伊 전철 밟는 韓 만성 정치위기 파헤친다

김수미 2023. 7. 28.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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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 유럽서 출산·혼인율 가장 낮아
한국과 비슷… 고질적 위기 봉착
대중정치 의미하는 ‘노무현 질서’
‘팬덤·포퓰리즘 정치’로 가치 변질
‘상위 중산층’이 지지 핵심 기반
양당 고소득자 중심 정책에만 몰두
불평등 속 ‘정치 복원’ 갈길 멀어

이탈리아로 가는 길/조귀동 지음/생각의힘/1만8000원

‘노동시장과 복지제도 양쪽에서 강한 이중 구조가 형성돼 있고, 전통적인 성 역할과 가부장제가 끈끈히 남아 있으며, 좌우 가리지 않고 포퓰리즘 정치가 기승을 부린다.’

어느 나라의 얘기일까. 이 문장의 주어는 한국, 이탈리아 모두 될 수 있다.

신간 ‘이탈리아로 가는 길’은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미국이나 스웨덴을 롤모델로 삼아왔지만, 현재 이탈리아의 전철을 밟고 있다고 말한다. 이탈리아는 2021년 1인당 GDP(3만1288달러)가 한국(3만1497달러)에 추월당하고, 유럽에서 출산율과 혼인율이 가장 낮다.
조귀동 지음/생각의힘/1만8000원
전작 ‘세습 중산층 사회’에서 90년대생이 겪는 불평등에 주목하고, ‘전라디언’을 통해 지역과 계급이라는 이중차별에 갇힌 호남을 분석한 조귀동 작가는 신간에서 한국을 교착상태에 빠뜨린 원인으로 정치의 위기를 지목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쏘아올린 대중정치가 문재인정부와 윤석열정부를 거치며 팬덤, 포퓰리즘 정치로 변질되며 정당과 전통적인 지지 세력이 분열되는 과정을 날카롭게 분석했다.

그는 한국 정치가 만성적 위기에 빠진 것은 2002년 대선을 전후해 자리 잡은 ‘노무현 질서’가 더는 작동하지 않아서라고 지적한다. 노무현 질서는 노 전 대통령이 당내 경선과 대선에서 정당에 의존하지 않고 대규모로 유권자를 동원해 당내 권력을 잡았던 대중 정치를 의미한다.

이를 뒷받침한 것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근무하며 대도시에 거주하는 화이트칼라 집단의 ‘중산층 행동주의’였다. 저자가 전작 ‘세습 중산층 사회’에서 ‘상위 중산층’이라고 호명한 이들은 1987년 6월 혁명과 2002년 ‘노무현 돌풍’을 이끌며 사회 이슈 전반에 목소리를 냈다.

2000년대 들어 보수정당과 진보정당 모두 이 같은 경제적 승자들이 주도권을 쥐었고, 노무현정부 역시 먹고사는 문제보다 정치·검찰·언론 개혁에 집중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제헌절 기념 현수막이 붙어 있는 모습. 신간 ‘이탈리아로 가는 길’은 한국의 위기가 정치인이나 정당, 권력 구조가 아닌 정치 질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라고 지적한다.연합뉴스
호남과 호남출신 이주민의 당이었던 민주당은 수도권 기반 상위 중산층의 정당으로 변해갔다. 서울 등 대도시에 살고 대기업 정규직으로 안정된 경제적 지위를 가진 40∼50대가 주요 지지층이다. 민주당은 중산층 행동주의로 무장한 이들의 이익에 배치되는 정책을 펼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2022년 3월 대선에서 일자리가 불안정하고 소득이 낮은 경제적 약자들의 민주당 이탈을 가져왔다.

보수정당은 5년 만에 정권 탈환에 성공했지만, 스스로 쟁취해낸 것이 아니라 민주당이 스스로 무너진 덕분이었다. 박정희, 반공·반북, 영남으로 요약되는 전통적 보수가 퇴조한 가운데 보수정당은 새로운 이데올로기, 정책, 인물, 조직이 없었다. 청산된 보수권력과 살아 있는 진보 권력 모두와 맞싸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보수 진영의 러브콜을 받은 건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취약한 지지 기반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과거 보수정당 대통령은 중도적 유권자를 설득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윤 대통령은 대결적인 정치구도를 짜고, 취임 이후 중도 유권자 집단이 반응할 만한 의제도, 보수의 지지 기반이 된 사회경제적 약자를 위한 정책을 펼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2017년 5월 20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8주기 추모 문화제에 모인 시민들 모습. 연합뉴스
저자는 지난 몇 년 사이 정당이 아닌 후보자에 반응하는 팬덤정치와 당내 정치에서 선명성 경쟁이 중요해지면서 한국 정치가 정치적으로 중도층, 경제적으로는 중산층이라는 사회계약을 사실상 포기했다고 꼬집는다. 양당이 대중정치의 주역으로 떠오른 상위 중산층이나 고소득·자산보유가를 위한 정책에만 몰두한 나머지 ‘뒤처진 사람’들과의 격차는 점차 벌어져 복합적인 불평등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대선에서 확인했듯 결국 선거에서는 탈정치화돼 보이는 중도적 유권자와 뒤처진 사람들의 불만이 정권 교체 등 대규모 정치 구조 변화를 야기한다.

책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중정치를 기점으로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을 팬덤과 포퓰리즘 정치의 길을 걷게 된 과정과, 각 당의 주도 세력과 지지 세력 간 괴리를 통해 한국 정치의 위기와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결국 답도, 희망도 ‘정치의 복원’이라는데 과연 한국 정치가 응답할 준비가 돼 있을까.

김수미 선임기자 leol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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