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정보국에 포섭된 KGB 스파이가 냉전 종식 앞당겼다

유석재 기자 2023. 7. 2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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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형도 KGB 소속이었던
‘인싸 요원’ 올레크 고르디옙스키

스파이와 배신자

벤 매킨타이어 지음 | 김승욱 옮김 | 열린책들 | 568쪽 | 3만2000원

‘비밀정보기관의 역사’를 쓴 독일 역사학자 볼프강 크리거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오늘날 복지 사회에서의 삶이 얼마나 국가의 정보기관을 통한 보호에 많이 의지하는지를 쉽게 잊어버리고는 한다.” 에너지 공급, 교통망과 통신체계, 공장, 은행, 병원 같은 것들을 순식간에 마비시킬 수 있는 공격을 막으려면 비밀 정보원, 즉 스파이들의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재 미·중의 세계 패권 경쟁 속에서도 스파이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은 최근 “10년 전 중국이 우리 측 일부 요원을 체포한 뒤로 강력한 휴민트(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 수집 방법)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고, 중국은 이에 대해 “허위 정보를 유포하며 대규모 정보 활동을 수행하려는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덴마크 안보 정보국(PET)이 비밀리에 촬영한 KGB 요원 고르디옙스키의 사진.

세계 현대사에서 스파이의 활동은 종종 큰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 이미 여러 사례로 밝혀졌다. 하지만 그것은 정작 당대엔 베일에 싸여 있다가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뒤에야 전모가 드러나곤 했다. 영국 더 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저자가 쓴 ‘스파이와 배신자’는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엔 무척 자세하다. 냉전 시대의 종식을 앞당기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소속 이중 스파이 올레크 고르디옙스키가 주인공이다. 저자가 고르디옙스키 본인을 100시간 넘게 인터뷰하고 영국 비밀정보국(MI6) 전직 요원들의 확인을 거쳤다.

1938년생인 고르디옙스키는 의심의 여지 없이 충성스러운 ‘인싸’ 요원이었다. 아버지와 형이 모두 KGB에서 근무했고 별 탈 없이 해외에 파견됐다. 그러나 덴마크 코펜하겐에 부임한 뒤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방 문화의 풍요로움을 동경하게 된 반면 소련 공산 정권의 부패와 위선에 대한 환멸이 생겼다. 1968년 ‘프라하의 봄’ 때 KGB 요원인 그의 형이 체코에 침투해 학자와 언론인을 납치하는 것을 보곤 체제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됐다.

그리고 이런 그에게 접근한 사람들이 있었다. 영국의 MI6 요원들이었다. 1974년에 고르디옙스키는 MI6에 포섭됐다. KGB 내부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첩자라고? ‘이것은 서방의 모든 정보기관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미 중앙정보국(CIA)의 한 국장이 ‘화성에 상주 스파이를 침투시키는 것만큼이나 가망 없는 일’로 볼 만큼 실현이 어려운 일이었다.

고르디옙스키가 소련을 탈출하기 전 MI6와 접선하려 했던 장소인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성 바실리 성당. /열린책들

그것을 해낸 MI6는 고르디옙스키를 첩자로 관리하며 ‘첩보 활동의 역사에서 유례 없는 절제를 보여 줬다’는 것이 저자의 평가다. 모스크바에 돌아가서도 계속 연락하거나 기밀을 보내라고 부추기는 대신 전혀 간섭하지 않고 일을 하도록 한 것이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는 영국 측의 질문에 고르디옙스키는 이렇게 대답했다. “소련 지도자들에 관해 가장 비밀스러운 정보, 가장 중요한 정보, 가장 본질적인 요소를 알아내겠소.”

그 뒤 고르디옙스키가 전달한 KGB의 핵심 정보를 통해 영국은 자국에 침투한 스파이를 하나둘씩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당황한 KGB는 내부 어딘가에서 정보가 샌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CIA에 침투시킨 첩자로부터 놀라운 첩보를 받게 된다. “고위급 KGB 요원이 MI6의 이중 스파이다!”

1985년 5월, 런던 지부장으로 승진해 임명장을 받으러 모스크바 자택에 도착한 고르디옙스키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나올 때 분명 아파트 잠금장치 3개 중 2개만 잠궜는데 이제 보니 3개가 모두 잠겨 있었던 것이다. 소름 끼치는 순간이었다. ‘내가 감시당하고 있구나!’ 두 달 뒤, 그는 조깅을 하러 나가는 척하면서 레닌그라드행 야간열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핀란드 국경 근처에서 MI6 요원과 만나 탈출에 성공했다. 시간대별로 치밀하게 묘사된 이 장면의 박진감은 최고조에 달한다.

현재 영국에서 가명으로 생활하는 고르디옙스키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높은 산울타리로 에워싸인 집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 구부정한 턱수염 노인은 연금을 받아 살아가는 평범한 노인일 뿐이다. 그러나 사실 그는 역사적으로 엄청난 중요성을 지닌 인물이다.” 스파이 소설의 대가 존 르 카레는 이 책에 대해 “내가 읽은 논픽션 중 최고”라 평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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