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굽이 별천지] ⑨ 구름 쉬는 대관령 너머 안반데기에 숨은 사연

양지웅 2023. 7. 29.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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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표 고갯길…최근 여름철 차박·자전거 업힐 성지로 거듭나
개척민 애환 서린 배추밭…은하수 촬영 명소이자 힐링 관광 마을 변모

[※ 편집자 주 = 낯섦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의 발걸음은 길을 만들고, 그 길은 다시 사람을 모아 마을을 만듭니다. 강원도의 산과 강, 바다와 호수를 따라 굽이치는 길 끝에는 반짝이는 주민들의 삶이 모여 있습니다. 북적이던 발걸음은 지역소멸이라는 화두와 함께 잦아들고 있지만, 마을은 그 생생함을 되찾고자 새로운 사연들을 만들어갑니다. 길과 마을에 깃든 27개의 이야기를 연합뉴스가 1년 동안 격주로 소개합니다.]

구름도 잠시 쉬어가는 대관령 [촬영 양지웅]

(평창·강릉=연합뉴스) 양지웅 기자 = '대관령'(大關嶺), 높이 832m로 평창과 강릉을 잇는 이 길은 대한민국 대표 고갯길이자 강원도를 영동과 영서로 양분하는 분수령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영동에서 영서로 갈 때 오르내리던 길이지만 백두대간의 허리를 관통하는 고속도로가 뚫린 뒤로는 여름철 무더위를 피하는 캠핑 명소와 자전거 업힐(오르막 오르기) 성지로 거듭났다.

대관령을 넘어 강릉 왕산면을 향해 굽잇길을 오르다 보면 해발 1천100m 산 능선에 약 200만㎡ 규모의 드넓은 배추밭이 펼쳐진다. 이곳이 국내 대표 고랭지 채소밭인 '안반데기'다.

드넓은 능선이 이토록 넓은 배추밭으로 변한 모습 뒤에는 개척민들의 애환과 땀방울이 숨어 있다.

대관령 비석 [촬영 양지웅]

울고 넘던 아흔아홉 굽이 대관령…구름도 쉬었다 가는 길

'白雲飛下暮山靑'(백운비하모산청·흰 구름 아래 저녁 산이 푸르구나)

신사임당이 과거 늙은 어머니를 두고 시집가던 길에 대관령을 넘으며 눈물로 썼을 시의 한 구절이다.

이른 아침 차를 타고 대관령을 오르니 정말로 구름이 길을 넘다 힘이 들었는지 고개 정상께 머물러 있었다.

대관령은 예로부터 울고 넘는다는 말이 있었다.

강원도 외딴 산골로 부임한 관리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넘었고, 임기를 마치면 강릉 사람들의 인정에 떠나기 서운해 다시 눈물을 흘리며 넘었기에 그랬으리라.

사실 대관령은 이름값에 비해 그리 높은 고개는 아니다.

태백과 정선 경계에 있는 만항재(1천330m), 두문동재(1천275m)가 도내에서 가장 높으며 홍천과 평창을 연결하는 운두령(1천89m)이나 홍천과 양양을 잇는 구룡령(1천13m) 역시 1천m가 넘는다.

상고대 활짝 핀 대관령 [연합뉴스 자료사진]

하지만 과거 세상과 강릉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로서 고개를 넘는 사람과 물동량이 많았고 길도 길었기에 오가는 이들의 머릿속에 높고 큰 고개로 각인됐다.

구름은 쉬었다 넘고 사람은 울며 넘는다는 대관령은 서울∼양양 고속도로가 개통하면서 오가는 차량이 많이 줄었지만, 그 인기는 전혀 줄지 않았다.

여름철이면 대관령 정상의 휴게소는 유명 피서지로 변모한다.

특히 열대야가 1주일째 이어지는 요즘은 대관령 휴게소 광장이 열대야를 피해 온 피서객들이 타고 캠핑카와 텐트로 북적인다.

낮에도 20여 대의 캠핑카가 머무르며 시원한 백두대간 바람에 무더위를 식힌다.

20분 거리의 강릉 도심과 기온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보인다.

열대야 피해 왔어요 [연합뉴스 자료사진]

또 대관령은 자전거 동호인들로부터 업힐 성지로 정평이 나 있다.

포털 사이트에 '대관령 업힐'을 검색하면 많은 자전거 동호인이 자신들의 고생길을 인증한 게시물이 줄 잇는다.

강원도와 강릉시는 영동대학교를 출발해 대관령 휴게소까지 18㎞ 구간을 오르는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속초에 사는 조모(41)씨는 "자전거 동호인 사이에선 '태백산맥을 넘어봐야 진정한 자전거인'이라는 얘기가 있다"며 "최근 대관령 정상까지 58분 만에 올라갔는데 정신력 승부인 동시에 자신과의 싸움이었다"고 말했다.

구름도 잠시 쉬어가는 안반데기 [연합뉴스 자료사진]

'하늘 아래 첫 배추밭' 안반데기…개척인 애환 서린 땅

평창에서 출발해 대관령을 넘어 강릉 왕산면으로 향하다 보면 해발 1천100m 태백산맥 험준한 산 능선의 드넓은 배추밭이 나타난다.

이곳은 국내 대표 고랭지 채소 재배지인 안반데기로 그야말로 '산이 배추밭이고, 배추밭이 곧 산이다'.

안반데기라는 이름은 떡메로 반죽을 내리칠 때 쓰는 오목하고 넓은 통나무 받침판 '안반'에 평평한 땅을 뜻하는 우리 말인 '덕'을 붙이고, 여기에 영화 웰컴 투 동막골로 친숙해진 강릉 사투리가 더해져 만들어졌다.

안반데기는 고루포기산(1천238m)과 옥녀봉(1천146m)을 잇는 능선에 있다.

푸르름 더하는 안반데기 [촬영 양지웅]

안반데기의 행정지명인 대기리는 큰 터가 자리하고 있어 '한터', '큰터', '대기'라 불렸다고 한다.

안반데기를 처음 본 사람들은 대부분 '이 높은 산에 왜 갑자기 배추밭이 생겼을까'라는 생각을 품게 된다.

이곳은 1960년대 화전민들이 산을 깎아 개간하고 정착하며 형성됐다.

이들은 수십m 아래로 굴러떨어질 수도 있는 가파른 비탈에서 곡괭이와 삽, 소를 이용해 밭을 일궈 냈다.

1995년에는 대를 이어 밭을 갈아 낸 28가구 안반데기 주민들이 땅을 정식으로 매입하면서 실질적인 소유주가 됐다.

척박했던 땅은 축구장보다 280배나 큰 200만㎡에 이르는 풍요로운 밭이 됐다.

안반데기 배추는 최고등급으로 인정받으며 국내 배추 시장의 30% 이상을 차지해 밥상 물가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과거 안반데기 개척 모습 [강릉시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주민들은 매년 5월 마을을 수호하는 성황지신과 척박한 땅에서 풍요로운 수확을 염원하는 토지지신, 마을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안반데기만의 지신인 여력지신에게 성황제를 올린다.

이제 안반데기는 농업뿐 아니라 자연이 품고 있는 고유의 관광자원을 이용해 관광객 발걸음을 끌어모으고 있다.

강릉시는 고랭지 배추 기반 시설과 차별화된 농촌 체험 관광을 연계한 사업을 추진, 묵은지 김치 토굴 저장시설을 구축해 관광객들이 배추 담그기를 체험할 수 있게 했다.

또 화전민의 고단한 삶과 애환이 담긴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안반데기 사료전시관을 짓고 화전민이 생활하던 귀틀집을 복원한 운유촌을 만들었으며 노추산 모정탑으로 향하는 트래킹 구간을 개발하고 산채·야생화 단지도 조성했다.

안반데기 배추 출하 한창 [연합뉴스 자료사진]

무엇보다 방문객 발걸음을 끌어들이는 것은 별 보기 관광이다.

안반데기는 주변 광해가 없고 공기가 깨끗해 구름 없는 밤이면 많은 별을 볼 수 있다.

특히 무더운 여름밤 시원한 고랭지에서 쏟아지는 은하수를 촬영하기 위해 수많은 사진 동호인이 전국에서 안반데기로 모여든다.

이런 장점 덕분에 강릉시는 올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한 2023년 야간관광 특화도시 공모사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다만 별 보기 관광을 위해 안반데기를 방문했다면 주의할 점이 있다.

더 나은 카메라 앵글 욕심에 마음대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배추밭을 상하게 하기 쉬우니 늘 이동에 신경 써야 한다.

yangd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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