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강한 일본, 칩4 동맹·수퍼 엔저로 반도체 왕국 부활 꿈
반도체 세계 대전, 일본의 반격
미국 뿐 아니라 EU와도 반도체 동맹
외교전만의 얘기가 아니다. 일본은 강력한 보조금 혜택을 내세워 불과 1년 사이에 세계 1~3위 반도체 기업인 TSMC(대만)·삼성전자(한국)·인텔(미국)의 생산 기지와 연구·개발(R&D) 거점을 자국에 유치했다. 일본 정부는 TSMC가 구마모토현에 짓고 있는 신규 공장 건설 투자비의 40%에 달하는 4760억 엔(약 4조3000억원)의 보조금을 지원했다. 삼성전자는 300억 엔을 들여 요코하마시에 차세대 반도체 시험 생산을 위한 R&D 전용 테스트 라인을 건설하는데 일본이 100억 엔(약 909억원)의 보조금을 주기로 했다.
자국 기업 육성에도 사활을 걸고 있다. 지난해 8월 일본에선 세계 2위 낸드플래시(비휘발성 메모리 반도체) 업체 키옥시아와 도요타(자동차)·소니(전자)·덴소(자동차 부품) 등 대기업 8곳이 연합하고 일본 정부가 지원하는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가 설립됐다. 라피더스는 ‘일본판 TSMC’가 되는 것을 목표로 2027년부터 2㎚(나노미터, 1㎚=10억분의 1m) 반도체 칩을 양산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반도체 칩은 작아질수록 성능이 좋아지는데 학계에선 2~3㎚를 미세 공정의 물리적 한계점으로 보고 있다. 삼성전자나 TSMC도 2㎚ 제품 양산 목표 시점을 2025년부터로 정할 만큼 까다로운 분야인데 일본이 라피더스를 앞세워 단기간에 기술 격차를 따라잡겠다고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그사이 한국 등 후발주자들이 치고 올라온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미국의 제재가 결정타였다. 1960년대부터 이어진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과 반도체 패권 장악에 위기감이 커진 미국은 1985년 ‘플라자 합의’를 통해 일본 엔화 가치를 급등시켜 일본 반도체의 수출 경쟁력을 떨어뜨렸다. 미국은 1986년에도 일본산 반도체에 대한 100%의 관세 부과 등을 골자로 하는 미·일 반도체 협정을 체결, 1996년까지 일본 반도체에 대한 제재를 이어갔다. ‘21세기 산업의 쌀’로 통하는 반도체 패권을 상실한 일본은 이후 ‘잃어버린 30년’의 경제 불황 늪에 빠졌다.
그랬던 일본이 왜 갑자기 반도체 산업의 부활을 자신하면서 공격적으로 투자를 하고 있을까. 전문가들은 크게 세 가지 이유로 분석한다. 첫째, 미국이 구상한 이른바 ‘칩4 동맹’과 이를 통한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라는 지정학적 호재 때문이다. 칩4 동맹은 미국이 지난해 3월 한국과 일본, 대만에 제안한 반도체 동맹이다. 미국의 반도체 설계(팹리스),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 일본의 반도체 소재, 대만의 파운드리 경쟁력이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글로벌 공급망을 주도하자는 개념이다. 미국은 중국과의 반도체 패권 경쟁 격화로 동맹 강화 필요성이 커지면서 과거에 내쳤던 일본까지 포섭하려는 것이지만, 일본 입장에선 어쨌든 모처럼 반도체 패권 경쟁에 주도적으로 나설 기회가 생긴 셈이다.
일, 한국·대만과 반도체 삼국지 포석
둘째, 반도체 제조 경쟁력은 잃었어도 여전히 지키고 있는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경쟁력 때문이다. 미국 안보신기술센터(CSET)에 따르면 일본의 글로벌 반도체 소재 시장점유율은 56%로 세계 1위다. 글로벌 반도체 장비 시장점유율도 전(前)공정 장비에서 29%, 후(後)공정 장비에서 44%라는 높은 수치를 고루 기록하고 있다. 김일혁 KB증권 연구원은 “한국·미국·대만 기업이 아무리 시장을 지배하고 있어도 기술 고도화와 비용 절감을 위해선 일본산 소부장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며 “대체가 불가능한 하이엔드 소부장 기술까지 고려하면 일본 소부장 없이는 반도체 제조가 불가능하다고 봐도 되는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셋째, 지난해부터 이어지고 있는 기록적인 엔화 약세, 이른바 ‘수퍼 엔저’ 때문이다. 엔·달러 환율은 지난해 한때 150엔을 돌파하면서 3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고 지금도 140엔 수준을 기록 중이다. 일본은 경기 침체가 워낙 길어져 코로나19의 엔데믹 전환(팬데믹 종료)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도 미국 등 주요국과 달리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 아닌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을 걱정해야 했다. 이에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이 미국 등과는 반대로 통화 완화 기조를 이어가면서 엔화 가치가 추락한 것이다. 이런 흐름은 일본의 통화 정책이 급변하지 않는 한 계속될 전망이다. 이는 반도체에서도 경쟁국 대비 제품 가격 경쟁력이 높아져 수출 경쟁력이 제고됨을 의미한다.
이 같은 배경 속에 일본은 반도체에서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다. 반도체 산업에서 중국의 추격과 일본의 역(逆)추격이라는 이중고(二重苦)를 마주하게 된 한국 역시 바빠졌다. 올해 3월 ‘K칩스법’인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의 국회 본회의 통과로 반도체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율이 대기업과 중견기업은 기존 8%에서 15%로, 중소기업은 16%에서 25%로 각각 높아지는 등 대책 마련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올해 1분기에만 반도체에서 총 8조원에 달하는 적자를 기록하는 등 수출 전선엔 여전히 먹구름이 끼어 있다. 오용섭 동의대 소프트웨어융합학과 교수는 “장기적 관점에서 고급 인재 양성과 한국이 약한 시스템 반도체 부문 집중 육성 등의 노력을 이어가야 일본의 역추격을 따돌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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