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여왕에게 훈장 받은 KGB 스파이
벤 매킨타이어 지음
김승욱 옮김
열린책들
장면과 인물에 대한 세밀하고 꼼꼼한 묘사가 스릴러 소설을 보는 느낌을 주지만, 이 책은 엄연한 실화다. 옛 소련의 정보·보안 기관인 국가보안위원회(KGB)의 런던 지부장까지 오른 고위직 스파이 올레크 고르디옙스키의 ‘전혀 있을 법 하지 않은 스파이의 삶’을 다룬 전기다.
시작부터 충격적이다. 무시무시한 KGB의 방첩담당 K부 요원들이 모스크바의 어느 아파트 문을 간단히 따고 들어간다. 벽과 바닥을 연결하는 나무널빤지와 벽지 뒤에는 도청 장치를, 유선전화기에는 실시간 중계가 가능한 마이크를 설치한다. 거실·침실·부엌의 조명에는 비디오 카메라를 숨긴다. 옷과 신발에 방사성 가루를 뿌리는 장면에 이르면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인체에 피해를 주지는 않을 정도로 뿌린 뒤, 방사능 탐지기를 가동하면 착용자의 이동 행적을 추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냉전 시절 방첩 활동과 ‘수퍼 스파이’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를 담았다. 고르디옙스키는 영국 대외정보기관 MI6에 특급 정보를 꾸준히 넘겨온 이중스파이였다. 공산주의 체제에 염증을 느껴 내부에서 소련을 파괴하기로 결심한 계기, 그런 그를 포섭하고 이중스파이로 활용한 과정과 수법은 스파이 교과서에 실릴 정도라고 한다.
앞날이 창창한 KGB 정예요원이 이중스파이가 된 사연은 길다. 독일어를 배운 그는 서방의 신문을 읽으며 허위 선전의 실상을 어느 정도 파악했던 터. 1961년 KGB 견습생으로 이제 막 장벽이 건설되기 시작한 동베를린에서 6개월을 보내며 본격적으로 체제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체제에 비판적이지 않으면 정신이 이상한 것으로 간주됐다는 시절이기도 했다.
1972년 다시 덴마크로 발령 받은 그에게 영국 요원이 접근했다. 이 과정도 한 편의 스릴러물을 방불케 하는데, 고르디옙스키는 이데올로기적 신념 때문에 활동하는 것이라며 돈을 받지 않았다. 한 달에 한 차례씩 접촉해 나눈 대화는 카세트 테이프에 담겨 외교 행랑으로 런던에 전달됐다.
이렇게 그가 제공한 정보는 전쟁을 막고 서방의 안보를 튼튼하게 했으며, 서방의 단합과 국제 관계 개선을 이끌었고, 소련 체제를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데에도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영국과 미국 곳곳에서 암약하던 소련의 이중스파이를 찾아낸 것은 무엇보다 큰 소득이었다.
1985년 모스크바로 호출받은 그는 혹독한 심문을 받고 자백 유도 약물까지 주입 받았지만 버텼다. 그래도 KGB의 의심이 그치지 않자, MI6는 이미 7년 전 준비해뒀던 탈출계획 ‘핌리코 작전’을 가동한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설 정도로 과감하고 위험한 작전이었다.
이런 고르디옙스키와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이중스파이 올드리치 에임스였다. 그는 돈을 받고 소련과 러시아에 정보를 제공했고, 이로 인해 숱한 서방 요원이 소련이나 중국에서 붙잡혀 처형됐다. 에임스가 소련에 넘긴 정보가 고르디옙스키를 위협했을 수도 있다.
영국으로 탈출한 고르디옙스키는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물론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눴다. 2007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으로부터 안보에 기여한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 공식적으로 공적을 인정받은 셈이다. 그는 소련에서는 1985년 11월 14일 궐석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는 여전히 유효하다. 가족과는 탈출 6년 뒤이자 소련 해체 직전에 영국에서 재회할 수 있었지만, 부인과의 관계는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영국 ‘더타임스’의 기자로 경력을 쌓고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지은이는 이 책을 쓰는데 MI6의 자료는 활용할 수 없었다. 여전히 비밀이기 때문이다. 대신 고르디옙스키는 물론이고 그와 연관된 전직 M16 간부들을 모두 인터뷰했다. 지은이가 만난 사람들은 이전까지 한 번도 털어놓지 않았거나 못했던 이야기를 공개했다고 한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전문기자 tzschaei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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