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커피 맛있어요. 드릴까요?”…다낭 풍경보며 달리는 미식열차 [ESC]
다낭에서 꾸이년까지 6시간
앞바다 해산물 등 좋은 식재료
타르트, 디저트 와인에 마사지도
도착 후 끼꼬비치에서 ‘인생샷’
기차는 가장 보편적인 교통수단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단언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열차 추억’ 하나쯤은 누구에게나 있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 ‘리스본행 야간열차’, ‘오리엔트 특급살인’ 등 열차가 배경인 영화가 괜스레 나온 게 아니다. 그만큼 우리 삶과 밀접하게 연결돼, 추억을 소환하는 장치가 된 것이다. 여기에 ‘미식’을 접목하면 좀 더 색다른 경험의 장이 된다.
지난 4월께 베트남 미식열차‘비에타주’(비엣티지)가 운행을 재개했다. 2020년 첫 시동을 걸고 출발했던 베트남 최초 ‘고급 미식 관광열차’는 코로나19 사태로 운행을 잠시 중단했었다. 하지만 팬데믹이 차츰 진정되자 끊임없이 새로운 여행 콘텐츠 유행을 추구하는 베트남 여행업계에 다시 등장했다. 지난 5월 출발지인 베트남 중부 도시 다낭에서 비에타주에 탑승했다. 내친김에 남쪽으로 6시간 달리면 도착하는 종착지 꾸이년(퀴논)여행도 했다.
12개 차량 중 두량이 미식열차
지난 5월5일 오전 7시30분(이하 현지시각). 다낭역에 도착했다. 비에타주는 오전 8시5분에 출발 예정이었다. 승무원이 중국풍의 커다란 의자가 놓인 방으로 안내했다. 탑승 전까지 머무는 방인데, 1천년 넘게 중국의 영향권에 있었던 베트남 역사의 한 단면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가 환영 인사와 함께 샴페인 한잔을 건넸다. 일반 객차까지 합쳐 총 12개 차량 중 두량이 비에타주다. 두량 중 하나는 고급 화장실과 마사지룸, 칵테일 바로 구성돼 있다. 나머지는 승객용 좌석이다. ‘고급’이라고 해서 금줄이라도 달렸나 싶었는데, 외관은 의외로 우리네 평범한 열차와 다를 바 없었다.
이윽고 탑승.
뜻밖에 승객용 객차의 이국적인 인테리어에 시선을 빼앗긴다. 가운데 뻗은 복도 양옆으로 3개의 작은 룸이 있는데, 칸막이가 인도차이나의 주요 건축 자재로 꼽히는 라탄으로 만들어져 있다. 고급스럽다. 룸은 2인석으로 구비돼 있다. 그러니까, 비에타주는 한번에 총 12명까지만 이용할 수 있다.
덜컹, 츠르르, 덜컹. 열차가 출발하자 창밖 풍경은 베트남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폄하하지도 미화하지도 않은 채 다큐처럼 그려내고 있었다. 콘지(중국식 죽)로 아침 식사 하는 가족이 휙 지나가더니 지붕 손질을 위해 자재를 말리는 남자가 보였다. 베트남에서는 고층 집을 찾아보기 어렵다. 지붕의 경사도 급한데, 잦은 태풍 때문이다. 세찬 바람에 대처하기 위해서다. 가파른 지붕은 물이 고일 틈을 주지 않는다. 오토바이 뒷좌석에 여자 친구를 태우고 가는 남자의 위풍당당한 출근길 모습에 매료된다. 창밖은 영화의 한 시퀀스다.
승무원이 와서 말을 붙인다. “베트남 커피 맛있어요. 드릴까요?” 마치 1막이 끝난 것처럼 말했다. 중부 고원지대 닥락의 도시 부온마투옷을 ‘커피의 도시’라 명명할 정도로 베트남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원두 산지다. 생산과 수출 모두 세계 2위다. 고급 품종 아라비카종보다 로부스타종의 생산량이 월등히 많은 점이 특징이다. 베트남에 커피나무가 들어온 때는 1857년으로 알려져 있다. 19세기 말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면서 커피가 간판 얼굴인 카페 문화가 뿌리내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카페스어다’(Ca Phe Sua Da)를 주문했다. ‘카페’는 커피, ‘스어’는 연유, ‘다’는 얼음을 뜻한다. 우리네 ‘아이스 커피믹스’를 연상하면 된다. 비슷한 맛이다. 연유가 들어가 달면서도 차갑고 쌉싸름한 이 커피는 우리도 ‘애정’하는 이가 많다. 베트남 커피에 빠져들면 ‘스페셜티 커피’(미국 스페셜티커피협회가 품질 평가해 고득점을 받은 원두)만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커피 음용 문화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열차가 도시를 빠져나오자, 창밖은 온통 초록색으로 물든 들판이다. 나무나 목초로 지은 농촌집들이 눈에 띈다. 주로 빵나무, 대나무 등이 재료라고 한다. 이들 나무를 3년간 물에 담갔다가 꺼내 6개월간 말린 후 건축 자재로 쓰면 50~70년은 거뜬히 유지된다고 한다. 야자나무, 대나무, 사탕수수 등의 잎이 주로 지붕 덮개용 재료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프랑스 지리학자 피에르 구루는 베트남을 ‘식물 문화권’이라고 했다고 한다. 물론 프랑스식 건축양식이 식민지 시대에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이런 평은 무색해졌지만 말이다.
쪽빛, 핏빛 칵테일
오후 12시를 넘어가자 배꼽시계가 요란하게 울렸다. 미식 열차답게 메뉴는 질 좋은 식재료로 구성돼 있었다. 꾸이년 바다에서 잡히는 해산물과 그린파파야, 당근 등을 피시소스로 무친 샐러드가 등장했다. 뭉클뭉클하게 부드러운 새우 살과 씹을 때마다 오독오독 소리가 나는 채소들은 시큼한 피시소스로 하나 되어 여행객의 혀를 단숨에 장악한다.
이어 베트남 전통식이 나왔다. 강황을 섞어 만든 노란색 밥과 파파야 등을 피시소스로 버무린 샐러드, 보드랍게 익힌 닭고기가 한 접시에 올라가 있었다. 창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밥 위에 고명처럼 살포시 앉았다. 한 숟가락씩 떠먹을 때마다 노란색 태양이 제짝을 만난 것처럼 방정을 떨며 몸속 깊숙이 들어왔다. 보리리소토는 채식주의자를 위한 메뉴다. 톡톡 터지는 듯한 보리밥 알갱이가 일품이다. 승무원의 디저트 설명이 이어졌다. “패션프루트로 만든 타르트는 달고 맛있습니다. 디저트 와인과 마시면 더욱 좋지요.”
문득 와인이 아닌 다른 술로 매칭하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칵테일 바로 갔다. 바텐더는 기구를 흔들며 술을 만들기에 바빴다. 쪽빛 바다를 열차에 끌고 들어온 듯한 칵테일도 있고, 호러 영화 핏빛을 담은 듯한 빨간 술도 있었다. 바텐더를 더 수고스럽게 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이조차 이곳에서만 가능한 경험이다. 바사삭. 부서진 타르트와 단 과즙이 입안에 들어오자마자 주문한 붉은 색 칵테일을 마셨다. 승무원이 물었다. “맛은 어떠신가요?” 진한 타르트의 맛이 강한 칵테일 맛을 만났다.외계의 맛이다.
나른한 오후 햇살이 열차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승무원이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그 방엔 희한한 모양의 의자가 있었다. 고해성사하는 죄인처럼 무릎을 꿇어야 했다. 머리는 의자의 앞쪽 둥근 원 모양의 받침대에 올려야 했다. 자세가 갖춰지자 마사지 전문 여성 승무원이 왔다. 그의 날렵한 손이 딱딱해진 어깨를 눌렀다. 열차에서의 마사지는 희한한 경험이다. “아! 아!” 뼈들이 울었다. 30여분 흘렀을까. 승무원이 “끝!” 이라고 말했다. 고개를 들자 창밖 풍경은 또 달라져 있었다. 2~3칸짜리 책장 정도 높이의 석조물 여러 개가 휙휙 지나갔다. 승무원에게 급하게 물었다. “공동묘지랍니다.” 문득 책에서 읽은 베트남 매장 문화가 생각났다. 베트남 사람들은 조상을 매장한 뒤 3년이 지나면 이장한다. 이장할 때 관을 열어 시신의 상태를 보고 뼈끼리 붙어 있으면 ‘좋은 일’이라며 관 뚜껑을 다시 덮는다.
오후 2시15분께. 꾸이년 디에우찌역에 도착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와인 열차, 일본 도시락 열차 등 이름난 세계 열차 여행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 그 기적 소리가 우렁차다. 편도 요금은 350~400달러(약 45만원). 다낭에서 꾸이년까지 하루 한번 왕복 운행한다. 비에타주의 출발지인 다낭은 한국인들에게는 익숙한 유명 베트남 여행지지만 도착지인 꾸이년은 생소하다. 꾸이년은 빈딩성의 성도로, 인구가 약 43만명(2018년 기준)인 작은 도시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신의 도시’라고 불릴 정도로 조용하다.
우리와의 인연은 두가지. 베트남전쟁 당시 육군 수도사단(맹호부대)이 1965년부터 1973년 3월까지 주둔했던 곳이다. 서울 용산구와 27년째 친선을 맺고 있는 도시기도 하다. 용산의 ‘퀴논거리’가 바로 이런 이유에서 생겨났다. ‘퀴논’은 꾸이년의 영문식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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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랄드빛 바다 ‘베트남의 몰디브’
지난 5월6일 이른 아침에 만난 꾸이년은 유명 관광지가 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해변을 중심으로 고급 리조트 공사가 한창이고, 도심은 차분하게 정비 작업 중이었다.
고급 리조트 ‘아난타라 퀴논 빌라’의 케이트 존스 마케팅 앤 피알 매니저는 “요즘 세계적인 여행 트렌드는 ‘새로운 것을 보는 것’보다 한곳에 머물며 힐링하며 쉬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추세에 비춰보면 꾸이년은 휴양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춘, 그래서 성공 가능성이 큰 여행지”라고 진단했다. 더구나 꾸이년에는 독특한 볼거리도 있다.
이날 꾸이년 도심에서 차로 40여분 달린 뒤 생경한 건축물 앞에 도착했다. 황량한 너른 벌판에 거대한 탑 3개가 불쑥 튀어나왔다. 무려 32~39m에 달하는 높이에 압도당했다. 아래쪽에 네모 모양으로 뚫린 구멍으로 들어가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푸드득 푸드득. 이방인의 발걸음에 놀란 박쥐가 날아올랐기 때문이다. 여행객을 향해 욕지거리하는 듯 울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고고학자 존스 박사가 찾는 유적지가 이런 모습이 아닐까. 탑은 바람과 햇볕을 등에 업고 신비로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꼭대기에는 외계 식물 같은 게 자라고 있었다. 실제 이 탑은 베트남 고대 국가 참파 왕국의 흔적들이다.
2~5세기 베트남 중부지역은 참족이 세운 참파 왕국이 지배했다. 나트랑 등에도 내부에 여신 포나갈을 모신 참파 왕국의 탑이 남아 있지만, 한때 수도였던 꾸이년에 가장 많은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도심 안에도 쌍둥이처럼 두개의 탑이 있다. 중국, 프랑스, 미국 등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베트남 유적지 대부분이 파괴되었지만, 참파 왕국의 탑만은 용케 살아남았다.
꾸이년의 숨은 보석 애오지오와 끼꼬비치도 빼놓을 수 없는 여행지다. 애오지오에 가면 바위산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는데, 시선을 돌리면 출렁이는 바다가 보인다. 끼꼬비치는 에메랄드빛 바다색 때문에 ‘베트남의 몰디브’로 불린다. 년리섬에 있기에 20여분 보트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도심에서 차를 이용해도 된다. 약 40분에서 1시간 걸린다.
지난 5월7일 도착한 끼꼬비치. 패러글라이딩에 몸을 싣는 이들이 쪽빛 바다를 등지고 서 있었다. 모래사장에서 바다로 이어진 나무다리에는 ‘인생샷’을 남기기 위해 연신 셔터를 누르는 이들로 북적였다. 다리에 있는 별이나 하트 모양의 조형물이 여행객을 맞는다.
짙은 푸른 하늘과 그보다 더 파란 바다가 맞붙은 끼꼬비치의 대낮, 바람이 어디선가 여행객을 잡아끈다. ‘꾸이년 여행의 쓸모’를 찾아보라고 말이다.
※참고 도서 ‘베트남 베트남 사람들’, ‘베트남 역사문화기행’
다낭·꾸이년/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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