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강한 일본, 칩4 동맹·수퍼 엔저로 반도체 왕국 부활 꿈

2023. 7. 29.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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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세계 대전, 일본의 반격
세계 최대 파운드리인 대만 TSMC가 일본의 소니·덴소와 손잡고 일본 구마모토현 기쿠치군에 건설 중인 반도체 공장. [교도=연합뉴스]
몰락했던 ‘반도체 왕국’ 일본의 최근 행보가 심상찮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13일 벨기에에서 샤를 미셸 유럽연합(EU) 상임의장 등과 “반도체 수급 정보를 공유해 공급난을 막는 데 협력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양측은 반도체 산업 지원을 위한 보조금 관련 정보도 공유해 중복 투자를 막고, 차세대 반도체 연구·개발(R&D) 등에 힘을 모으기로 했다. 이로써 일본은 미국뿐 아니라 EU와도 직접적인 반도체 동맹 관계를 구축했다. 후미오 총리는 올해 5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미국과 ‘반도체 협력 기본 원칙’에 합의한 바 있다.

미국 뿐 아니라 EU와도 반도체 동맹

외교전만의 얘기가 아니다. 일본은 강력한 보조금 혜택을 내세워 불과 1년 사이에 세계 1~3위 반도체 기업인 TSMC(대만)·삼성전자(한국)·인텔(미국)의 생산 기지와 연구·개발(R&D) 거점을 자국에 유치했다. 일본 정부는 TSMC가 구마모토현에 짓고 있는 신규 공장 건설 투자비의 40%에 달하는 4760억 엔(약 4조3000억원)의 보조금을 지원했다. 삼성전자는 300억 엔을 들여 요코하마시에 차세대 반도체 시험 생산을 위한 R&D 전용 테스트 라인을 건설하는데 일본이 100억 엔(약 909억원)의 보조금을 주기로 했다.

자국 기업 육성에도 사활을 걸고 있다. 지난해 8월 일본에선 세계 2위 낸드플래시(비휘발성 메모리 반도체) 업체 키옥시아와 도요타(자동차)·소니(전자)·덴소(자동차 부품) 등 대기업 8곳이 연합하고 일본 정부가 지원하는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가 설립됐다. 라피더스는 ‘일본판 TSMC’가 되는 것을 목표로 2027년부터 2㎚(나노미터, 1㎚=10억분의 1m) 반도체 칩을 양산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반도체 칩은 작아질수록 성능이 좋아지는데 학계에선 2~3㎚를 미세 공정의 물리적 한계점으로 보고 있다. 삼성전자나 TSMC도 2㎚ 제품 양산 목표 시점을 2025년부터로 정할 만큼 까다로운 분야인데 일본이 라피더스를 앞세워 단기간에 기술 격차를 따라잡겠다고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물론 2021년 세계 최초로 2㎚의 시제품을 생산한 IBM(미국)에 라이선스 비용을 지불하고 기술 지원을 받는다는 전제 조건이 있다. 하지만 이를 고려해도 일본이 첨단 반도체 기술 경쟁력 확보를 통한 반도체 산업 부활에 얼마나 사활을 걸고 있는지가 단적으로 나타난다. 사실 일본 반도체 산업의 부활은 2년 전만 해도 ‘꿈만 같은 일’로 여겨졌다. 시장 조사 업체 IC인사이츠에 따르면 1988년 무려 50.3%였던 일본의 글로벌 반도체 시장점유율은 2021년 6%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미국(54%)과 한국(22%)은 물론 대만(9%)에도 뒤처졌다. 연매출 기준 글로벌 반도체 기업 순위에서도 1990년 NEC·도시바·히타치 등 6곳이 10위 안에 들었던 일본이지만 지난해엔 단 한 곳도 10위 안에 들지 못했다(이상 파운드리 미포함 집계).

그사이 한국 등 후발주자들이 치고 올라온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미국의 제재가 결정타였다. 1960년대부터 이어진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과 반도체 패권 장악에 위기감이 커진 미국은 1985년 ‘플라자 합의’를 통해 일본 엔화 가치를 급등시켜 일본 반도체의 수출 경쟁력을 떨어뜨렸다. 미국은 1986년에도 일본산 반도체에 대한 100%의 관세 부과 등을 골자로 하는 미·일 반도체 협정을 체결, 1996년까지 일본 반도체에 대한 제재를 이어갔다. ‘21세기 산업의 쌀’로 통하는 반도체 패권을 상실한 일본은 이후 ‘잃어버린 30년’의 경제 불황 늪에 빠졌다.

그랬던 일본이 왜 갑자기 반도체 산업의 부활을 자신하면서 공격적으로 투자를 하고 있을까. 전문가들은 크게 세 가지 이유로 분석한다. 첫째, 미국이 구상한 이른바 ‘칩4 동맹’과 이를 통한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라는 지정학적 호재 때문이다. 칩4 동맹은 미국이 지난해 3월 한국과 일본, 대만에 제안한 반도체 동맹이다. 미국의 반도체 설계(팹리스),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 일본의 반도체 소재, 대만의 파운드리 경쟁력이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글로벌 공급망을 주도하자는 개념이다. 미국은 중국과의 반도체 패권 경쟁 격화로 동맹 강화 필요성이 커지면서 과거에 내쳤던 일본까지 포섭하려는 것이지만, 일본 입장에선 어쨌든 모처럼 반도체 패권 경쟁에 주도적으로 나설 기회가 생긴 셈이다.

일, 한국·대만과 반도체 삼국지 포석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특히 라피더스의 IBM 기술 흡수에서 보듯 일본은 과거 폐쇄적이었던 산업 환경까지 바꿔가면서 칩4 동맹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외국 기업의 반도체 기술을 배운다는 건 과거 일본 같았으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라며 “일본의 반도체 제조 경쟁력이 지속되지 않은 데는 특유의 폐쇄성도 크게 작용했는데, 일본 정부가 개방적인 정책 추진으로 이런 분위기부터 확 바꾼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이 내수와 수출에서 차량용 반도체 시장 공략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된다. 전기차와 자율주행차 열풍을 등에 업고 급성장 중인 시장임에도 현재까지 자동차 기업들이 믿고 맡길 만한 글로벌 파운드리는 사실상 TSMC와 삼성전자 둘뿐인데, 일본 정부는 라피더스를 통해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여기에 가세하려 하고 있다.

둘째, 반도체 제조 경쟁력은 잃었어도 여전히 지키고 있는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경쟁력 때문이다. 미국 안보신기술센터(CSET)에 따르면 일본의 글로벌 반도체 소재 시장점유율은 56%로 세계 1위다. 글로벌 반도체 장비 시장점유율도 전(前)공정 장비에서 29%, 후(後)공정 장비에서 44%라는 높은 수치를 고루 기록하고 있다. 김일혁 KB증권 연구원은 “한국·미국·대만 기업이 아무리 시장을 지배하고 있어도 기술 고도화와 비용 절감을 위해선 일본산 소부장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며 “대체가 불가능한 하이엔드 소부장 기술까지 고려하면 일본 소부장 없이는 반도체 제조가 불가능하다고 봐도 되는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셋째, 지난해부터 이어지고 있는 기록적인 엔화 약세, 이른바 ‘수퍼 엔저’ 때문이다. 엔·달러 환율은 지난해 한때 150엔을 돌파하면서 3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고 지금도 140엔 수준을 기록 중이다. 일본은 경기 침체가 워낙 길어져 코로나19의 엔데믹 전환(팬데믹 종료)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도 미국 등 주요국과 달리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 아닌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을 걱정해야 했다. 이에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이 미국 등과는 반대로 통화 완화 기조를 이어가면서 엔화 가치가 추락한 것이다. 이런 흐름은 일본의 통화 정책이 급변하지 않는 한 계속될 전망이다. 이는 반도체에서도 경쟁국 대비 제품 가격 경쟁력이 높아져 수출 경쟁력이 제고됨을 의미한다.

이 같은 배경 속에 일본은 반도체에서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다. 반도체 산업에서 중국의 추격과 일본의 역(逆)추격이라는 이중고(二重苦)를 마주하게 된 한국 역시 바빠졌다. 올해 3월 ‘K칩스법’인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의 국회 본회의 통과로 반도체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율이 대기업과 중견기업은 기존 8%에서 15%로, 중소기업은 16%에서 25%로 각각 높아지는 등 대책 마련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올해 1분기에만 반도체에서 총 8조원에 달하는 적자를 기록하는 등 수출 전선엔 여전히 먹구름이 끼어 있다. 오용섭 동의대 소프트웨어융합학과 교수는 “장기적 관점에서 고급 인재 양성과 한국이 약한 시스템 반도체 부문 집중 육성 등의 노력을 이어가야 일본의 역추격을 따돌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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