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 살인범 조선은 ‘우울증’ 환자?…심신미약 주장, 인정되기 어려운 이유
“내가 예수의 환생”, “사탄의 꾀임에 빠졌다”
조울증·조현병 주장 각양각색
지난 21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흉기를 휘둘러 1명을 살해하고 3명에게 중상을 입힌 조선(33)이 “우울증을 앓아왔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경찰 조사 결과로 미뤄볼 때 조씨의 이 같은 주장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지난 10년 간 정신 질환으로 병원에서 치료 받은 이력이 단 한 건도 없을 뿐더러, 사건을 저지르기 한달 전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홍콩 묻지마 살인’, ‘정신병원 강제 입원·탈출’, ‘정신병원 입원비’를 검색해본 기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달 홍콩의 한 쇼핑몰에서 벌어진 묻지마 살인 범인은 정신과 병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조선이 우울증 병력을 꾸며낸 것이라면, 이는 심신미약으로 인한 감형을 염두에 둔 의도적 발언으로 해석된다. 우리 형법은 책임주의(책임이 없으면 범죄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원칙에 따라 판단력을 결여한 사람의 행위를 벌하지 않거나 감형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실제로 재판부가 심신미약을 이유로 형량을 감경하는 사례가 많은지, 어떤 경우에 감형이 이뤄지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봤다.
◇살인·존속살해 저지르고 조울증·조현병 주장…감형 쉽지 않다
우리 형법 제10조는 심신장애로 인해 사물 변별이나 의사 결정 능력이 ‘미약한’ 자는 감형이 가능하다고 규정한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살인 제2유형 ‘보통 동기 살인’의 기본 형량을 징역 10~16년으로 권고하나, 심신미약 같은 감경 요소가 있으면 권고 형량이 징역 7~12년으로 낮아질 수 있다. 이는 의무가 아닌 임의 규정이다.
28일 조선비즈 취재를 종합하면, 실제로 법원이 심신장애를 판단하는 기준은 굉장히 까다로운 것으로 파악된다. 살인 같은 강력범죄를 저지르고도 심신장애를 이유로 감형 받는 사례 자체가 많지 않으며, 감형을 받더라도 정도가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법원 판결서 열람시스템에서 ‘정신’과 ‘살인’을 키워드로 각급 법원의 판결문들을 검색해 최근 1년 간 선고된 판결 334건을 전수조사해봤다. 그 결과, 살인이나 존속살해를 저질렀음에도 2심 법원에서 정신장애를 참작해 감형한 사례는 약 5건으로 확인됐다.
정신장애에 대한 재판부의 보수적 태도는 통계 결과가 시사한다. 비록 집계 시기는 다르나, 대검찰청범죄분석 통계에 따르면 2021년 한해 동안 정신장애 범죄자가 저지른 살인은 총 50건이며 그중 47건이 기소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1년 간 수십명이 범행 당시 정신장애를 앓았다고 인정 받지만, 실제로 감형까지 이뤄지는 사례는 많지 않은 셈이다.
살인이나 존속살해 피고인들이 가장 흔하게 주장하는 정신장애는 조현병이나 양극성 정동장애(조울증)다. 환청이 들린다든가 사탄의 꾀임에 빠져 살인을 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많고, 범행 사실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며 우기는 사례도 흔히 발견됐다.
유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박사는 “법적으로 심신장애가 인정되려면 사물 변별력이 떨어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어야 하는데, 이와 관련된 증상이 주로 나타나는 질병이 바로 조현병이나 조울증”이라며 “우울증은 아주 극심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런 증상이 나타나진 않아 심신미약으로 인정되기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법원이 심신장애 여부를 판단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증거는 형사정신감정 결과다. 정신감정은 수사 단계에서도 가능하다. 치료감호 등에 관한 법률(치료감호법) 제4조에 따라 검찰이 피의자의 치료감호를 법원에 청구할 수 있다.
◇30년 간 약물 치료 받고 10년 간 자해하고…까다로운 ‘심신미약’ 판단 기준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정신감정은 재판 단계에서 이뤄진다. 법원이 형사소송법 제172조3항에 의거해 국립법무병원 등 정신과 병원에 감정을 촉탁한다.
국립법무병원에서 5년 간 230여건의 정신감정을 한 정신과 전문의 차승민씨는 저서 ‘법정으로 간 정신과 의사’에서 “피해망상이나 환청 같은 정신병 증상이 심하면 피의자 신문조서에 확연이 드러난다”고 회고했다. 자신이 예수의 환생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환청에만 몰두하느라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고 그는 전했다. 이렇게 한 달간 감정을 해서 전문의가 정신감정서를 작성해 진료심의원회에 상정하면 재판에서 증거 자료로 쓰인다.
피고인이 과거 정신질환으로 병원 진료를 꾸준히 받은 기록도 있어야 한다. 치료를 스스로 중단하거나 게을리 하는 등 호전 의지가 보이지 않으면 감형 요인으로 인정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일례로 심신미약을 인정받아 감형(1심 징역 16년→2심 징역 14년)된 A씨의 사례를 살펴보면, 그는 2012년부터 자해를 반복해왔고 2017년부터는 환청을 들었다. 2020년에는 우울병 에피소드, 공황장애, 불안장애 진단을 받고 상담 및 약물치료를 받아온 사실이 인정됐다. 보호관찰소가 제출한 다면적인성검사 결과에 따르면 A씨는 정신적 혼란(지남력 장애), 피해의식, 망상 등의 정신증적 문제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인정됐다.
1심에서 징역 20년을 선고 받고 2심에서 16년으로 감형된 B씨 역시 오랜 기간 조현병을 앓았다는 사실이 인정됐다. 재판부에 따르면, B씨는 1994년 조현병 만성형 진단을 받고 약 30년 간 약물 치료를 받아온 것으로 나타났다. 살인을 저지르기 10일 전부터 피해자의 권유로 약물 복용을 중단했다가 증세가 악화됐던 점, 기독교 찬양 방송을 보다가 망상에 빠져 피해자를 살해한 점 등이 인정돼 감형 요인이 됐다.
다만 정신장애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심신미약으로 인정되는 건 아니다. 범행 당시에는 판단 능력이 있었다는 사실이 인정되면, 감형 사유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범행을 저지른 직후의 행동이나 진술하는 태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재판부가 판단한다.
아내를 흉기로 살해한 C씨의 경우,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정신착란 등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는 점은 인정됐으나 범행 당시 심신미약은 인정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스스로 112에 전화를 걸어 자신이 피해자를 칼로 찔러 죽였다는 말을 한 것을 보면 범행 직후에도 피해자를 살해했다는 걸 인식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설령 피고인이 실제로 이 사건 범행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는 이른바 ‘블랙아웃’ 증상 내지 일시적인 정신적 불안상태로 인해 사후적으로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덧붙였다. 그만큼 정신장애가 심신미약으로 인정 받으려면 ‘넘어야 할 관문’이 많은 셈이다.
유 박사는 “사건 이후에 범행 흔적을 은폐하려 한 흔적 등이 있다면, 이는 자신이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다는 걸 스스로 인지했다는 방증”이라고 설명했다.
서울 소재 한 법원에서 근무 중인 부장판사는 “2000년대 말까지만 해도 심신미약으로 인한 형량 감경이 많았는데, 이제는 엄격하게 따지는 추세”라며 “본인이 정신장애를 스스로 관리하고 치료 받을 방법도 있는데다, 살인 범죄 자체의 양형 기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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