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프라하의 봄 마주한 후, 더는 KGB로 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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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5월 18일.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소속 올레크 고르디옙스키 대령은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1938년 태어난 고르디옙스키의 인생은 KGB 그 자체였다.
고르디옙스키의 주 역할은 KGB의 정보를 MI6에 전달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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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탈출 과정 영화처럼 흥미진진…서방에선 냉전종식 앞당겼단 평가
고국 등진 뒤 이념적 혼란 겪기도
◇스파이와 배신자/벤 매킨타이어 지음·김승욱 옮김/568쪽·3만2000원·열린책들
그런데 마중 나오기로 한 KGB 직원이 보이지 않았다. KGB 장교들이 가족과 함께 사는 모스크바의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그는 당황했다. 3개의 잠금장치 중 2개만 잠그고 모스크바를 떠났는데, 3개 모두 단단히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두려움에 떨며 생각했다. “KGB가 나를 감시 중이다.”
소련과 영국 양국에서 이중간첩으로 살았던 고르디옙스키의 일대기를 다룬 논픽션이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 기자가 고르디옙스키를 100시간 이상 인터뷰하고, 영국 비밀정보국(MI6) 전직 요원들에게 사실관계를 확인해 썼다. 이중간첩의 굴곡진 인생을 한 편의 첩보 소설처럼 그려냈다.
1938년 태어난 고르디옙스키의 인생은 KGB 그 자체였다. 그의 아버지는 1936년 당에 저항하는 반역자를 솎아내는 숙청 작업에 깊이 관여한 KGB 요원이었다. 그의 형 역시 KGB에서 일했다. 1962년 KGB의 한 부서로 출근하게 된 그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거긴 KGB 같지 않아요. 정말로 정보와 외교 쪽 일을 해요.”
소련에서 들었던 것과 달리 다른 나라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 1968년 체코 ‘프라하의 봄’이 특히 결정적이었다. KGB 요원이었던 형이 관광객으로 위장한 뒤 체코에 침투해 체코의 학자, 언론인을 납치하는 걸 보고 그는 혐오를 느꼈다.
소련 체제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이 생긴 그에게 MI6 요원들이 다가왔다. 그는 고민 끝에 1974년 이중간첩이 되라는 MI6의 제안을 수락했다.
고르디옙스키의 주 역할은 KGB의 정보를 MI6에 전달하는 것이었다. 특히 영국에서 외교관이나 사업가 행세를 하던 KGB 스파이의 신원을 빼냈다. 영국은 이 정보로 KGB 요원들을 여러 번 추방할 수 있었다. 고르디옙스키가 서방 국가에선 냉전 종식을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하지만 1985년 5월 모스크바로 돌아온 그는 KGB의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2개월 후인 1985년 7월 그는 결국 소련에서 탈출했다. 평소처럼 아침 달리기를 하러 나갔다가 핀란드로 밀입국한 것이다. 그가 MI6의 도움을 받아 고속도로, 소련 국경, 핀란드 국경을 이동하는 과정은 한 편의 영화처럼 흥미진진하다.
책 곳곳엔 고르디옙스키의 고민이 녹아 있다. 소련 내 탄탄대로의 삶을 포기할 것인가, 정말 고국을 배신할 것인가, 자본주의가 옳은 것인가 등 이중간첩이 겪을 법한 혼란이 담겼다. 서방에선 “뛰어난 스파이”로, 러시아에선 “야비한 배신자”로 다른 평가를 받는 건 그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요즘 영국에서 가명으로 사는 고르디옙스키의 삶을 이렇게 전한다.
“그는 지금도 이중 생활을 하고 있다. 높은 산울타리로 에워싸인 집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 구부정한 턱수염 노인은 그냥 연금을 받아 살아가는 평범한 노인일 뿐이다. 그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이자 가장 고독한 사람이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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