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제 꼬리를 문 뱀의 시간
석사 논문을 쓸 때의 일이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고 크게 감명받고서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논문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지금의 내가 논문을 쓰지 않으면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무엇도 알려줄 수 없다는 것을.
영화 속 주인공이 임무 수행을 위해 집을 떠나던 날, 어린 딸의 방에 모래로 ‘STAY’라는 단어가 만들어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주인공은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딸을 뒤로하고 우주로 떠났다. 먼 미래에 그 현상이 외계인도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 한 일임을 깨닫는다. 5차원 세계에 사는 외계 존재에 대해 “그들이 아니야, 우리야”라는 대사가 함축적 의미를 설명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공간은 공간에 놓이는 물체의 무게만큼 왜곡된다. 빛도 시간도 그 왜곡의 영향을 받는다. 지구에서의 하루가 우주 어느 행성에서는 1분도 안 되는 식의 시간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이 상대적인 시간을 우리는 어떻게 인식하고 측정하고 있는 것일까.
조금 전 밥을 먹은 나와 지금의 내가 동일한 존재라고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어제의 나와 내일의 나는 같은 사람일까? 잠을 자는 사이 어제의 나는 사라지고 아침이 되면 새로운 내가 눈을 뜨는 것은 아닐까? 밥을 먹고 친구와 이야기를 하고 잠을 자고…. 무수한 사건의 점들을 하나로 이을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동일하고 유일한 존재라고 상정할 수 있다. 그리하여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르는 일직선상의 시간을 전제로 내세운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동일하고, 미래의 내가 존재할 것이라고 여기면서.
분절되지 않는 시간을 쪼개고 측정하며 시, 분, 초 등의 이름으로 명명해 일직선으로 흐르는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 과거는 고정불변의 것이고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으며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 일직선으로만 흐르는지 의문을 품었다. 누군가를 짝사랑하며 슬퍼했던 어느 밤이 있다. 몇 년이 지나 상대도 나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슬펐던 밤은 반짝이는 밤이 됐다. 미래의 사건이 과거의 사건에 영향을 주어 나의 과거를 바꿨다.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흐른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고대 신화 속 우로보로스는 큰 뱀으로 자신의 꼬리를 입에 물고 있다. 시작인 머리가 끝인 꼬리를 물고 있으니 시작과 끝이 같은 것이요, 삶과 죽음이 하나임을 상징한다. 원의 형태로 세계를 둘러싸고 무한히 회전하는 우로보로스에게 시간은 과거와 미래가 서로 영향을 주며 끝없이 돌고 도는 것이다. 얼마 전 오른쪽 발목을 우로보로스가 감고 있는 타투를 새겼다. 동생은 “엄마, 언니 또 타투 했어!”라고 소리쳤고 아빠는 “우로보로스네”라고 말하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결혼하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한다며 칼럼으로도 썼던 만우절 결혼식이, 아빠의 건강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은 마지막 날이 될 줄을. 결혼식 한 달 후 아빠가 췌장암 4기 판정을 받았고 결혼하길 잘했구나 생각하게 될 줄을. 또 어느 미래를 상상해본다. ‘이때가 아빠 예쁜 사진 찍은 마지막일 줄 알았나봐’라고 아빠와 함께 웃을 수 있는 미래를. 그 미래는 나의 과거도 현재도 바꿔줄 것이니까.
김예선 부산민주공원 홍보 담당 청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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