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하이광 “신문화운동 때 청년 들뜨게 한 후스는 죽었다”

2023. 7. 29.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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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84〉
1956년 3월, 인하이광과 현명한 내조자 샤쥔루의 결혼식. 이날 인하이광은 녜화링의 모친이 장만한 양복을 입었다. [사진 김명호]
녜화링(聶華笭·섭화령)은 소녀 시절 글솜씨가 출중했다. 난징(南京)의 국립중앙대학 외국문학과 재학시절 퇴짜 맞을 셈 치고 문학잡지에 가명으로 원고를 보냈다. 결과가 의외였다. 고액의 원고료와 글 청탁이 계속 들어왔다. 하루는 교육부 부부장이 보자고 했다. 만나 보니 순국한 부친 친구였다. 싱거운 말만 주고받았다. “일자리 구한다고 들었다.” “맞다.” “교사를 시켜주마.” “교사는 싫다.” 부부장은 웃기만 했다. “하고 싶은 일 있으면 말해라.” “나도 잘 모르겠다.” 런던대학 마치고 여러 대학교수를 역임한 항리우(杭立武·항립무)는 마음이 넓었다. 무례를 나무라지 않았다. 격려해 줬다. “네 글을 봤다. 글에 속기(俗氣)가 없다. 계속 써라. 네 모친은 훌륭한 교사였다. 잘 봉양해라.” 졸졸 따라다니던 대학 동기와 결혼했다. 남편은 결벽증과 의처증이 심했다. 언어폭력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항상 밖으로 떠돌았다. 1년에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1949년 중반, 국민당은 내전 패배를 자인했다. 대만 천도 앞두고 순국한 장성 유족들을 챙겼다. 녜화링 가족도 1949년 6월 대만 땅을 밟았다. 당장 먹고살 길이 없었다. 거리에서 만난 대학 친구가 일자리를 소개하며 수다를 떨었다. “국민당 중앙위원 레이전(雷震·뢰진)이 ‘중화민국(中華民國)’이라는 잡지를 창간했다. 편집위원들의 면면이 교육부장과 대만은행 총재 등 화려하고 다양하다. 대만대학 교장 푸스녠(傅斯年·부사년)이 철학과 교수로 초빙한 자유주의자 인하이광(殷海光·은해광)도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발행인은 미국에 있는 후스(胡適·호적)지만 실제 업무는 레이전이 총괄한다. 장제스도 자금 지원을 했다고 들었다. 내가 보기에 너는 남자보다 문자(文字)와 인연이 많다. 지금 ‘자유중국’은 좋은 필자 구하느라 분주하다. 내가 레이전 부부를 잘 안다. 소개할 테니 함께 가자.”

녜화링 가족, 1949년 대만 땅 밟아

1958년 4월 대만에 정착한 후스(둘째 줄 왼쪽 넷째)는 정부 눈 밖에 난 ‘자유중국’과 선을 그었다. 중앙연구원 원장 취임을 앞두고 ‘자유중국’ 편집위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눴다. 후스 왼쪽이 녜화링과 샤쥔루. 셋째 줄 중앙 장신이 레이전, 레이전 오른쪽 둘째가 인하이광. [사진 김명호]
레이전은 녜화링의 참여를 반겼다. “좋은 글 부탁한다”며 집까지 마련해 줬다. “대만성 주석 우궈전(吳國楨·오국정)이 일본 적산가옥 한 채를 우리에게 내줬다. 방 3개에 거실도 쓸 만한 집에 인하이광 혼자 살고 있다.” 녜화링은 인하이광에 관한 소문을 익히 들었다. “성격이 괴팍하고 변덕이 심하다. 비사교적이고 오만함이 말로 표현하기 힘든 사람이다. 흉측한 집에 귀신과 함께 산다.”
녜화링의 모친(오른쪽)과 두 딸. [사진 김명호]
거처가 마땅치 않았던 녜화링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린 두 딸과 모친 모시고 이사했다. 남루한 복장으로 마당에 서성이던 인하이광은 표정이 없었다. 그날 밤 모친은 괴물 중에 상괴물과 한집에 살게 됐다며 한숨만 내쉬었다. 녜화링도 걱정이 태산 같았다. 날이 밝자 상황이 급전했다. 모친이 장미꽃 한 다발 들고 녜화링을 깨웠다. “일어나 보니 방문 앞에 꽃이 놓여 있다. 귀여운 괴짜를 괴물로 오해했다. 꽃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없다. 하류배들의 입소문은 귀에도 담지 말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녜화링의 회고 한 구절을 소개한다. “장미화를 계기로 중국이 자랑하는 자유주의자는 우리 가족에 합류했다. 같이 저녁이라도 하는 날은 밥보다 언어의 성찬이 벌어졌다. 인하이광은 아름다움과 애정, 중국인의 문제점과 미래의 세계, 쿤밍(昆明)의 서남연합대학 시절과 존경하는 스승 진웨린(金岳霖·김악림)과의 인연, 쿤밍의 가을 하늘과 야생화, 러셀, 하이에크, 아인슈타인과 주고받은 편지 얘기하며 모친을 웃기고 울렸다. 애정 표현도 특이했다. 매주 토요일 대만대학 재학 중인 약혼자 샤쥔루(夏君璐·하군로)가 오면 말없이 바라보며 웃기만 했다.”

인하이광의 강연 참관 회상도 빠뜨리지 않았다. “모친이 조르기에 함께 갔다. 인하이광은 젊은 지식인들의 우상이었다. ‘우리의 총통은 위대한 반공주의자다. 그래서 나는 총통을 지지하고 존경했다. 총통이 모순덩어리라는 것을 알고 지지를 철회했다. 총통은 스탈린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전제(專制)는 계승했다. 자유와 인권을 무시하고 좁디좁은 섬에 계엄령이 웬 말이냐’는 말에 환호가 터졌다. 강연 마친 후 우리 모녀 발견하자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모친도 두 손 번쩍 들고 화답했다. 청중들의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열렬한 박수 보내며 인하이광을 연호했다.”

“꽃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 없다”

1952년 대만으로 돌아온 후스와 레이전의 만남에 동석한 녜화링. [사진 김명호]
레이전은 녜화링의 글을 좋아했다. “미국에 있는 후스도 여사 글 보고 칭찬했다. 문예(文藝)란 전담하고 편집위원회 회의에도 참석해라.” 녜화링은 자기주장이 강했다. 조건을 달고 수락했다. “순수문학 작가를 발굴하고 반공문학은 배제하겠다.” 당시 국민당은 반공문학이 아니면 문학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작가들은 먹고살기 위해 반공문학에만 전념할 때였다.

그날 밤 인하이광이 모녀의 방을 노크했다. “잠깐 들어가고 싶다.” 맥스웰커피 두 잔 들고 한 개밖에 없는 등나무에 털썩 앉았다. 모녀에게 한 잔씩 주고 후스를 비판했다. “신문화운동시기 청년들을 들뜨게 했던 후스는 이미 죽었다. 정치가도, 학자도, 사상가도 아니다. 세계 각국 다니며 명예학위수집가로 전락했다. 34개 명예학위 받은 것 자랑하는 속물로 변했다. 지금 대륙과 대만은 해외에 있는 명망가 영입에 분주하다. 후스가 어린 아들이 있는 대륙을 버리고 대만으로 온다는 소식을 접했다. 천륜을 무시한 사람이다. 지금은 ‘자유중국’의 상징이지만 언제 우리를 버릴지 모른다.” 인하이광의 예측은 적중했다.

녜화링은 칠십 년 전, 인하이광이 타 준 커피 맛을 평생 잊지 못했다. 백 세를 앞둔 지금도 최고의 커피는 맥스웰이라는 말을 자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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