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필은 아니어도 악필은 피하고픈, 요즘 시대 손글씨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감성으로 위안 찾는 손글씨
연필을 대신해 키보드 자판으로 필기를 한다는 것도 과거 시제가 됐다. 음성파일만 있으면 그 속의 대화를 문자로 변환해 주는 프로그램까지 등장했으니 말이다. 사각사각 연필 소리보다 효과음이 더해진 터치가 더 익숙해진 시대, 손글씨가 귀해지고 있다.
지렁이 한 마리가 꿈틀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에서 2학년 담임을 맡은 정수인 선생님은 ‘아이들의 손글씨’와 관련된 질문에 “요즘 선생님들은 판서보다 판독을 더 많이 하는 것 같다는 농담을 하곤 한다. 일기나 독서록 같은 숙제를 확인하다 보면 암호나 상형문자 같은 글씨와 대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며 웃었다.
‘알파세대’로 지칭되는 현재의 초등학생들은 연필보다 스마트 기기를 먼저 접한 세대다. 학교에서도 디지털 교과서를 보고 스마트 기기로 학습 결과물을 제작하는 시간이 많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과거와 다르게 필통 속 연필이 뭉툭해질 틈이 없다. 연필 잡는 법을 정확히 모르거나 손에 적당한 힘을 주고 글을 쓰는 시간을 어려워하는 아이들도 다수다.
유튜브 ‘어디든 학교’의 운영자이자 초등 교사인 <초등 바른 글씨 트레이닝 북>의 저자 하유정 선생님은 “글씨 연습을 시작하면 여기저기서 한숨이 새어 나온다. 글쓰기를 지겨운 노동으로 여기는 것”이라며 “고학년도 마찬가지다. 교정의 경험이 없다 보니 필순을 틀리는 아이들도 자주 눈에 띈다”고 교실 풍경을 전했다.
문제는 손글씨를 쓰는 시간이 줄어들었다고 그 영향력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생일 카드에 축하 인사를 쓰거나 축의금 봉투에 이름을 적는 것부터 대입 논술고사와 국가고시, 공공기관 서류 작성까지 우리 사회 곳곳에는 손글씨가 필요한 영역이 존재한다. 정치인의 방명록, 연예인 및 유명인이 종종 쓰는 손편지도 빼놓을 수 없는 손글씨의 영역이다.
‘발등의 불’을 꺼야 하는 이들은 사설 학원을 찾아 도움을 받기도 한다. 서울 강남의 한 ‘악필 교정’ 학원에서 만난 박정진씨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그는 “평소 지렁이 같은 글씨체가 콤플렉스였다. 글씨를 잘 쓴다고 가산점을 받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알아보지 못하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수업을 듣게 됐다”고 말했다.
글씨를 쓴다는 것은
디지털 시대에도 글은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이자 중요한 소통 방법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상대방이 알아보기 어려운 글씨라면 그 가치와 의미가 사라진다.
과거 글씨체는 그 사람의 인격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글씨체가 정갈하거나 바르지 못하면 내면도 흐트러져 있는 것이라 여기는 분위기가 우세했다. “바른 글씨를 쓰기 위해서는 바른 자세와 마음가짐이 필수”라고 강조하는 다수의 악필 교정 전문가들의 조언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대목이다.
현대의 다양한 연구 결과 역시 손글씨의 중요성을 증명한다. 학습적인 면이 대표적이다. 노르웨이 과학기술대학 심리학과의 발달신경과학연구소 연구팀이 발표한 ‘학습 시 필기의 중요성에 대한 고밀도 뇌파 연구 결과’에 따르면 손으로 직접 필기를 하거나 그림을 그릴 때 두뇌 활동이 더 활발했다. 손을 사용하는 글쓰기는 미세한 손동작을 통해 제공되는 시각, 운동 명령 및 운동 감각 피드백 등이 동반돼 동일 행동을 반복하는 키보드 타이핑보다 더 많은 두뇌 자극을 준다는 것이다.
손글씨는 언어 능력 또한 향상하게 한다. 미국 워싱턴대학의 버지니아 버닝거 박사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프린트하기, 영어 필기체 쓰기, 타이핑하기의 실험을 했다. 그 결과 손글씨를 쓰는 아이들은 그러지 않는 아이들보다 끊임없이 더 많은 단어를 더 빠른 속도로 떠올리고 더 많은 생각을 표현했다.
‘멍’ 때리고 보게 되는 손글씨
정서적인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필기가 주는 차분함과 안정감이 우울증과 같은 심리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최근에는 아날로그 감성 열풍과 함께 타인의 손글씨를 보며 위안을 얻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유튜버 ‘나인’은 반듯반듯한 글씨체로 구독자 30만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대표 콘텐츠인 ‘10만명 홀린 믿을 수 없는 글씨체’는 1543만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해당 영상에는 “내 글씨는 볼수록 불편한데 이분 글씨는 너무나 예쁘고 편안하다”는 칭찬과 댓글이 이어진다. 그가 써 내려가는 문구는 특별한 내용이 아니다. 인기 영화나 드라마의 명대사, 시 구절, K팝 가수의 가사 등이 전부다. 그는 소박한 꿈이 있다. 한글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것이다. 현재 그는 ‘악필 교정’ ‘받침 글자 쓰는 꿀팁’ 등을 소개하며 손글씨 매력을 공유하고 있다.
‘나인’이 반듯함과 세련됨으로 힐링을 준다면 유튜브 ‘예쁜 글씨’는 ‘나도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선사한다. 글씨 교정 지도사인 이규택씨가 40년 경력의 내공을 바탕으로 운영하는 강좌 채널로, ‘악필 탈출’을 꿈꾸는 18만명이 구독 중이다. 이 채널에서는 ‘카드 결제 시 간단하게 멋진 사인 하는 법’ ‘시험 볼 때 손 아프지 않게 글씨 잘 쓰는 법’ 등 일상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기술을 익힐 수 있다. 1990년대 수업을 듣는 듯한 편집이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한다.
컴퓨터로 인쇄한 듯 완벽한 손글씨로 소셜미디어에서 화제가 된 ‘미꽃체’도 있다. 산후우울증을 겪던 평범한 주부, 최현미씨가 만들어낸 서체다. 우연히 ‘글씨 쓰는 영상’을 보게 된 그는 직접 글씨를 쓰면서 마음이 차분해지고 치유되는 경험을 한 뒤로 6년간 여러 책자에 적힌 정자체와 흘림체를 따라 쓰기를 반복했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동글동글한 서체를 완성했다. 호불호가 나뉘지 않는 글씨에 그의 온라인 강연 누적 수강생만 3만명에 이른다.
최씨는 “타고난 악필은 없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글 쓰는 방법을 배웠지, 예쁘게 쓰는 법을 배워본 적이 없는 것 같다”면서 “선만 반듯해도 정갈한 글씨를 쓸 수 있다. 펜과 종이만 있으면 되는 취미생활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보다 더 적극적으로 글쓰기 배움에 나선 이들도 있다. 온라인 클래스 구독 플랫폼 ‘클래스101’에 따르면 2023년 6월 기준 손글씨 관련 클래스 구독자들의 수강 시간은 2022년 12월 대비 34% 증가했다.
이와 같은 손글씨 붐은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손글씨 강사인 정모현씨는 “수강생 후기를 둘러보면, 천천히 글을 쓰는 동안 사색의 여유를 가질 수 있고 좋은 문장을 보며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어 만족도가 높은 편”이라며 “끄적임은 인류와 함께 시작됐다. 기복은 있겠지만 무언가를 쓰고자 하는 욕망은 꾸준히 지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3일 마감한 ‘교보 손글씨대회’에는 1만4700여명이 응모했다. 역대 최고 수치이다. 특히 아동·청소년 부문의 응모자가 전년 대비 80% 이상 증가했다. 교보문고 측은 “교육적인 의미에 공감한 학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역대 최다 응모의 주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세 살 글씨, 여든까지 간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지만 글씨 습관은 언제든 바꿀 수 있다. 변호사인 본업보다 ‘국내 1호 필적학자’로 더 유명한 구본진 법무법인 로플렉스 대표는 자신의 저서 <필체를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에서 “필적은 ‘뇌의 흔적’이자 ‘몸짓의 결정체’이므로 심리학적으로 분석하여 그 원인을 알게 되면 행동 습관인 필체를 바꾸어 성격을 바꿀 수도 있게 된다”며 “의식적으로 글씨체를 바꾸면 성격이 변하고 성격이 바뀌면 행동 패턴이 변하며 행동 패턴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고 말한다.
명필이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연필을 제대로 잡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참바른글씨’에 따르면 연필은 엄지와 검지로 연필심에서 2~2.5㎝ 떨어진 곳을 가볍게 쥔다. 중지의 첫 번째 마디로 연필 아랫부분을 받치고 달걀을 쥔 듯 공간을 유지하고 종이와 연필심은 60도 각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이때 엄지가 검지보다 밑에 있으면 검지에 힘을 너무 많이 주게 돼 V자 모양으로 손가락이 꺾여 중간중간 연필을 다시 잡는 습관이 생겨 글쓰기가 급해질 수 있다.
‘악필’의 원인을 파악하면 교정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점점 작아지는 글씨는 연필을 잡은 검지가 손바닥 안쪽으로 끌어 당겨질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필체다. 이땐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모아 손가락의 힘을 균등하게 주도록 한다. 또한 들쭉날쭉한 크기의 글씨는 손가락에 동일한 힘을 주지 않아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자음을 쓸 때 검지에 힘을 주고 모음이나 받침을 쓸 때 엄지에 힘을 주면서 글자의 크기가 균일함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기본을 익혔다면 실전, 즉 반복이다. 전문가들은 “무작정 따라 쓰기보다는 방법을 익힌 뒤 꾸준히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다양한 손글씨를 보고 자신의 취향에 맞는 글씨체를 골라 특징을 파악한 뒤 반복해 익혀보는 것도 방법이다. 유성영 악필 교정 마스터는 “현대인들은 자판을 칠 땐 어느 위치에 어떤 글자가 있는지 일일이 확인하지 않는다. 손에 익었기 때문이다. 손글씨도 마찬가지다. 방법을 뇌가 기억하게 하고 습관처럼 쓰게 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김지윤 기자 ju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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