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국정원은 간첩 잡는 곳

2023. 7. 29.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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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
정보에 관한 강의를 할 때 자주 쓰던 유머가 있다. “지난 세기 그 규모나 특권에 걸맞은 능력을 자랑하던 정보기관으로는 소련의 KGB와 동독의 슈타지(Stasi)를 든다. 이 두 기관은 국내외에서 엄청난 양의 중요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런데 이 유능한 정보기관들이 끝까지 챙기지 못한 가장 중요한 정보가 있었다. 무엇일까?” 답은 ‘자기들의 국가가 곧 붕괴한다’는 정보다. 혹 이런 현실의 문제에 주목한 정보원이 있었을 수 있지만 그런 사람도 이런 정보를 챙기거나 위에 보고를 할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쁜 정보’를 가져오는 전령을 처벌하는(Shooting the messenger) 예는 정보의 세계에 흔히 있는 일이다.

「 정보와 정치 분리는 심각한 문제
지난 정부 국정원, 간첩 수사 막고
메인 서버 외부 공개 선례 남겨
국정원에 관한 올바른 인식 절실

선데이 칼럼
잘 알려진 마라톤전투의 전야, 적정을 정탐하러 그리스군 진영에 침투한 페르시아군의 세작은 매우 비관적인 보고를 가지고 왔다. “그리스군은 사기가 높고 지휘관은 유능하다. 특히 중무장 보병은 그 위력이 대단하다. 내일 전투의 전망은 매우 어둡다.” 지휘관은 세작을 크게 질책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다시 하지 못하도록 엄히 다스렸다. 폐하께서 내일의 대승을 기대하고 계시는데 이런 말로 심기를 어지럽힌다면 아군의 사기를 저해한다고 크게 노하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마라톤전투의 전말은 아시는 바와 같다.

조금 다른 이야기도 있다. 제임스 캘러한 영국 노동당 의원이 총리가 된 후 해외정보부(MI6)의 국장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그의 조직이 주로 하는 일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국장은 이렇게 답했다. “제가 하는 일은 총리께서 듣기 싫어하실 이야기를 해 드리는 것입니다.” 정보의 세계에서 정책과 정보는 분리해야 한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상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기본적인 상식이 반드시 잘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선진국들의 경우를 살펴봐도 이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더구나 우리의 경우는 단순히 정보와 정책의 분리뿐만이 아니라 정보와 정치의 분리도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오래전의 이야기다. 대선 시기 정보부의 요원 한 분이 부내의 정보들을 빼내어 야당의 선거 운동 진영에 가져다주는 일이 있었다. 이런 정보들이 선거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가 없다. 여하간에 그때 야당 후보는 선거에서 승리했고 승리 후에는 정보부의 새 지휘부를 임명하면서 이 정보원에 관한 특별한 배려를 부탁했다. 새 지휘부는 이것을 거절했지만 후에 지휘부가 교체되면서 이분은 결국 소망하던 높은 보직에 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경우는 정치, 정책, 정보 외에 정실까지가 모두 ‘4위1체’로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인가. 그런데 다른 직원들에게 영향은 어떻겠는가.

중앙정보부가 처음 국가 차원의 정보기관으로 출범할 때부터 정치적 요인이 개입돼 있었다. 그 후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지라도 역대 정권은 국가정보원을 국가의 차원에서라기보다 자신들의 정치의 차원에서 생각해 온 것 같다. 이 경우 문제는 단지 정책과 정보의 구별을 못 하는 것에 그치는 것만이 아닐 수도 있다. 어떤 특정한 개인들의 정실이나 이해관계가 인사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공식 조직 체계 밖의 이른바 실세가 인사에 영향을 미친다. 예외적으로 빠른 진급 등에 동향, 선후배 혹은 실세와의 관계 등이 거론된다. 이런 일은 특히 계급정년제하의 국정원 요원들에게는 사기나 업무 추진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원장의 잦은 교체로 원의 업무에 차질이 빚어지는 것도 같은 차원의 문제다. 그리고 당연히 이런 상황에 대한 책임은 국정원 직원들이 아닌 정치권에 있다. 다른 무엇보다 이런 것이 바로 선진국 수준을 자랑하는 한국의 국가정보원에 남아 있는 전근대적인 적폐다. 이름과 원훈석이 계속 바뀌어도, 뼈를 깎는 결의를 다짐하고 또 다짐해도 정치권의 국가 정보에 관한 몰이해는 그대로 남아 있다.

새로 들어서는 정부마다 국정원과의 관계에 문제들이 있었지만 지난 정부 때의 국정원은 과거의 예와는 차원이 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다. 외부에 알려진 소식들이 사실이라면 전 정부의 입장은 국정원의 개혁이 아닌 폐기 차원의 접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간첩 수사를 오히려 지휘부가 가로막는다거나, 국정원 직원의 행동반경을 제한하고 간첩 수사를 아예 경찰로 이관하는 무리한 조치를 강행하면서도 경찰이 이 새로운 임무를 감당할 준비에는 별다른 관심도 없었다니, 도대체 무슨 의도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국정원의 메인 서버를 외부에 공개하는 극단적인 일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과연 국정원이 앞으로 이런 치명적인 상처를 치유하고 국내외에서 국가의 정보기관으로 정상적인 업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다. 이것은 국정원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 먼저 정치권에서 국가정보원에 관한 바른 인식과 폭넓은 합의가 필수적이다. 김대중 대통령 때 국정원장이던 신건은 햇볕정책의 성공을 위해서는 간첩을 잘 잡아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북한이 대한민국을 전복시키려는 기도를 포기해야 햇볕정책에 진지하게 응할 것이기 때문이다.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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