 유씨로 할 수 없었던 최씨는 출생신고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
◇"이혼했는데 300일 안 넘어 출산했다고 전남편 아이?"
이 같은 민법 규정을 두게 된 이유는 바로 여성의 경우 출산이라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자식임을 확신할 수 있지만, 남성의 경우는 자신이 친부임을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재는 유전자 확인 등을 통해 쉽게 친부가 누구인지가 확인이 되지만, 과거 민법이 제정될 때에는 유전자 검사가 없었다. 따라서 혼인 및 혼인 전후로 해 출산한 아이를 남편 아이로 추정하는 '친생자 추정' 제도를 둔 것이다.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친생자 추정의 혼란을 막기 위해 여성에게만 이혼이나 사별 등 혼인 생활이 종료된 후 6개월 동안 재혼을 금지하는 기간을 두기도 했다. 이 민법 조항은 2005년 3월 삭제됐다.
그러나 이 같은 친생자 추정은 사실상 '간주'로 취급되는 강력한 법적 효력을 갖고 있다. 대법원은 혼인 기간 중일 때의 친생추정은 반증을 허용하지 않는 강한 추정이라고 판시한 바 있다. 친생자 추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친생부인 등 소송을 제기해야만 한다.
친생추정 소송은 전남편을 상대로 제기해야 하기 때문에 이혼한 전남편과 마주칠 일도 생길 수밖에 없었고, 아이 출생 사실도 전남편이 알게 될 뿐 아니라 전남편이 비협조적으로 나올 경우 아이의 출생신고가 계속 늦어져 아무런 공적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문제점이 있다.
이에 최씨는 "친생자 관계를 바로잡으려면 전남편을 상대로 친생부인의 소를 제기하는 등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그러면 어느 시기에 누구와 성관계를 했는지 밝혀야 하는데 이는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범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2013년 9월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최씨는 "친생자 추정 문제를 피하기 위해 일정 기간 사랑하는 사람과 혼인을 미룰 수밖에 없다면 이는 혼인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며 "혼인을 하더라도 일정 기간 임신을 회피하기 위해 성관계를 기피해야 한다면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헌재 "모의 인격권·기본권 침해" 헌법불합치 결정
최씨가 헌법소원을 제기한 지 약 1년 7개월이 지난 2015년 4월. 헌재는 해당 조항이 모가 가정생활과 신분 관계에서 누려야 할 인격권, 혼인과 가족생활에 관한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봐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오늘날 이혼 및 재혼이 크게 증가했고, 여성의 재혼금지기간이 2005년 민법개정으로 삭제됐으며, 이혼숙려기간 및 조정전치주의가 도입됨에 따라 혼인 파탄으로부터 법률상 이혼까지의 시간 간격이 크게 늘어나게 됐다"며 "이에 따라 여성이 전남편 아닌 생부의 자를 포태해 혼인 종료일로부터 300일 이내에 그 자를 출산할 가능성이 과거에 비해 크게 증가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런데 해당 조항에 따라 전남편 친생자가 아님이 명백하고 전남편이 친생추정을 원하지도 않고 생부가 자식을 인지하려는 경우에도 전남편 친생자로 추정돼 전남편 친생자로 등록되고 엄격한 친생부인의 소를 통해서만 번복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 결과 이혼한 모와 전남편이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데 부담이 되고, 자녀와 생부가 진실한 혈연관계를 회복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해당 조항을 위헌으로 선언할 경우에는 법적 보호의 공백이 생기기 때문에 헌법 불합치를 선고하면서도, 입법자의 개선입법이 있을 때까지는 해당 조항이 계속 적용되도록 했다.
◇친생부인 허가 청구제 도입…사각지대는 여전히
헌재의 헌법 불합치 선고 이후 국회는 제도 도입에 한창 미적거리다 2018년 2월이 돼서야 친생부인 허가 청구제도를 신설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소송 절차인 친생부인의 소 대신, 보다 간단한 허가 제도가 도입되면서 보다 빠르고 간단하게 현 남편의 아이로 출생신고를 할 수 있게 됐다.
사법연감에 따르면 친생부인 허가 청구제도 도입 이전인 2017년까지는 친생부인의 청구 등 기타 친자관계 소송 접수가 한 해 600~700여건 이뤄졌으나, 제도 도입 후인 2018년에는 435건, 2019년부터 2021년까지는 300건대를 기록했다.
친생부인 허가청구는 한해 약 400건에서 500건가량 접수되고 있다. 2021년까지 4년간 총 1794명의 아이들이 보다 간편하고 빠르게 가족관계를 바로잡고 출생신고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아직도 사각지대는 남아있다. 사실상 혼인이 파탄된 상태에서 이혼 소송이 진행되는 과정 중 다른 사람을 만나 아이가 태어나는 경우에는 친생부인허가 청구제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친생부인허가 청구제는 혼인 관계가 종료된 날부터 300일 이내에 출생한 자녀가 그 대상이다.
실제로 남편과 이혼 소송을 진행하면서 별거 중 만난 남성 사이에서 아이를 가져 출산을 한 여성이 이혼이 마무리되기 하루 전 아이가 태어나는 바람에 출생신고를 하지 못하는 사례도 있었다. 고작 하루 차이 때문에 아이의 운명이 달라지게 된 것이다.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대표인 오영나 대한법무사협회 부협회장은 "사실상 혼인 관계가 파탄이 된 경우 혼인 관계가 청산이 완전히 이뤄지지 않았더라도 아이의 복리를 위해 친생추정의 예외를 인정하는 입법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ho86@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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