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사 제치고 달려가는 서포터즈… 그들이 축구에 미친 이유는
축구에만 있는 자발적 응원 문화 정착
홈경기 무조건 직관, 원정 땐 버스 대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골대 뒤를 지켰죠"
강등·승격… 팀 희로애락, 우리 인생 같아
연 100만~200만 원 지출… '가성비 취미'
"선수와 교감·일상 스트레스 해소가 매력"
"더 빨리, 제발 제발 믿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22일 저녁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빨간 비옷을 입은 유지훈(29·FC서울 서포터즈)씨가 연신 두 손 모아 기도하듯 읊조렸다. 우산을 쓰거나 머플러를 두르는 등 비를 피하는 방법은 다양했지만, 그라운드를 바라보는 표정은 모두 유씨처럼 간절했다. 하지만 이번 공격도 실패했다. 그러자 관중석에선 동시에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쉬워할 시간도 아까웠다. 유씨는 비가 오든 말든 개의치 않고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다.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경기장 밖에 있었지만 공의 움직임에 반응하며 선수들과 함께 호흡했다. 이들은 축구장의 12번째 선수, 서포터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경기장 찾아
2023년은 프로축구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해다. K리그 전반기 동안 평균 유료 관중이 처음으로 1만 명을 넘었다. 공식 집계를 시작한 2018년에는 5,384명에 불과했지만, 올해는 2배에 가까운 1만328명이 티켓을 구입해 경기장을 찾은 것이다. 22일에도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선 1만8,150명의 관중이 비를 맞으며 축구를 즐겼다.
올해 들어 K리그가 인기몰이를 하고 있지만, 리그의 흥망성쇠와 관련 없이 늘 축구장을 찾았던 이들이 있다. 유지훈씨 같은 각 구단의 서포터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빠짐없이 경기장을 지켰다. 대전하나시티즌 서포터즈 김동욱(46)씨는 "관중이 1만 명이든 700명이 안 되든 우리는 항상 골대 뒤를 지켰다"고 말했고, 수원FC 서포터즈 곽재일(28)씨는 "승부조작 여파에 따른 암흑기 때도 경기장에 나왔다"고 자랑스러워했다. 평범한 직장인이나 학생인 이들이 축구에 미친 이유는 무엇일까.
인생 1순위가 축구인 K리그 서포터즈
서포터즈는 다른 프로 스포츠에선 찾아볼 수 없는 열성 팬이다. 이들에겐 축구가 일상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홈경기는 무조건 직관하고, 버스를 대절해 원정 경기를 보러 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경기장에 들어가면 90분 내내 일어서서 응원하고, 북소리에 맞춰 쉬지 않고 구호를 외친다. 주로 골대 뒷좌석이 서포터즈가 모여 있는 공간이다.
서포터즈에겐 개인적인 스케줄보다 K리그 일정이 우선이다. 김동욱씨는 "시즌 전에 내년 경기 일정이 나오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서 내 스케줄을 짠다"고 전했다. 전북현대모터스 서포터즈 김현이(42)씨도 "호적에서 파일 정도의 집안 행사가 아니라면 홈이든 원정이든 찾아간다"며 "우리 팀이 경기하는데 내가 축구장에 없는 모습은 상상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서포터즈는 연고지에 대한 애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현장감을 가장 중시한다. 김동욱씨는 "공주 출신이라 1997년 창단 때부터 대전을 계속 응원하게 됐다"고 했다. 유지훈씨 역시 "처음엔 박지성 선수의 영향으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를 봤는데, 2010년 어린이날에 서울 경기를 처음 축구장에서 본 뒤부터 열기에 매료돼 서포터즈가 됐다"고 설명했다.
서포터즈 활동을 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얼마나 될까. 개인마다 편차는 있지만 1년에 100만~200만 원 정도. 김현이씨는 "시즌권과 유니폼 구입으로 50만 원, 원정 비용이 60만 원, 여기에 해외 원정까지 가게 되면 1년에 150만~200만 원 정도 든다"며 "축구 말고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가성비 있는 취미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삶의 원동력, 희로애락, 선수와의 교감
서포터즈가 축구에 열광하는 이유에 대해 들어봤다. 축구 경기와 응원하는 팀의 역사가 인생의 희로애락과 비슷한 게 매력이라는 대답이 많았다. 유지훈씨는 "축구팀과 함께 성장하는 느낌이 좋았다. 인생에도 굴곡이 있지 않나. 응원도 비슷하다"고 언급했다. 김동욱씨는 "서포터즈가 되면 강등과 승격, 플레이오프 진출 등 팀의 희로애락을 모두 경험할 수 있다"며 "내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니 우리 팀이 정말 잘했으면 좋겠고, 경기력이 안 좋으면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쳇바퀴 도는 일상에서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얘기도 있었다. 김현이씨는 "축구가 없었으면 인생이 너무 재미없었을 것"이라며 "경기 전에는 설레고, 경기에서 이기면 행복한 기분으로 일주일을 살 수 있다"고 말했다. 대구FC 서포터즈 이연진(23)씨도 "축구 때문에 스트레스를 덜었다"고 했다.
현장에서 선수와 직접 교감하는 것도 큰 매력이다. 곽재일씨는 "언젠가 우리 팀 선수가 '서포터즈 응원 소리를 들으면 정말 힘들어도 한 발 더 뛸 수 있다'고 말해 감동한 적이 있다"고 회상했다. FC서울 서포터즈 김주영(27)씨는 "우리가 진짜 12번째 선수라고 생각한다. 우리 목소리가 경기 흐름을 바꿔 놓을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강조했다.
전북현대모터스 골수 팬인 박재현(62)씨는 현재 활동 중인 소모임 안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 그는 "죽을 때까지 축구를 보러 가겠다"며 "지팡이를 짚고 가는 한이 있어도 골대 뒤에 서서 우리 팀의 승리를 외칠 것"이라고 말했다.
서포터즈가 보는 K리그 흥행 이유
서포터즈는 최근 유료 관중이 늘어난 이유로 카타르월드컵 16강 진출과 코로나19 방역 해제 등을 꼽았다. 광주FC 서포터즈 이대식(22)씨는 "월드컵 때문에 축구에 관심이 생겨서 K리그 경기장을 찾았는데, 마침 그날 광주가 대승을 해서 서포터즈 세계에 입문했다"고 말했다. 김현이씨는 "실력 있고 잘생긴 선수가 많아진 탓인지 확실히 여성 팬이 늘었다"고 분석했다.
4년마다 돌아오는 월드컵 특수를 구단들이 잘 이용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관중은 월드컵 직후 잠깐 늘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줄어드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엔 달라졌다는 것이다. 김동욱씨는 "코로나19 이후 가족 단위 관중이나 여성 등 새로 유입된 팬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 이벤트를 여는 등 각 구단에서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서포터즈는 올해 들어 축구장이 북적거리는 게 반짝 인기가 아니길 바라고 있다. 김주영씨는 "요즘 관중이 많이 늘었다곤 하지만, K리그 직관이 취미라고 말하면 여전히 '그걸 보는 사람이 있어?'라는 반응이 나온다"며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한국프로축구연맹도 흥행 분위기가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연맹 관계자는 "서포터즈는 축구에만 있는 독특한 응원 문화"라며 "리그가 잘될 때나 안될 때나 경기장을 찾아주시는 우리의 소중한 팬"이라며 감사함을 드러냈다.
박지영 기자 jy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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