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지법 써 남대문 훌훌 뛰어넘어” 라이더 서재필에 탄성
[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개화기 상징 자전거
외국 선교사·의사들 자전거 타고 다녀
1928년 발행한 월간잡지 ‘별건곤’ 2호는 1895년 사회 분위기를 다루며 “미국 망명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최초로 자전거를 탔는데, 차력으로 남대문을 훌훌 뛰어넘었으며 종을 한번 울리면 대포 소리 같았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그가 자전거를 타고 당시 청나라 사신 접대용 영은문을 허물고 새로 짓는 독립문 신축 현장을 오갔다는 신문기사도 있고, 이를 본 사람들은 신통방통한 자전거 모습에 놀라 그 물건을 ‘축지차(縮地車)’로 불렀다고 한다.
최초의 조선인 자전거 라이더는 서재필이지만 진정한 ‘최초’는 아니었다. 1884년에 조선에 온 미국 해군장교에 따르면 1886년에 이미 외국 선교사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이어 1893년에는 외국 의사들이 자전거를 타고 경복궁이나 덕수궁에 왕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에 자전거가 출현한 건 1883년에서 1886년 사이로 보인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했던 애비슨(O.R.Avison)은 “고종 황제가 내 자전거를 보고 ‘넘어지지 않고 달릴 수 있는 방법’을 궁금해 했다”고 전한다. 이에 애비슨은 “처음에는 균형을 잡기 어렵지만 오래 타면 넘어지지 않는다”며 시범을 보였다고 한다.
알렌(H.N.Allen)의 『조선견문기 1908』에는 조선인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선교사들을 ‘나리’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가마와 비슷해 보여서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자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구경꾼들의 요청에 못 이겨 길을 여러 번 왔다 갔다 해야 했다”고 한다.
서재필은 18세 때 과거에 합격한 천재로, 1882년에 교서관(校書館)의 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일본 도야마(戶山) 육군학교에 유학하고 귀국해 사관학교인 조련국(操鍊局)을 만들어 사관장이 된다. 그해 12월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사관생도들을 지휘해 신정부의 병조참판 겸 후영영관(後營領官)에 임명된다.
정변은 실패하고, 혁명파는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서재필만 미국으로 떠난다. 혈혈단신 미국에 도착한 그는 주경야독하여 1886년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이름도 필립 제이슨(Philip Jason)으로 개명해 조선인 최초 미국 국적 이민자가 된다. 이후 컬럼비아 의과대학을 졸업하여 미국 최초의 조선인 의사가 된다. 갑오경장으로 12년 만에 다시 돌아온 32세 젊은 서재필은 이번에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된다.
그는 국민의 계몽이 시급하기에 신문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1896년 ‘독립신문’을 창간한다. 사람들은 동분서주하는 그를 “조화꾼”이라 부르거나 미국에서 축지법을 배워 자전거를 타고 종로를 지나 남대문을 타넘어 독립문을 건설했다고 수군거렸다.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가다 반대파들에게 포위당했을 때 그가 자전거 벨을 한번 크게 울리자 이들이 혼비백산 달아났다는 기록도 전한다.
자전거가 본격 수입의 길에 오르자 상인들은 판촉을 위해 상금을 걸고 대회를 자주 열었다. 제 1회 대회는 1906년 4월 22일 훈련원(을지로 6가)에서 100원이라는 큰돈을 상금으로 걸고 열렸다. 대회 참가자 중에는 자전거 가게 점원이 많았고 엄복동 역시 자전거 가게인 일미상회 점원이었다. 그는 1913년 4월 경성일보사와 매일신보사가 인천(12일)·용산(13일)·평양(27일) 등에서 공동 주최한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에서 첫 우승 이후 줄곧 선두를 유지했다. 그의 인기가 얼마나 절정이었는지 조선인 최초의 비행사인 안창남과 함께 “쳐다보니 안창남, 굽어보니 엄복동”이라는 동요까지 유행할 지경이었다.
자전거 경기가 벌어지면 인파가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종로나 용산의 중심가 상점들은 아예 문을 닫을 정도였다. 고관들조차 부인과 자녀들을 대동하여 관람했다. 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자전거 하면 엄복동이었다. 자전거 대회에서 일본 선수들을 꺾고 1등을 도맡아 1922년 5월 23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자전거 대회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통일 염원 담아 ‘삼천리호’ 이름 붙여
승승장구 인기몰이를 하던 대회도 위기가 있었다. 만세운동 다음해인 1920년 5월 2일 경복궁에서 열린 자전거 경기에서 사달이 벌어졌다. 일본인 경쟁자는 몇 바퀴를 남겨놓았지만 엄복동은 결승선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때 해가 졌다는 이유로 주최 측이 경기를 중단시켜버린다. 화가 난 엄복동이 본부석으로 뛰어들어 우승기를 찢어버리자 일본인들은 몰려들어 그를 구타했다. 이에 가만히 있을 조선인 관중들이 아니었다. 조선인과 일본인 간에 큰 싸움이 벌어지고 경찰이 출동해 겨우 진정시켰다고 한다.
정작 조선에 모던 문명의 이기를 선보였던 서재필의 가문은 갑신정변 이후 멸문지화를 당한다. 부모 형제들 대부분이 옥에 갇혀 참형을 당해 죽거나, 노비로 끌려갔다. 그의 아내는 자살하고 두 살 난 아들은 굶어 죽는다. 서재필에게 조선은 그토록 가혹했다.
1896년 귀국한 서재필은 한국어를 완전히 잊어버린 듯 영어만 사용했다고 한다. 그가 고종을 만났을 때 안경을 벗는 것이 예의라고 하자 “나는 미국 시민”이라며 안경을 쓰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담배를 문 채 절도 하지 않았으며 고종의 물음에는 영어로 대답했다. 그의 마음속에 쌓인 울분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그가 “서양 도깨비에게 홀려서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가 처음 타고 다녔던 자전거의 이미지도 꼭 좋을 리만은 없었다. 그러나 자전거는 거듭 태어난다.
자전거는 해방 이후 서울에만 2만9507대, 1947년에는 5만2451대로 늘어났다. 이 무렵 자전거가 오늘날의 자가용 구실을 하여 많은 직장인들과 학생들이 출퇴근과 통학에 이용했다. 꼬불꼬불 골목길로 자전거는 우편이나 물건 배달하기에 적당했다.
삼천리자전거는 현재 기아자동차의 뿌리였다. 1944년에 경성정공이 국내 최초 자전거 회사를 시작했다. 해방 직후 자전거 주요 부품을 완전 국산화하여 생산 기틀을 마련하고 1952년 경성정공의 이름을 ‘기아산업’으로 바꾸면서 최초 국산 자전거를 제조하였다. 기아는 통일 염원을 담아 자전거에 ‘삼천리호’라는 이름을 붙였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이호영 서강대 K종교학술확산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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