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는 역사의 원동력… 억제할때 인류는 퇴보한다[북리뷰]
샘 밀러 지음│최정숙 옮김│미래의 창
10만년전 전세계로 퍼진 인류
페니키아·그리스·로마제국 등
이주를 통해 찬란한 문명 이룩
최근 이주민 탄압·장벽 등 현안
열린 마음·환대로 받아들여야
문명 진화 혜택 함께 누리게 돼
오늘날 인류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더 멀리, 더 자주, 더 쉽게 고향을 버리고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국경 내에서 삶터를 옮기는 이주는 물론이고, 국경을 넘나들면서 살아가는 이민조차도 매우 자유롭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의 대립으로 경제가 침체에 빠지자 이주민을 향한 인종주의적 공격과 탄압, 장벽 세우기도 세계적으로 유행이다. 이주민 문제는 오늘날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문제의 하나이다.
영국 작가 샘 밀러의 ‘이주하는 인류’에 따르면, 이주는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이고, 인간 경험의 근원을 이루는 자질이다. 인류가 평생 한 지역에 머무르면서 정주민으로 사는 일은 예외적 현상이다. 약 1만2000년 전 농경 생활 전까지 인류는 모두 떠돌이로 살았고, 400년 전만 해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유목했다. 이 엄연함을 망각하고 정주를 정상으로 여기는 걸 저자는 ‘이주 기억상실증’이라고 부른다.
저자는 이주민을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옮겨간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기후 변화, 자원 부족, 영토 분쟁 등 이주 이유는 다양하다. 그러나 왕성한 호기심과 방랑벽, 지평선 너머에 있는 것을 떠올리는 상상력이야말로 인류 이주의 진짜 이유일 수 있다. 인류의 약 20%는 ‘호기심 유전자’를 타고난다. 이들은 차별과 편견을 무릅쓰고 위험과 고난의 강물에 뛰어든다.
이주민을 막으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제국주의 국가는 경기가 흥할 땐 이주를 장려하고 경기가 나쁠 땐 장벽을 높이곤 했다. 그러나 추방, 감금 등 어떤 조처도 이주자를 이기지 못했다. “50피트짜리 법을 보여줘. 그럼 난 51피트 사다리를 보여주겠어.” 금지는 이주자의 창의력을 북돋워 이주 활성화로 이어졌음을 역사는 반복해서 보여준다.
약 50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이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로 이주해 새 터전을 일구었다. 이들은 언어를 사용하고 병자를 돌보는 등 문명의 서막을 열었다. 약 10만 년 전, 두 번째 대규모 이주가 시작됐다. 호모 사피엔스는 걷거나 배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네안데르탈인 등 호모속 사촌들을 무찌르고, 혈족으로 흡수함으로써 유일한 인류로 남았다.
상인의 영혼을 타고난 페니키아인은 고향을 떠나 카르타고 등으로 살림을 옮길 줄 알았기에 지중해 패자가 되었다. 고대 그리스엔 두 얼굴이 있었다. 아테네인은 추방을 처벌로 생각하고 거류외국인을 차별했다. 그러나 그들의 친족인 밀레토스인 등은 마르세유, 나폴리 등 지중해 곳곳에 270곳 이상 정착지를 건설했다. 이들은 떠돌이 영웅 오디세우스를 사랑하고, 정복 군주 알렉산드로스를 찬미한 이주의 달인이었다. 히브리 문명은 노아, 모세, 아브라함 등 이주의 역사가 이룩한 고난의 결과로 구약 성경은 이주 지침서나 다름없다.
새로운 이주민의 등장은 역사적 대격변의 시작이었다. 우크라이나 땅에 살던 고트인은 흉노에게 밀려 유목지를 옮기는 도중 자신들을 수용소에 가둔 채 굶주리게 방치한 로마 제국을 무너뜨렸다. 상인 출신으로 이슬람을 일으킨 무함마드는 무하지르(muhajir), 즉 이주민이라고 불렸다. 탄압을 피해 고향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옮겨간 난민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에서 세력을 일으켜 아랍 세계 전체를 지배할 힘을 얻었다. 난민을 무시하고 잔혹하게 대하면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고, 관용과 환대는 언제나 미래 번영의 기틀이 되었다.
이주의 역사는 뛰어난 항해술로 세 대륙을 왕복한 바이킹, 대서양 항로를 개척한 스페인인, 노예선에 실려 아메리카로 강제 이동한 아프리카인, 신대륙에서 새 삶을 찾아 나선 중국인과 남동부 유럽인 등 현재까지 꾸준히 이어진다. 저자는 앞으로 이주 문제가 세계의 핵심 과제가 되리라고 말한다. 저출산에 시달리는 선진국은 일손 부족을 메우려 더 많은 이주민을 필요로 하고, 기후 변화로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 난민들은 이동하면서 기존 사회 질서와 충돌하는 등 고트족 같은 첨예한 갈등을 일으킬 테다.
트로이 난민 아이네이아스는 ‘약속의 땅’ 이탈리아로 이주해 후에 ‘세계의 주인’이 될 첫 번째 로마인이 되었다. 이주의 역사에선 이런 일이 흔히 벌어진다. 국경과 여권이 상징하는 정주 문명의 압제에 젖어 인류 본연의 욕망인 이주를 억제하려 할 땐 문제를 절대 해결하지 못한다. 열린 마음과 환대의 정신으로 이주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이주민이 일으키는 문명 진화의 혜택을 함께 누릴 수 있다. 424쪽, 1만9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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