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대 소련·영국 오간 이중스파이의 삶
스파이 활동의 본질은 적국의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조건은 철저한 익명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하물며 양쪽에 발을 걸친 이중 스파이라면 더욱 그렇다. 결국 세간에 이름이 잘 알려진 스파이라면 그의 활동이 아주 성공적이었거나, 아니면 완벽한 실패였을 수밖에 없다.
더타임스에서 기자 생활을 하며 뉴욕·워싱턴·파리 지국장으로 근무했던 저자 벤 매킨타이어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이중 스파이'라고 불리는 올레크 고르디옙스키의 성공담에 주목했다.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베테랑이며 소련의 충실한 비밀요원인 동시에 영국 해외정보국(MI6) 최고 스파이이기도 했던 그의 인생이라면 흥미를 느끼지 않기도 어려운 일이다. 반대편에 서서 KGB에 미국 중앙정보국(CIA) 첩보망 전체를 넘겼던 CIA 요원 올드리치 에임스의 경우도 있지만 서방에서 인정받는 것은 단연코 고르디옙스키다.
물론 고르디옙스키가 전쟁의 승자 쪽에 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돈 때문에 동료를 팔았던 에임스와 달리 정의감 때문에 이중 스파이의 인생을 택했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덴마크 코펜하겐에 파견된 뒤에 접한 서방 문화의 풍요로움을 보며 혼란을 느끼고, 급기야 자신의 고국이 프라하의 봄을 짓밟는 모습까지 지켜본 그는 힘든 선택을 내렸다.
결혼 생활은 물론 목숨까지 위협받는 일이었지만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행한 셈이다.
그렇게 그 누구보다 위험한 무기가 되기를 자처한 고르디옙스키는 영국 내부에 침투한 소련 스파이들을 제거하는 일등 공신으로 거듭나지만 점차 자신에게 좁혀오는 KGB의 올가미를 피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 또한 게을리할 수 없게 되며 하루하루 살 떨리는 삶을 살아간다.
냉전시대 스파이 이야기지만 사람 한 명의 변화가 전쟁의 전체 판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새삼 놀라운 부분이 많다. 여전히 전쟁이 이어지고 있는 오늘날에도 어딘가에 또 다른 고르디옙스키가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역사적인 의미를 떠나서도 재미라는 큰 장점 또한 갖춘 책이다. 저자가 이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은 마치 소설의 그것과도 같아서 흡사 잘 만들어진 첩보물을 보는 듯한 긴장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도청하는 방법이나 위장술 등 영화에서 봤던 장면들이 마냥 허구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고,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MI6가 모스크바에서 그를 탈출시킬 비밀 작전을 감행하는 대목에 이르면 좀처럼 책을 놓기가 쉽지 않다. 스파이 소설의 대가인 존 르 카레가 "실화를 다룬 책 중 최고"라고 평했을 뿐 아니라 빌 게이츠조차 추천 도서로 택했다는 이유를 독자 스스로 찾게 된다.
오늘날 신분을 바꾼 채 영국으로 망명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고르디옙스키도 이 책이 출간되기 전까지 원고를 읽지 않았고, 출간 이후 "흠잡을 데 없다"는 한줄평만을 작가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용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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