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마리에서 코덱스로…책, 기록을 넘어 하나의 작품이 되다[이은수의 아이겐밸류 - 인간의 고유함을 되묻다]
인공지능 핵심기술의 수학적 근간을 이루는 선형대수학에서 아이겐밸류는 행렬변환 후에도 변화가 없이 그 자신으로 남는 고유벡터의 고윳값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인공지능의 파고가 모든 이들에게 다양하게 다가오겠지만 인공지능이라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을 인간의 고유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파피루스 단점은 내구성 약한 것…기원전 2세기 무렵 양피지 만들어
듣고 말하는 일에서부터 읽고 쓰는 일로 바뀌게 되면서 점점 더 문자로 기록된 책이 늘어났다. 문자문화의 초기에는 돌, 점토판, 나무조각에 쓸 수 있는 글의 분량이 많지 않았지만, 파피루스 두루마리 형태의 책을 만들 수 있게 되면서부터 더욱 길고 복잡한 내용을 책에 담을 수 있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나일강 하구 삼각주에서 자라던 갈대과의 식물 줄기를 얇게 발라낸 뒤 줄기 대를 서로 교차한 상태에서 압착해 건조함으로써 30~40㎝ 크기의 사각형 모양 파피루스를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조각들을 20여장 이어 붙여 책을 만드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 결과로 평균적으로 6~8m 길이의 파피루스 두루마리가 만들어졌다.
파피루스는 이전의 기록 매체들에 비해 가벼우면서도 많은 양을 기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내구성이 약하다는 단점이 있었는데 건조하지 않은 환경에 보관할 경우 곰팡이가 발생해 파피루스가 망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개는 수십년의 연한을 내다볼 수 있을 뿐이었고 작품을 계속 보존하기 위해선 아무리 길어도 200년마다 작품을 새로운 두루마리에 옮겨 써야 할 정도였다. 이런 보존의 취약성 때문에 고대 파피루스들은 대개 이집트 사막의 흙먼지 속에 파묻힌 경우에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19세기 말 영국의 B P 그렌펠과 A S 헌트가 발굴팀을 이끌고 발견한 옥시링쿠스(Oxyrhynchus)의 파피루스들이다. 발굴 시점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옥스퍼드 대학은 옥시링쿠스 파피루스들에 대한 연구 결과들을 출판한다. 이 살아남은 파피루스 단편들 덕분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로마 시대 이집트에서 생산된 책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사막 흙먼지가 아닌 경우라도 파피루스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었던 대안은 화산재 밑에 묻히는 것이었다. 79년 폭발한 베수비오 화산에 의해 폼페이가 최후를 맞았던 날, 인근 도시 헤르쿨라네움의 호화로운 한 빌라도 화산재에 묻혀버렸다. 1750년 이 빌라가 처음 발굴됐을 때, 이 빌라의 도서관에 소장돼 있던 1800여개의 파피루스 때문에 이 빌라는 ‘파피루스의 빌라(Villa dei Papiri)’라는 이름을 얻었다. 비록 화산재에 의해 탄화되긴 했으나 대량의 파피루스가 발굴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렇게 한동안 파피루스는 지중해 세계에서 긴 글을 기록할 수 있는 유일한 매체로서의 지위를 유지했으나 서서히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한다.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아나톨리아 지방 북서쪽에 위치한 고대 도시 페르가몬에서 양피지를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시 페르가몬에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다음 가는 페르가몬 도서관이 있었는데,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이집트의 파피루스를 페르가몬으로 반출하는 것을 금지했다고 한다. 고대 도서관들의 경쟁 속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경쟁 우위를 영구히 확보하려는 노력이었겠으나, 이 때문에 페르가몬 왕 에우메네스 2세는 파피루스를 대체할 매체로 동물 가죽을 다듬어 양피지를 만드는 작업을 서두르라고 지시해야만 했다. 이런 연유로 양피지는 이후 페르가몬 도시의 이름을 따서 ‘Pergamentum’이란 라틴어로 불렸고, 여기서 다시 ‘Parchment’라는 영어 명칭이 생겨났다.
양피지 묶음 다발을 책등에 고정, 오늘날 책의 형태인 ‘코덱스’ 등장
우리가 주목하는 파피루스에서부터 양피지로의 이 변화는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변화를 낳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변화는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책의 모습인 코덱스의 형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양피지 여러 장을 포개 하나의 묶음을 만들고 다시 이 묶음들을 포갠 뒤 묶음 다발을 책등에 고정한 코덱스 형태는 독자들에게 기존 두루마리식 책을 읽을 때와는 상당히 다른 읽기 경험을 제공했다.
이 읽기 경험의 변화를 체감하기 위해 한 번쯤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적힌 작품을 양피지 코덱스 위에 옮겨 적는 상황을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처음 해야 할 일은 서가에 가득 쌓인 많은 책들 중에서 우리가 찾는 작품을 수록한 두루마리를 찾는 것이다. 두루마리마다 작가와 작품명을 적어놓은 표식(티툴루스)을 달아놓은 덕분에 일일이 두루마리를 펼치지 않고도 원하는 두루마리를 분간해낼 수 있어 다행이다. 이제 돌돌 감겨 있던 두루마리를 펼쳐 필사를 시작할 지점을 찾아봐야 한다. 두루마리 형태의 책은 기본적으로 연속적인 읽기이다. 두루마리의 시작부터 끝나는 곳까지 연속해서 줄지어 나란히 배열돼 있는 텍스트 단락들이 눈에 들어온다.
코덱스로 변화된 핵심은 앞장에서 뒷장으로 책장을 넘겨 읽는 페이지의 구분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두루마리를 돌려서 풀어나가면 지면이 특별한 구분 없이 연속적으로 펼쳐졌을 뿐인데, 이제 페이지별 구획을 나누는 작업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두루마리를 코덱스로 바꾸는 과정은 두루마리에 빼곡하게 들어서 있던 텍스트 단락(칼럼들)을 어떻게 한 페이지에 옮길 것인가의 고민과도 같다. 과연 두루마리의 몇 단락 정도를 코덱스 한 페이지에 담는 것이 적절할 것인가?
제일 쉬운 해법은 코덱스 한 페이지에 두루마리의 한 단락씩만 일대일 대응하듯이 옮겨오는 일이다. 그러나 상황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코덱스 한 페이지 크기가 두루마리 한 단락의 크기와 대강 맞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대부분 두 매체 간 크기 차이 탓에 이런 방식은 값비싼 양피지를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끔은 두루마리의 두 단락을 옮겨와 코덱스의 한 페이지를 채우는 경우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일반적으로는 두루마리에 적혀있던 텍스트를 코덱스에 옮겨 적으면서 텍스트의 행과 열을 조정하는 작업이 수반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두루마리에서부터 코덱스로의 변화는 단순한 형태의 전환이 아니었다. 이 기록 매체의 변화는 여러 사회, 문화,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촉발됐지만 궁극적으로 기존 형태 책을 읽을 때의 읽기 경험 전부를 재검토하는 결과를 낳았다. 두루마리 형태의 책을 읽을 때는 전혀 필요가 없었거나 구현할 수 없던 여러 읽기 장치들을 코덱스라는 환경에서 새롭게 고안해야 했기 때문이다.
문단 구분 표시·띄어쓰기 등 변화…여백엔 주석 등 부가 정보 기입도
세 가지 예만 살펴보기로 하자. 첫번째 예는, 텍스트의 재구성 과정이 진행되면서 활발히 등장한 문단 구분 표시이다. 두루마리에 적힌 텍스트 단락들을 코덱스에 옮겨 적으면서 두루마리에 있던 여러 단락들이 합쳐지기도 하고 나뉘게도 됐다. 이런 분리 조합 과정에서 텍스트의 내용이 어디서 시작해 어디서 멈추는지를 표시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런 이유로 문단 구분 표시들이 코덱스 형태의 사본들에 많이 등장했다.
오늘날 문서편집 워드프로세서에서 단락 끝 표시 기호로 사용되는 ‘필크로(¶·pilcrow)’의 오래된 조상은 그리스어 사본의 여백에 문장들을 그룹 지어 구분하기 위해 표시해뒀던 가로선이다.
이 가로선을 그리스어로는 ‘파라그라포스(Paragraphos)’라고 불렀는데 직역하면 “(여백에) 나란히 쓰인 것”이란 뜻이다. 이 말에서부터 단락을 의미하는 영어 ‘Paragraph’가 파생하게 되었다.
이 파라그라포스가 더 자주 쓰이면서 그리스어 감마가 대신 사용되기도 했고, 이후 라틴어 사본에서는 ‘머리’를 뜻하는 라틴어 단어 ‘Caput’의 앞 글자를 따서 C가 새로운 내용의 시작을 알리는 머리기호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국어로 ‘장(章)’, 영어로 ‘Chapter’라고 부르는 이 텍스트 뭉치는 라틴어 ‘Caput’에서 파생된 ‘Capitulum’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이후 이 단락 머리기호 C에 세로선을 그어 꾸미는 과정에서 C가 q의 눈이 채워져 있는 모양인 필크로로 서서히 변형해갔을 가능성이 높다. 인쇄본이 만들어진 뒤에도 이 필크로는 필사본을 장식했던 채색사들의 손에 의해 주로 붉은 글씨로 새겨지곤 했다. 그래서 인쇄 과정 중 필크로가 들어갈 공간이 남겨지곤 했는데 채색사들이 책의 출판 기한 이전에 이 작업을 미처 마치지 못하면 빈 공간 그대로 책이 나오기도 했다. 이것이 문단을 시작할 때 우리가 빈 공간을 들여 쓰는 계기가 됐다.
두번째 예로 단어들의 띄어쓰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엄격히 말하면 단어들을 띄어 쓰게 된 것은 두루마리로부터 코덱스로의 변환 때문만도 아니고, 그 변환 시점과 단어들의 띄어쓰기가 시작된 시점이 잘 들어맞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단어들의 띄어쓰기를 코덱스로의 변환과 관련해 짚어볼 필요가 있는 것은 결국 코덱스 형태의 책이 점점 더 가독성을 높이는 장치들을 하나둘 더 갖추는 방향으로 발전해나갔기 때문이다. 알파벳을 단어들 사이 띄어쓰기 없이 적어나가는 방식을 ‘스크립티오 콘티누아(Scriptio Continua)’라고 부르는데, 연속해 글자들을 붙여 적는다는 의미이다. 쐐기문자를 적은 점토판에서는 단어들을 구분 짓는 세로 모양의 스트로크(𐎂)가 사용되기도 했고, 그리스어 비문에는 중간점(Interpunct)을 통해 단어들을 구분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고전기 라틴어 작품들을 기록한 많은 사본들은 오랫동안 단어들 간의 띄어쓰기나 구분 표시가 전혀 없이 연속적으로 기록되곤 했다. 이는 결국 그런 글을 읽을 만한 지위의 지식인들이 띄어쓰기 없이도 충분히 단어들을 분절해 독해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코덱스 형태의 책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 시작하면서 문단 부호 표시나 단어 띄어쓰기처럼 더 다양한 계층의 독자들을 위한 편의장치들이 늘어나게 됐다.
세번째 예는 여백의 역할이 변화했다는 점이다. 코덱스로의 변화로 인해 한 페이지 안에서 텍스트가 적힌 본문의 공간과 그 여백 공간 사이의 위계관계가 만들어졌다. 물론 파피루스 두루마리에서도 단락과 단락 사이 여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주로 이 여백은 윗줄부터 아랫줄까지 한 단락이 다 기록된 후 다음 단락이 시작하기까지 일종의 쉼표이자 단락과 단락 사이를 구분짓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코덱스에서의 여백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미 두루마리의 여백이 맡았던 여러 기능들은 페이지를 넘기거나 문단 구분 표시를 확인하는 행위를 통해 대체될 수 있었다.
독자들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잠시 읽는 과정을 환기하며 쉴 수 있었고, 일련의 문장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주는 파라그라포스를 통해 내용들을 구분지어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코덱스의 여백은 비어져 있어야 할 공간으로서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둘러싼 곳으로서 본문에 대한 부가적인 정보를 채워 넣어야 할 공간으로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았다. 간혹 두루마리의 여백에도 글자들을 끄적여 놓은 사례가 발견되곤 하지만, 본문과 여백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하게 된 것은 코덱스 형태를 활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제 이 여백은 본문에 대한 주석가들의 생각을 채워 넣는 곳으로, 본문의 이곳저곳을 상호 참조하는 연결고리를 밝혀두는 곳으로, 또 무엇보다 본문에 대한 독자들의 생각을 기입하며 작품과 가상의 대화를 구현할 수 있는 곳으로 활용되게 된다.
종합해보면, 코덱스로의 전환과정이 만들어낸 이런 세세한 변화들은 책의 한 페이지를 어떻게 시각적으로 구성할 것인가에 관한 다양한 시도들을 유산으로 남겼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각 페이지가 몇 개의 단락 열로 구성되는 것이 가장 적합한지, 문단 간의 간격은 어떻게 나타낼지, 각 챕터의 첫 글자를 어떻게 아름답게 채색해 강조할지, 본문과 여백의 글자 크기를 어떻게 구별해 정보들의 상관관계를 표현할지와 같은 책의 시각적 구성 일체(mise-en-page)에 대한 여러 실험을 반복하고 있다.
목차·페이지 생겨나 ‘발췌독’ 가능…지식의 시각적 구조화 시작돼
코덱스 형태의 책 속 지면 구성에 대한 이 여러 시도들은 점진적으로 독자들이 여러 정보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하며 책을 읽을 수 있게 해줬다. 그리고 가독성을 높이는 이런 노력들이 축적돼 책을 읽는 경험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데, 드디어 책의 목차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코덱스로 묶인 책은 나무나 가죽을 덧댄 표지 이후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페이지 순서를 매길 수 있었기 때문에 독자들은 책의 특정한 내용이 어디에 등장하는지 정보를 쉽게 제공받을 수 있었다. 코덱스 형태의 책이 가진 페이지의 구분은 필요한 부분을 쉽게 찾아서 발췌하는 읽기 방식이 안착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책을 구성하는 각 장에 표제가 붙기 시작하고 이 표제들의 위치를 정리한 목록을 제시할 환경이 코덱스 형태에 와서야 비로소 갖춰진 것이다.
결국 코덱스 형태의 책은 텍스트를 어떻게 시각적으로 배열할 것인가의 문제를 이제 각 지면 한 장의 차원뿐 아니라 목차를 통해 책 전체의 내용 구조 체계를 세우는 문제로도 풀어나가게 된다. 이로써 지식의 발전에서 책은 단순히 말을 옮겨 적은 기록으로서만이 아니라, 지식을 시각적으로 구조화한 하나의 걸작품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이렇게 코덱스 형태 책의 가치가 한껏 높아진 상황에서 또 하나의 큰 변곡점이 찾아온다. 다음번 연재글에서 우리는 초기의 인쇄본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높은 기대치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목표와 널리 바르게 책을 보급해야 한다는 목표 사이에서 어떻게 발전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이은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와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수학, 서양고전, 과학사를 공부하였다. 카이스트에서 수행했던 인문학과 기술의 상호 발전에 대한 연구 및 강의를 바탕으로 서울대에서 디지털인문학이란 이름으로 인문학의 미래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서양 고대로부터 과학혁명 시기에 이르기까지 수학 및 과학적 지식의 생성과 발전 및 혁신 과정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이은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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