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폭언 시달리던 20대 생 마감…법 사각지대에서 우는 을(乙) [취재후]

배지현 2023. 7. 28.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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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자동차 부품 대리점에서 일하던 20대 청년이 상사의 욕설과 폭언에 시달리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제보와 함께 유족은 KBS 취재진에게 7백여 개의 통화 녹취 파일을 전했습니다.

피해자가 생을 마감하기 전 3개월 간 휴대전화에 자동으로 녹음됐던 통화 중 90여 건에는 20대 청년이 버텨야만 했던 상사의 욕설과 폭언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다음은 그 통화 녹취 중 일부 내용입니다.


녹취를 확인해보니 직장 상사의 반복되는 폭언과 욕설은 물론이고, 폭행 정황까지 의심됐습니다.

직장 상사는 피해자의 자존감을 계속해서 무너뜨리면서, 자신의 욕설과 폭언을 정당화했습니다.

[2023년 4월 19일 통화]
직장 상사:내가 이렇게 막하는 데는 이유가 있어.
피해자: 그렇습니다 형.
직장 상사: 너 같은 개쓰레기들은.
피해자: 그렇습니다.
직장 상사:
게 얘기해선 안돼.
피해자: 맞습니다 형 죄송합니다.

[2023년 3월 29일 통화]
직장 상사: 너 어디 가서 뭐하고 살래 여기 때려치우면?
피해자: 아무것도 못할 거 같습니다.
직장 상사: 구걸할래? 거지XX처럼?
피해자: 아닙니다.

퇴근 후 집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는 사생활까지도 다그치며 일일이 통제했습니다.


녹취로 확인된 ▲ 피해자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피해자를 통제하려 드는 과정은 전형적인 '가스라이팅' 수법과 유사했습니다. 90여 건의 통화 녹취에서 피해자는 연신 긴장된 목소리로 "죄송합니다"를 반복했고, 자기 자신을 탓했습니다.

그럼에도 그치지 않고, 직장 상사는 신변 위협성 발언과 가족에 대한 협박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700여 건의 통화 녹취를 확인하면서, 계속되는 욕설과 폭언에 취재진도 서서히 숨이 막혀오는 게 느껴졌습니다.

■ 동생의 휴대전화 잠금이 풀리던 날, 형은 충격에 빠졌다

유족들은 피해자의 사망 전까지만 해도 직장에서 그런 괴롭힘을 견디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고 전했습니다.

피해자의 형인 전영호 씨는 "사회 초년생이었던 동생은 워낙 순한 애였다"면서, "숨지기 몇주 전에 동생이 부모님 앞에서 '일 그만 둘까'하고 지나가는 말로 했다던데, 그때 그만두라고 할 걸 후회하는 게 부모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전 씨는 예전에 같이 차에 탄 동생이 직장에서 온 전화를 받을 때, 긴장하며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였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세상을 떠난 동생이 남긴 휴대전화의 잠금이 풀리고, 형은 직장 상사와의 통화 녹음 파일을 처음 듣고선 충격에 빠졌습니다.

전영호/피해자 형
"(녹음 파일) 딱 스타트를 눌렀을 때 욕설이 나온 것 같아요. 이 XXXX부터 시작했어요."

동생의 괴롭힘 피해 사실을 알게 된 이후, 형을 비롯한 유족들은 발을 뻗고 자는 날이 없습니다.

전 씨는"욕설과 폭언이 너무 심해 차마 부모님께 온전히 내용을 말씀 드릴 수가 없었다"면서, "아버지는 두 달째 정신과 치료를 받고 계시다"고 전했습니다.

■ 상사·사업주 "괴롭힘이 죽음 원인 아니다" …"여긴 가족같이 운영해"


피해자가 근무하던 직장은 직원 수 5인 미만의 소규모 사업장이었습니다.

사업주의 가족과 직원 3명이 일하는 곳으로, 피해자는 이곳 사업장에서 막내였습니다.

직장 상사는 부장급 위치로, 부품 대리점의 배달 등 업무 특성상 피해자에게 통화로 업무 지시를 했습니다.

취재진은 해당 직장 상사에게 연락을 취해 입장을 들어봤습니다.

해당 상사는 "솔직히 욕한 건 제가 잘못했다"면서도, "그런 것 갖고 저한테 다 덤터기를 씌우면 제 입장에서는 억울하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해당 상사는 "그거 갖고 저는 그렇게 됐을 거라고 생각은 안한다"면서, 자신의 욕설과 폭언이 피해자 죽음의 원인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취재진은 피해자가 일했던 사업장에도 찾아가 사업주를 만나봤습니다.

사업주는 "여기는 가족같이 운영하는 곳"이라며 괴롭힘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부정했고, 이어 "해당 상사가 애(피해자)를 일부러 겁을 좀 줘서 잘 하라고 했나보더라"고 해당 상사를 감쌌습니다.

또 사업주는 "예전에도 애(피해자)가 자살을 시도한 적이 여러번 있었다고 하더라"면서, 역시 상사의 괴롭힘이 피해자의 죽음의 이유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 5인 미만 사업장은 괴롭힘 '사각지대'…"현황 파악도 안 돼"


근로기준법이 제정된 지도 올해로 70주년이 됐지만, 5인 미만 사업장에는 여전히 법 적용이 제외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직장 내 괴롭힘 역시 근로기준법 제76조의 2에서 금지하고 있지만,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는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근로기준법이 적용되는 일터에서 직장 내 괴롭힘이 발생하면, 피해자는 고용노동부에 괴롭힘을 신고할 수 있고, 신고 시 해당 사업장은 근로감독관의 조사를 받게 됩니다.

근로감독관의 직장 내 괴롭힘 조사와 함께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리 ▲가해자 징계 등을 회사에 요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5인 미만 사업장의 직장 내 괴롭힘은 신고해도 근로감독관의 조사 자체가 이뤄지지 않습니다.

사업주에게 해당 신고 사실이 있었다는 걸 고용부가 알릴 순 있지만, 이마저도 의무가 아닌 근로감독관의 재량에 달렸습니다.

5인 미만 사업장의 괴롭힘 실태와 관련된 정부 통계도 마련돼있지 않습니다.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가 괴롭힘을 당해 고용부에 신고해도, 고용부 통계에는 '기타'로 포함됩니다.

고용노동부에서 더불어민주당 진성준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19년 법 시행 이후 올해 6월말까지 괴롭힘 신고는 총 2만 8,731건이 접수됐습니다.

그 중 '법 위반없음'을 제외한 1만 5,152건이 '기타'로 처리됐습니다.

'기타'에는 5인 미만 사업장이라는 이유로 법 적용이 안되는 사례를 포함해, 임의 취하, 과태료 부과, 불출석 등 다양한 처리 결과가 포함돼 있습니다.

작은 사업장에서 괴롭힘이 발생해 신고를 해도, 고용노동부에선 5인 미만 사업장으로 '법 적용 제외' 처리된 사건이 얼마나 있는지는 통계로도 파악하고 있지 않은 겁니다.

■ 작은 일터에서의 괴롭힘이 더 심각…당정·경사노위는 논의만?


시민단체 '직장갑질 119'의 장종수 노무사는 "5인 미만 사업장의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는 괴롭힘 경험이 더 심각한 경우가 많다"고 말합니다.

해당 단체에서 2021년 6월 직장인 1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직장 내 괴롭힘 경험이 있는 응답자 중 '심각하다'는 응답은 5인 미만 사업장에서 52.1%로 근로기준법이 적용되는 다른 사업장 약 30%보다 높게 나타났습니다.

장종수 노무사는 "이는 좁은 사업장 공간에서 부대끼며 가해자를 계속 봐야만 하기 때문"이라면서, " 5인 미만 사업장에선 한 번 괴롭힘이 발생하면 양상이 계속 심해지는 게 일반적"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어, "유급휴가나 야간수당 등 경제적 부담이 있는 다른 근로기준법 조항과 달리, 직장 내 괴롭힘은 인권의 문제"라면서 " 같은 맥락상에 있는직장 내 성희롱 같은 경우에는 5인 미만 사업장에 이미 법(남녀고용평등법) 적용이 되고 있으니, 괴롭힘만 배제될 이유가 전혀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정부는 5인 미만 사업장에도 근로기준법을 확대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지만, 뚜렷한 방안은 나오지 않은 상황입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올해 초부터 관련 논의를 시작했지만, 당초 6월쯤 나올 걸로 예상됐던 보완책은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당정에서도 '5인 미만 사업장 근로기준법 적용' 논의를 지난 6월에 의제로 띄웠지만, 직장 내 괴롭힘 보다는 유급휴가나 휴일·야간수당 지급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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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현 기자 (vetera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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