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역사문화 리포트] 14. 우산국, 이제는 나라(國)가 아닌 섬(島)이다

최동열 2023. 7. 28.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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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산국의 옛터인 울릉도 해안 전경.

■11세기 동여진족 침략으로 우산국(울릉도) 황폐화

-고려 조정에서 농기구를 보내는 등 구호 조치 시행

11세기, 우리 동해안과 대마도 등 동해권역을 공포에 떨게 한 동여진족들의 약탈 폐해는 주민 생활을 극도의 불안과 피폐로 몰고 갔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동해 한가운데에 있는 섬, 울릉도였다. 울릉도는 동여진족의 침략으로 섬의 기반이 송두리째 파괴되다시피 했다.

울릉도의 피해상을 가늠할 수 있는 기록이 고려사에 나온다. ‘우산국(울릉도)이 동북 여진족의 침략을 받아 농업이 황폐화되므로 이원구(李元龜)를 파견해 농기구를 하사했다’는 내용이다. 현종 9년(1018년) 11월 기록이다.

구호 조치는 보통 어떤 지역이 큰 피해를 입은 사실을 파악하고 나서야 이뤄지는 게 상식이다. 고려 조정에서 관원을 파견해 농기구를 보내줬다는 기록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동북 여진족 해적들의 우산국 침입은 그보다 한참 먼저 자행됐다고 봐야 하겠다. 1019년 대마도를 초토화하고, 일본 규슈까지 들이친 여진족들이 그 전에 이미 울릉도를 들이쳐 쑥대밭으로 만드는 만행을 자행한 것이다.

▲ 동북 여진족 침입으로 농업이 황폐화된 우산국에 농기구를 하사했다는 고려사 기록(현종 9년 11월).<규장각 소장 고려사>

그 시기 여진족들의 침략은 우산국과 대마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고증을 위해 사서(史書)를 더 살펴보면, 여진족들의 동해안 침략은 고려 현종 2년(1011년) 8월에 100여척의 배를 타고 경주에 쳐들어온 것을 시작으로 11세기 내내 동해안 전역을 대상으로 계속된다. 피해 지역 또한 덕원 안변 통천 고성 양양 강릉 삼척 평해 흥해 청하 영일 경주에 이르기까지 동해 연안 곳곳이 거의 빠짐없이 들어있다. ‘명주(溟州) 관내의 삼척, 우계 등 19개 현이 번적(蕃賊·여진족)의 침탈로 주민 생활이 매우 곤궁해져 조세를 감면해줬다’는 고려사 기록에서도 여진족들의 침략 범위가 매우 광범위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진족들의 만행으로 섬이 농사를 짓지 못할 정도로 피폐해지자 우산국 주민들의 탈출 행렬도 이어졌다. 이즈음 고려사에는 울릉도 주민들이 강릉, 양양, 삼척, 울진 등 강원도 연안 지역과 경상북도 해안인 예주(禮州·현재의 경북 영해, 영덕, 평해 일원) 연안으로 숱하게 도망쳐 나왔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우산국 주민들의 엑소더스 행렬은 1019년 7월이 되어서야 다소 안정된다. 고려사 현종 10년(1019년) 7월조에 ‘여진의 침략을 받고 (육지로)도망해 왔던 우산국 민호(民戶·백성)들을 돌아가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앞서 그해 4월에 고려 수군이 진명(鎭溟), 즉 원산 남쪽 바다에서 여진족들과 일전을 벌여 대승을 거둔 직후이다. 대마도를 초토화하고 남녀 포로 수백명을 끌고 동북지방으로 돌아가던 여진족들의 길목을 막고 기다리던 고려 수군에게 대패하고, 여진족들의 발호가 주춤해지자 도망쳐 나온 우산국 백성들을 돌려보내는 조치가 취해진 것이다.

■여진족 침략으로 우산국 존립 기반 파괴

-우산국 백성들 상당수 육지에 정착
-이후 우산국 명칭 완전히 사라지고, 섬(島)으로 표현

▲ 여진의 침략으로 인해 육지로 도망나왔던 우산국 민호(백성)들을 돌아가게 했다는 고려사 기록(현종 10년 7월).

그러나 육지로 도망쳐 나왔던 우산국 민호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고려사 현종 13년(1022년) 7월 기록에는 ‘도병마사가 우산국인으로 여진족에게 노략질 피해를 입어 (육지로) 도망 나와 있는 자들을 예주(禮州)에 살게 하고, 물자와 식량을 주어 편입시키자(현종 13년 7월 병자조)고 상주하니 왕이 그대로 시행토록 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예주는 현재의 경상북도 북부 해안지역이다.

육지로 도망쳐 나온 우산국 백성들을 섬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그대로 정착하도록 한 것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11세기 초 여진족들에 의한 동해상의 공포 상황이 1018년∼1019년 한두 해에 그친 것이 아니었기 때문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여진족의 침략을 받아 섬이 피폐해지고, 많은 백성이 살길을 찾아 육지로 도망쳐 나가고, 그들 중 상당수가 육지에 그대로 눌러 앉아 정착하는 상황은 우산국, 즉 울릉도의 세력을 급격히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외침이 빈번하고, 인구가 격감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면 어느 곳이나 그 존립 기반이 심각하게 흔들리게 마련이다. 우리는 이 시기에 우산국이라는 명칭이 역사서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즉, 고려 현종 연간까지 ‘섬(島)’이라는 표현과 함께 나라를 의미하는 ‘국(國)’으로도 종종 병행 표기되던 우산국은 이 시기를 끝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후에는 주로 우릉도(羽陵島), 우릉도(芋陵島), 무릉도(武陵島)나 우릉성주(羽陵城主·덕종 1년(1032년) 11월 고려사 기록) 등의 표현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결국 서기 512년 신라장군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이후 종속관계를 맺고 신라·고려의 영향 아래 발전해 온 우산국은 1018년 즈음에 대마도와 일본 규슈 지방까지 유린한 동여진족들의 공격을 받아 급격히 약화하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됐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다.

▲ 우릉성주가 토산물을 바쳤다는 고려 덕종 1년의 고려사 기록. 우릉성주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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