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이 '죽인다'고요? 이젠 다른 생명 '살리는 맛' 어때요?"

이혜미 2023. 7. 29.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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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간 편지 엮어 비건 살림 담은 책 '살리는 맛' 발간한 
예술사회학자 이라영과 밴드 '양반들'의 보컬 전범선
이라영과 전범선이 한 해 동안 주고받은 편지에는 계절과 상황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다채로운 비건 음식들이 등장한다. 명절에 친구들과 함께 빚어 먹는 비건 만두, 제철 채소로 만든 지삼선, 봄날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냉이 장칼국수 등. 이 음식은 누군가를 잡거나, 착취하고, 죽이지 않는 '살리는 맛'을 품고 있다. 안다은 인턴기자

예술사회학 연구자 이라영과 밴드 '양반들'의 보컬 전범선의 서간문을 엮은 책 '살리는 맛(동녘 발행)'을 약술하는 것은 도통 불가능한 일이다. 비거니즘(동물을 착취해서 생산되는 것들을 거부하고 동물권을 옹호하는 사상 혹은 철학) 책이라기엔 비건이라는 주제에만 천착하지 않고 페미니즘 책이라기엔 젠더 불평등이 주된 소재는 아니다.

"저는 '살리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전범선)"

"관통하는 화두는 '고통'이에요. 타인의 고통뿐 아니라 모든 타자의 고통이요. (이라영)"

경쟁과 성장, 발전과 이윤에 가치를 둔다는 점에서 육식과 성차별적 문화가 연동한다고 생각하는 이라영은 "정치인들은 누구와 어디서 뭘 먹는지 전시하는 식사 정치를 할 게 아니라, 식량위기에 대응할 정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책에 썼다. 안다은 인턴기자

지난 10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난 두 저자는 공저한 책을 이렇게 약술했다. 결국 △내가 먹는 음식이나 소비하는 물건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타자에 대한 착취와 폭력을 조금이라도 감소시키려는 실천 방식으로서 채식을 지향하며 △번거롭더라도 살림을 제3자나 기업에 외주화하지 않고 스스로 꾸려가는 일상에 대한 총체적 대화다.

시작은 2021년 출판사 편집자의 제안이었다. "요즘 좋은 걸 표현할 때 '죽인다'고 하잖아요. 맛있는 거를 두고도 '죽이는 맛'이라고 하고요. 그런데 죽이는 것 말고 살리는 것을 강조할 수는 없을까요." 그렇게 '살리는 맛'이 탄생했다. 페미니스트와 동물권을 옹호하는 채식주의자가 주고받은 편지에는 지구를 둘러싼 온갖 화두가 등장한다. 기후위기, 생태주의, 소비자본주의, 제국주의와 인간중심성에 대한 성찰을 식탁 위에 올라오는 제철 식재료와 채식 메뉴를 소재로 풀어낸다.

"사실 편지라는 건 장거리 연애할 때 썼던 기억뿐이라 사상적 교류를 위해 쓰려니 어려우면서도 묘하게 재밌었어요. 다만 글쓰기 레퍼런스(참고 자료)가 전 애인에게 쓴 편지밖에 없어 난감했지만요." 전범선이 웃으며 말했다.

"저는 노래하는 사람이잖아요. 분위기를 살리고, 느낌을 살리는 게 제 일이라 생각하고 살리는 일에 천착하고 있어요. 그중 가장 중요한 건 건강하게 나를 살리는 일이에요. 그러면 생명도, 지구도 살아나는 게 자연의 이치라 생각해요." 안다은 인턴기자

2021년 9월 30일 이라영이 김포에서 보낸 편지를 시작으로 2022년 9월 23일 전범선이 서울 해방촌에서 답장을 하기까지 1년 동안 총 24통의 편지(실제로는 이메일로 교류했다)가 오갔다. 전범선이 자문위원으로 있는 동물권 단체 '동물해방물결'이 구조한 소의 보금자리를 구하기 위해 전국 팔도를 돌아다닌 일, 강원도와 경북에서 심각한 산불이 발생해 9일 만에 진화된 일, 코로나19를 앓은 일, 2022년 대선을 앞두고 극심해지는 여성혐오 등 일상 속 사건과 사유를 토대로 깊고 넓은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우리가 모두 비건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이렇게 먹어도 되는가, 이렇게 소비하며 살아도 되는가, 이렇게 죽이며 살아도 되는가를 질문한다. (8쪽)"

책은 모두가 채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육식을 하는 이에게 과도한 죄책감을 부여하지 않는다. 다만 물을 뿐이다. TV만 틀면 연예인들의 먹는 장면이 줄곧 나오고, 유튜브에는 맵고 짜고 단 음식 먹방이 인기를 끌며, 스테비아 농법으로 재배한 과일 등 단맛에 중독돼 버리고, 클릭 몇 번이면 어디서 누가 생산했는지 모르는 식재료와 음식이 문앞에 당도하는 일련의 장면에서, 정말로 우리의 식탁은 안녕한지를 말이다. 폭력과 착취에 둔감해지는 사회를 경계하고 성찰하면서, 동시에 몇몇 맛깔나는 비건 레시피를 소개하며 대안적 생활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공교롭게도 인터뷰 다음 날인 11일은 초복이었다. 저자들은 마트의 주요 매대마다 삼계탕 재료가 비치되고, 어떤 보양식을 먹어 여름을 날지 고민하는 복날의 풍경 역시 재고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옛날과 달리 요즘처럼 매 끼니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세상인데, 복날이라고 고기를 챙겨 먹는 게 이상하지 않나요. 다른 생명을 '잡기'보다 채식을 함으로써 '살리는 날'로 만드는 건 어떨까요." 이라영이 말했다.

복날에 어울리는 '살리는 보양식'을 물었다. '콩국수'가 이구동성으로 돌아왔다. "콩국물에다가 각자가 좋아하는 면을 넣기만 하면 되니 얼마나 간편해요. 특히 두부면은 삶지 않고 물에다 헹구기만 하면 되니 간편하죠. 거기에 방울토마토를 섞어 들깻가루를 듬뿍 넣어 먹어보세요." 이라영의 생생한 묘사에 전범선은 입맛을 다지며 말했다. "편지에 집중하느라 그간 서로 일부러 연락하지 않았거든요. 사실 오늘이 책 나오고 처음 보는 거예요. 아무래도 오늘 점심에는 함께 콩국수를 먹으며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눠야겠어요!"

소비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폭력에 저항하는 데에 있어, 개인이 '비건이냐, 페미니스트냐' 하는 사회적 호명은 사실 그리 중요한 구별은 아닐지도 모른다. 착취하는 거대 구조 앞에서 페미니즘과 비거니즘이 교차하고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두 사람이 1년간 나눈 대화가 보여준다. "비거니즘이나 페미니즘은 결국 내가 보지 못하는 고통을 가급적 보게 만드는 렌즈라 생각해요. (이라영)" 안다은 인턴기자
식구들과 함께 먹을 수 있는 비건 만두. 동녘 제공(일러스트=알라코)
비건 만두 레시피 ('살리는 맛'에서 발췌)
1. 양파, 쪽파, 둥근호박, 표고버섯을 썰어 손질합니다. 표고버섯 말고 계절에 맞는 다른 버섯을 넣어도 좋아요.
2. 두부의 물기를 빼고 으깹니다.
3. 미리 불린 당면을 삶습니다.
4. 준비한 모든 재료를 섞고, 소금과 간장으로 간을 맞추면 만두소 완성!
5. 만두피 가장자리에 물을 바르면서 소를 넣어 만두를 빚습니다.
6. 완성된 만두를 찜기에 찝니다.
7. 감사한 마음으로 맛있게 먹습니다.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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