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숲에서 스누피와 함께 누리는 ‘귀여운 게으름’ [김지나의 문화로 도시읽기]
제주를 담은 수목들과 스누피 속 ‘힐링’ 글귀의 결합
(시사저널=김지나 도시문화칼럼니스트)
요즘 제주도를 찾는 사람들의 방문 위시리스트에 전에 없던 새로운 이름이 등장했다. '스누피가든'이다. 개장한지 이제 만 3년으로 작년에 이미 누적 방문객 100만 명을 달성했다. 아기자기한 정원들이 콘셉트에 따라 이어지고 중간 중간 귀여운 만화 캐릭터가 등장해 미소를 자아낸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시절에도 넓은 야외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어 복잡한 실내를 피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좋은 대안이 됐다.
원래는 수목원을 만들던 자리였다고 한다. 그런데 제주도를 찾는 사람들이 오름이나 곶자왈처럼 천연의 숲을 선호하는 것을 보고, 공간을 기획하던 조경가는 단지 '자연'을 경험하는 것 이상의 콘텐츠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해답은 곧 그 자신이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만화에서 찾았다. 그것이 바로 스누피가 등장하는 만화 '피너츠'였다.
만화 캐릭터가 공간과 결합된 사례는 많다. 디즈니랜드가 대표적이며 국내에서는 타요, 뽀로로 등 국산 만화캐릭터들의 열풍을 앞세운 테마파크가 문을 열었다. 작년 11월에 개장한 일본의 지브리 파크도 단연 화제다. , 를 만든 바로 그 애니메이션 제작사의 작품들을 모티브로 한 곳이다. 대체로 방문객들이 좋아하는 캐릭터와 함께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명백히 현실에서 벗어난 가상의 공간이다.
스누피가든은 조금 다르다. 만화 주인공들을 테마로 조성해놓기는 했으나 작품 내용을 재현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스누피가든이라는 이름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듯 이곳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수목들이다. 또한 대부분 제주를 대표하는 종들로 공간을 채우고 있다. 구좌읍에서 유명한 비자나무, 중산간지역 방풍림을 형성하고 있는 삼나무,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현지식당에서 차로 끓인 것을 맛볼 수 있는 녹나무, 그리고 하귤밭과 동백숲까지, 제주의 자연이 축약돼 녹아들어가 있다.
"오늘 오후는 쉬어라"…쉼 권하는 공간
스누피가든이 성공할 수 있었던 핵심은 역시 '스누피'라는 테마지만 그것은 단지 만화 원작이 재밌어서, 혹은 캐릭터가 매력적이어서만은 아니다. 스누피 이야기는 이 공간이 지향하는 장소성을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있고 더 나아가 제주의 지역 특성과도 조화를 이룬다. 그것은 바로 '휴식'이다.
스누피가든 곳곳에는 원작에 등장했던 명언들이 다양한 형태로 전시돼 있다. 만화 연재가 시작된 것이 무려 1950년대이지만 세대와 국적을 불문하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구절들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스누피를 창조한 작가 찰스 슐츠를 가리켜 '시인'이라 표현했으며 그의 작품은 그림 형태로 그려진 '시'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방문객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스누피 가든 하우스에 들어서면 원작 고유의 네 컷 만화가 벽면에 이어진다. 아인슈타인의 명언으로 알려진 "어제로부터 배우고(Learn from yesterday), 오늘을 살고(Live for today), 내일을 희망하라(Hope for tomorrow)"란 구절을 스누피가 떠올리는 장면이다. 하지만 마지막 컷에서 스누피는 다시 집 지붕 위에 누우며 이렇게 생각한다. "오늘 오후는 쉬어라(Rest this afternoon)." 그리고 그 옆에 폐쇄공포증이 있어 늘 개집 위에서 자는 스누피의 앙증맞은 모형이 자리한 미니가든이 조성돼 있다.
도심 아닌 제주이기에 더 와 닿는 스누피 메시지
야외 가든에 놓인 벤치에는 "가끔은 햇볕을 쬐며 누워 있을 때 최고의 아이디어들이 떠오르기도 하지"란 글귀가 잠시 쉬어가길 처한다. 이렇게 대놓고 휴식을 권해주면 그 말만으로도 위로를 받는 것이 현대인들이다. 스누피의 '귀여운 게으름'은 휴식이 간절한 방문객들 마음을 찰떡 같이 이해해준다. 가까운 자연 속에서 일상에 쉼을 선사하는 '가든(정원)'이란 형식도 그래서 더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국내 최초로 스누피 라이센스를 따낸 데에는 이런 기획이 한몫 했을 테다.
스누피가든이 도심 한 가운데 만화 캐릭터만을 강조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면 이 정도로 인기를 끌 수 있었을까. 중요한 것은 콘텐츠가 담고 있는 이야기가 공간을 통해 전달될 수 있는가다. 단지 사진 찍기 좋은 곳, 아이와 함께 가볼만한 곳을 넘어서 원작의 스토리와 의미를 공감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내는 것이 성공의 키워드다. 앞으로도 문화콘텐츠를 공간으로 구현할 때 무엇을 고려해야하는지 배울 수 있는 좋은 사례로 남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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