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머니는 하녀, 심지어 소녀였다”...잡종으로 불린 사내, 이중간첩으로 살다 [나쁜 책]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3. 7. 28.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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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서기행, 나쁜 책-3] 비엣 타인 응우옌 ‘동조자’

책읽기의 자유는 기나긴 싸움의 결과였습니다. 지금은 책방 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가지만 과거엔 책장에 꽂아두기만 해도 죽임을 당했던 책이 있었습니다. [금서기행, 나쁜 책]은 전 세계 현대의 금서를 여행합니다. 국가가 발행을 중단시킨 문학, 좌우 논쟁을 촉발한 논픽션, 외설의 누명을 쓴 예술, 동서고금의 필화 스캔들을 다룹니다.
비엣 타인 응우옌
독방에 주인공이 갇혀 있습니다. 폭 3m, 길이 5m 방에 갇힌 주인공은 방대한 분량의 자술서를 작성하는 중입니다.

자술서에 따르면 주인공의 아버지는 프랑스인, 어머니는 베트남인이었습니다. 그는 ‘사생아’였습니다. 가톨릭 신부였던 아버지의 베트남 체류 시절, 아버지의 하녀(심지어 ‘소녀’)였던 어머니 몸에서 그가 태어났거든요. 어린 시절부터 주인공은 이렇게 불렸습니다. “잡종 새끼, 잡종 새끼.”

성인이 된 주인공은 미국으로 건너가 최고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리고는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에 파견된 CIA 비밀요원이 됩니다. 그런데 그는 사실 북베트남 공산당이 몰래 숨겨둔 ‘이중간첩’이기도 했습니다.

박찬욱 감독이 해외 드라마로 제작 중인 장편소설 ‘동조자(The Sympathizer)’ 의 설정입니다. 이 소설은 2016년 퓰리처상 수상작이지만 작가의 모국 베트남에선 읽을 수 없습니다. 왜 이 책은 금서일까요?

소설 ‘동조자’ 영어판(퓰리처상 기념판)과 한국어판. 한국어판 표지 라이터에 새겨진 영문 문구가 인상적입니다. 이 기사는 이 책을 저본 삼았습니다.
북(北)베트남 이중간첩이 된 혼혈 스파이
혼혈인 주인공은 9세 때 베트남 난민선에서 표류했던 ‘보트 피플’이었습니다. CIA 고위직 간부 ‘클로드’는 영어실력이 제법인 주인공의 재능을 알아챘습니다. 클로드는 주인공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주인공은 미국 스파이로 교육을 받습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이 터지자 전선에 투입됩니다.

그는 남베트남(자유주의 계열) 최고위직 장군의 빌라에서 아침식사를 함께 합니다. 주요 업무는 긴급 공문 작성이었습니다. 장군의 유능한 부관인 그는 CIA 비밀요원 역할도 동시에 수행합니다.

그러나 주인공의 정체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9세 이전에 북베트남(공산주의 계열)의 지시를 받고 잠입했던 공산당 소속 간첩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장군의 충성스러운 참모, 한꺼풀 벗겨보면 CIA 요원, 속내까지 들여다보면 공산주의자 이중간첩인 인물이었지요.

소설은 주인공과 장군이 베트남을 떠나 미국령 괌으로 가는 장면에서 본격 시작됩니다. 북베트남 18개 사단이 남베트남 도시 사이공을 포위합니다. 주인공과 장군은 수백여 명의 난민과 함께 미군 수송기에 탑승합니다.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피난 행렬이었습니다(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으로 남베트남 멸망).

1975년 4월 30일 베트남 사이공 함락 직후 베트남 난민들이 미 해군 수송기로 이동하는 실제 모습을 담은 사진. 사이공 함락으로 남베트남은 소멸됐습니다. 이후 도시 사이공은 호치민으로 개명됐습니다. [미 해병대·Wikimedia Commons]
괌 난민 수용소 생활을 거쳐 남베트남 군인들은 미국 본토로 수송됩니다.

용감했던 남베트남 전사들은 영광을 뒤로 하고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악명 높았던 장군은 피자 가게를 ‘호령’하는 촌부가 됩니다. 병참 담당이었던 대령은 건물 잡역부, 무장 헬리콥터를 조종하던 늠름한 소령은 정비공, 게릴라를 추적하던 대위는 즉석요리 전문 요리사, 보병 중대의 유일한 생존자인 중위는 배달부가 됐습니다.

이들 패잔병들은 고깃국물을 팔고, 벽돌을 운반하고, 즉석요리를 판매하며 모은 자금으로 고국 베트남에 다시 ‘쳐들어갈’ 준비를 합니다. 주인공은 과연 CIA와 베트콩 사이에서 안전할 수 있을까요.

미국식 블랙유머로 담은 정체성의 문제
베트남계 미국인인 비엣 타인 응우옌이 쓴 소설 ‘동조자’의 위상은 문학사적으로도 매우 높은 가치를 갖습니다.

베트남 전쟁을 다룬 소설이나 영화는 많았습니다. 한국에서도 황석영 ‘무기의 그늘’, 안정효 ‘하얀 전쟁’ 등이 대표적이었죠. 하지만 미국에선 베트남 전쟁이 패전이었기에 잘 다뤄지지 못했습니다. ‘동조자’는 베트남계 미국인의 시각으로 쓴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소설입니다.

하지만 단지 작가의 국적만이 이 소설의 특징은 아니었습니다.

응우옌 작가는 인종(프랑스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종교(가톨릭 금기인 신부의 정사로 태어난 사생아), 이념(CIA 비밀요원이자 북베트남이 심은 고정간첩) 등 모든 차원에서 ‘혼종’의 정체성을 사유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베트남에서도 주변인이고 미국에서도 주변인, 남북 어디에서나 강하게 의심을 받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 언어로 번역된 소설 ‘동조자’. 윗줄 왼쪽 부터 시계 방향으로 독일어판, 스페인어판, 이탈리어판, 프랑스어판, 포르투갈어판, 중국어판입니다. 그러나 작가의 모국이었던 베트남에서는 출간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자술서에서 끊임없이 농담을 건넵니다.

전쟁에 관계된 거의 모든 사람들을 주인공은 비웃습니다. 베트남을 조롱하고, 미국을 비꼬고, 자신들을 식민지 삼았던 프랑스를 냉소합니다.

주인공의 유쾌한 조소는 내밀한 자학 개그에 가깝습니다. 이런 문장들이지요. 무수히 그은 밑줄 중 일부입니다. (이 소설은 거의 전체가 1인칭 문장입니다.)

① [주인공이 미국에 도착해 서양식 좌변기에 처음 앉는 장면] “나는 어린 시절 내내 둘로 조각나 있는 변좌에 앉았고, 내가 자세를 취하면 식탁에서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던 메기들을 생생히 기억했습니다. (중략) 서구 세계가 뒤를 닦는 종이는 나머지 세계가 코를 푸는 종이보다 부드러웠습니다. 비록 이런 비교는 그저 은유일 뿐이기는 하지만요. 나머지 세계는 심지어 코를 푸는 데 종이를 사용한다는 사치스러운 생각에도 놀라 자빠졌을 겁니다.” (264쪽)

②[베트남인들이 미국에서 이산가족이 된 직후의 장면] “만일 함께 지낼 수만 있었다면 우리는 어지간한 크기의 자급자족적 공동체, 즉 미국이라는 정치적 통일체의 엉덩이에 난 뾰루지 같은 집단을 만들 수가 있었을 겁니다. 우리는 함께 지내는 것을 허락 받지 못하고, 관료주의적 결정에 의해 새로운 세계의 모든 경도와 위도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125~126쪽)

③ [주인공이 소년 시절 첫 수음을 회상하는 장면] “나는 열병에 걸릴 듯했던 청소년기 이래로 줄곧 왕성한 기력으로 부지런히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거짓 기도를 드릴 때 십자가를 긋던 바로 그 손을 사용해서요. (중략) 나는 최초의 비정상적인 행위를 열세 살에 어머니의 부엌에서 훔쳐 낸, 내장이 제거된 오징어 한 마리와 저질렀는데 놈은 친구들과 함께 자신의 진정한 운명을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아, 말 못하는 불쌍하고 순결한 오징어여!” (141쪽)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한 장면. 베트남 전쟁의 비이성과 부조리, 그리고 인간의 참혹한 운명을 고발한 걸작입니다. [배급사 디스테이션]
물 고문에 전기 고문··· ‘공산당 고문기술 백과사전’
자국계 출신인 미국인 작가가 해외에서 큰 상을 받을 경우 그 나라가 떠들썩하게 자축하는 건 인지상정입니다. 2017년 일본 출생의 영국인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 일본 열도가 들썩였던 것처럼 말이죠.

소설 ‘동조자’는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성적으로 파문을 일으킬 만한 요소가 가득한 소설입니다. 그럼에도 미국 최고의 저술상인 퓰리처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응우옌 작가의 ‘동조자’는 정작 베트남에선 금서입니다. 이유는 두 가지로, 첫 번째 이유는 공산당 모독이 반복 서술되기 때문입니다.

응우옌 작가는 CIA 간부 ‘클로드’와 남베트남 장군의 대화 장면에서 베트콩 공산주의자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저 개같은 공산주의자 새끼들이···.” (157쪽)

또 주인공은 미국에서 은인인 해머 교수를 만나는데, 해머 교수는 과거 공산주의자였다가 전향한 인물이었습니다. 주인공이 해머 교수에게 묻습니다.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것을 후회하시나요, 교수님?” 그러자 해머 교수는 답합니다. “아니, 그렇지 않아. 결과적으로 그 실수를 저지른 덕분에 오늘날의 내가 될 수 있었어.” (180~181쪽)

베트남 전쟁을 다룬 영화 ‘플래툰’의 한 장면. [이언픽쳐스]
“누군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바로 나였다”
공산주의자들이 주인공을 고문하는 마지막 장면도 잔혹하게 그려졌습니다.

주인공은 공산당을 위해 정보를 전달하는 업무를 평생 담당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조국 북베트남에 돌아갔을 때 아무도 그를 동료로 환대하지 않습니다. ‘미국 사상에 물들었다’는 이유에서였죠.

공산주의자들은 주인공의 옷을 전부 벗겨 매트리스 위에 눕힙니다. 기절할 듯이 졸린 주인공이 잠들려 할 때마다 여러 고문기술자들이 돌아가며 주인공을 발로 툭툭 건드립니다. 절대 잠들지 못하게 하려는 수면 고문이었죠. 아주 환한 조명을 켜서 그의 얼굴을 비추며 괴롭히기도 합니다.

또 그들은 소련이 선물한 혈청을 그에게 주사합니다. 9볼트 배터리 전선을 그의 귀에 꽂아 전기로 고문합니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그의 목구멍으로 물을 붓기도 하지요. 주인공은 미쳐버리기 직전까지 갑니다. “제발 잠 좀 자게 해줘!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어!”라고 비명을 지르는 주인공의 마지막 요청을 공산당 비밀 정치위원은 들어주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나는 그것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나는 그것이 누구인지 알았다. 그것은 바로 나였다.” (626쪽)

비엣 타인 응우옌 작가의 또 다른 소설과 해외 번역본들.
호치민을 ‘히틀러’로 빗댄 작가의 패기
사실 응우옌 작가의 비판은 공산주의자만 겨냥하진 않았습니다.

베트남을 식민지화했던 프랑스도 강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고, 패망을 앞두고 무능하고 부패했던 남베트남도 무책임한 정부로 비판 받습니다. 패망한 장수인 ‘장군’이 난민들에게 슬리퍼로 뺨따귀를 때려 맞는 장면도 그려지지요.

그런데도 미국은 이 소설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했고, 베트남은 이 소설을 하대했습니다. 왜일까요.

응우옌 작가에게 이메일을 보내 봤습니다. 며칠 뒤 긴 답장이 도착했습니다. 원문을 옮겨 적어 봅니다.

[ 응우옌 작가 이메일 답신 전문 (2023.7.10. 답신) ] “베트남 정부에 ‘금지 도서 목록’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목록을 공개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베트남 출판사는 2016년부터 소설 ‘동조자’의 번역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출판하지 못했습니다. 베트남 출판사는 출판 허가를 위해 정부가 승인한 다른 출판사의 허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출판사도 출판하지 않았습니다. 공산당, 공산주의 활동, 호치민에 대한 소설의 묘사 때문에 출간아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는 내가 이 소설에서 공산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이 남베트남, 미국인 또는 자본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비판, 또는 공산주의의 일부 실패나 한계에 대한 현실적인 묘사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특히 베트남에서 호치민은 전혀 다룰 수 없습니다.” “I do not know if the Vietnamese government has a list of banned books. I don’t think that is made public. However, my Vietnamese publisher has had a translation of the novel since about 2016, and has not been able to publish it. The publisher needs permission from other publishing houses authorized by the government to give permission to publish, and none of these publishing houses have done so. The novel’s depiction of the communist party, communist activities, and Ho Chi Minh. I don’t think anything that I say about communism is worse than anything I say about the South Vietnamese, the Americans, or capitalism. But negative criticisms of communism, or even just what I would consider realistic depictions of some of communism’s failures or limits, are controversial. Ho Chi Minh cannot be touched at all.”

응우옌 작가가 밝혔듯이, 소설에서 베트남의 국부로 통하는 호치민을 직접적으로 비판한 대목이 이 소설이 베트남에서 출판이 금지된 가장 큰 이유일 겁니다.

소설에서 미국에 도착한 베트남 난민들은 미국인이 버린 고급의상을 주워 입고 정치적 항의 성명이 적힌 알림판을 들고 있습니다.

그들의 손에 든 알림판에는 “호치민=히틀러?”, “우리 국민에게 자유를!”(390쪽)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응우옌 작가와 같은 베트남 보트 피플이 바라보기에 호치민은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습니다. 호치민은 반대파를 탄압했고 민간인 학살에 책임이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1인 5역’
드라마 시리즈 ‘동조자’에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오른쪽)가 캐스팅 됐습니다. 그가 무려 ‘1인 5역’으로 등장합니다. 왼쪽 남성은 드라마 주인공인 호아 쉬안데 배우. [HBO]
하지만 2024년 드라마 시리즈 ‘동조자’가 HBO를 통해 세계에 공개되면 소설 ‘동조자’에 대한 베트남 내 관심도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칸영화제를 비롯해 세계의 영화상을 수상한 거장 박찬욱 감독이 연출하는 데다 영화 ‘아이언맨’으로 잘 알려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무려 1인 5역을 맡았기에 더 화제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박 감독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동조자’를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정이 느껴지는 한 마디이지요.

“어떤 작품을 하겠다고 결정할 때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야 하고 잘할 수 있다는 확신도 있어야 하는데 ‘동조자’는 그런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박 감독의 작품은 소설을 원작 삼은 작품이 많습니다. 영화 ‘아가씨’ ‘공동경비구역 JSA’는 소설이 원작이고 ‘올드 보이’도 일본 만화가 원작이었지요. 이번 ‘동조자’에 그는 어떤 색깔을 입힐까요.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HBO 드라마 시리즈 ‘동조자’의 예고편 모습. [HBO 예고편 캡처]
이 소설의 제목 ‘동조자’는 영어로 ‘The Sympathizer’입니다. ‘동조하는 사람’이란 뜻이죠. 동조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공감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도 합니다. 주인공은 이념적으로 좌든 우든 어느 쪽에나 쉽게 공감합니다. 주인공의 운명(이중간첩 지시)은 이미 9세 이전에 정해졌습니다. 인종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종교적으로든 주인공은 양쪽 모두의 의견에 쉽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던 한 ‘혼종’ 베트남인 운명을 상징하지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보트 피플’ 형제
비엣 타인 응우옌 작가의 개인적 삶을 좀 더 살펴 볼까요.

4세 때 미국으로 건너간 보트 피플 출신인 그와 그의 형은 ‘아메리칸 드림’을 현실로 바꿔낸 신화적 인물들입니다. 응우옌의 형은 미국 행정부에서 백악관 자문위원회를 이끌었던 의사로 여러 매체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응우옌 소설가 본인은 UC버클리에서 영문학과 민족학 학위를 받은 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에서 강의하는 교수입니다.

4세 때 미국으로 갔던 보트 피플의 후예는 자기 자신이 역사 속에서 누군인지를 정확히 바라봄으로써, 또 과거와 현재의 연결선상 위에서 스스로를 잊지 않음으로써 현재의 자리에 섰습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명언을 떠올리게 하지요.

2016년 퓰리처상 소설 부문 수상 당시 응우옌 작가의 모습. Lee C. Bollinge 콜롬비아대 총장이 그에게 상을 수여했습니다. [퓰리처상 홈페이지]
응우옌 작가의 작업은 그의 2023년 강의계획서에도 자세합니다. 비엣 타인 응우옌 ‘교수’의 연구 주제는 베트남 전쟁 생존자들과 그 후손들’입니다. 아시아계 미국인 문학, 베트남 전쟁과 기억, 타인으로서의 글쓰기 등 강의에서 다룹니다. 즉 ‘베트남 디아스포라’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디아스포라(Diaspora)란 특정 민족이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자신이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집단을 형성하는 것을 뜻합니다. 재일교포(마이니치)를 다룬 이민진 소설 ‘파친코’, 윤여정 배우가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영화 ‘미나리’ 등이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디아스포라 작품이지요.

대학 교수이기도 한 응우옌 작가는 홈페이지 ‘언 아더 워 메모리얼 닷컴’에 베트남전쟁 생존자들 인터뷰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홈페이지에서 인물 사진을 클릭하면 베트남 전쟁 당사자 혹은 후손이 겪은 전쟁의 참상이 프로파일링 되어 있습니다. 붉은 원 안의 여성의 이름은 ‘샬럿 던’으로, 그녀는 베트남어를 한 마디도 못하지만 베트남 전쟁을 경험한 부모 밑에서 성장한 베트남계 미국인입니다.
응우옌 교수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실제 베트남전쟁 생존자들을 인터뷰해야 합니다. 학생들과 공동으로 작업한 인터뷰는 ‘언 아더 워 메모리얼 닷컴’이라는 사이트에 DB로 구축됩니다.

‘동조자’의 주인공은 이처럼 수많은 베트남인의 비극적 운명을 응축한 캐릭터였던 것이지요.

비엣 타인 응우옌 작가의 개인 홈페이지. 4세 때 미국으로 갔던 보트 피플의 후예는 자기 자신이 역사 속에서 누군인지를 정확히 바라봄으로써, 또 잊지 않음으로써 현재의 자리에 섰습니다.
식민지화 이후 대규모 전쟁, 그리고 그 전쟁이 좌우 이념 간의 대리전이었다는 점에서 이웃나라 베트남은 대한민국과 여러 면에서 닮아 있습니다.

베트남은 미국의 패전으로 우리나라와는 다른 길을 갔지만 말이죠.

저는 ‘동조자’에서 주인공의 독백을 읽는 내내 최인훈 소설가의 대표작이자 20세기 최고의 한국소설인 ‘광장’ 속 이명준을 떠올렸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가 과연 저뿐일까요?

한 국가가 치른 전쟁은 영구적인 상처를 남깁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 전쟁의 상흔은 거의 ‘낡은 것’ ‘오래된 것’으로 치부되어 망각되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비엣 타인 응우옌 작가의 소설과 문장은 여전히 현재적입니다. ‘헌신자’ ‘난민들’ 등 후속작 소설이 출간 때마다 큰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한국문학에서도 응우옌과 같은 작가들이 장대한 역사소설로 세계 문학과 길항하는 때를 기다려 봅니다. 슬픔은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질 뿐, 낡아지는 감정은 결코 아니니까요.

더 읽어볼 가치가 큰 응우옌 소설과 관련 글 ◎ 비엣 타인 응우옌, 김희용 옮김, 《헌신자》, 민음사, 2023. (《동조자》의 속편입니다.) ◎ 이경재, 《한국 베트남 미국의 베트남전 소설 비교: 국가 정체성 젠더를 중심으로》, 역락, 2022. (베트남 전쟁에 관한 베트남·한국·미국의 소설 전수 분석 서적) ◎ 응우옌 작가의 뉴욕타임즈 기고문. (https://www.nytimes.com/2022/01/29/opinion/culture/book-banning-viet-thanh-nguyen.html)

※ 다음 주에는 최근 타계한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 장편소설 <농담>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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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에게 펼쳐진 책과 같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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