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준비가 된 자는 무엇이든 고맙게 받아들인다

한겨레 2023. 7. 28.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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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월간 풍경소리]

픽사베이

#엄정 집 뒷방에 걸려있던 무위당(无爲堂) 선생 대나무 그림을 현관 신발장 앞에 옮겨놓고 신 신고 벗을 때마다 화제(畫題)를 되새긴다. “버릴 것은 사람의 꾀부리는 마음이라, 하늘과 땅의 길이란 자연일 따름이니[忘事巧心也天地道也者自然而矣].” …자연으로 돌아가려고 애쓸 것 없다. 간교한 마음만 버리면 곧 자연이니까. 이토록 간단하다. 사람의 꾀부리는 마음이란 원천적으로 인위(人爲) 곧 거짓[僞] 아닐 수 없으니, 꾀부리는 마음이 들 때마다 그것이 거기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붙잡아서 그것에 휘둘리지 말고, 그냥 놔두는 거다. 그때 사람을 대신하여 자연이 마음을 쓴다. 전통적인 교회의 언어로 말하면, 네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너로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이신다는 얘기다. 버려라, 얻는다. 아멘.

#사진틀 속의 눈 쌓인 언덕 위로 잿빛 벌레 한 마리 고물고물 기어간다. 벌레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눈이 녹고 풀이 돋고 꽃들이 피어난다. 다시 보니 벌레가 아니라 웬 계집아이다. 그런데 눈 깜박할 사이에 아이가 길에서 어긋났다. 어떻게 어긋났는지 알 수 없지만 어긋난 것만은 분명하다. 어어? 하는데 보이지 않는 손에 납치된 듯 아이가 사라지고 사진틀 속의 언덕에 다시 눈이 내린다. 거봐, 네가 길에서 어긋나니까 오던 봄이 도로 가지 않니? 이런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꿈속에선지 밖에선지 모르겠다. …자연스럽게 살아라. 자주 듣는 말이지만 오늘은 어쩐지 어색하다. 왜일까? 이유가 짐작된다. 자연스럽게 살라는 말은 자연처럼 살라는 말인데 자연은 살지 않기 때문이다. “천지는 스스로 살지 않는다[不自生)].” 그동안 노자의 이 말을 애써 살려고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새겼는데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실은 그게 아니다. 자연은 그렇게 살지 않고 그렇게 살아진다. 살려고 애쓰지 않는 게 아니라 살려고 하지 않는다. 능동(能動)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고 모두가 완전 피동(被動)이다. 물이 흘러가는 게 아니라 흘러가지는 거다.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게 아니라 나무에서 열매가 맺히는 거다. 사람도 사는 게 아니라 살아지는 거라는 점에서는 한 그루 나무와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사람은 제가 제힘으로 산다고 착각한다. 그러다가 그게 착각인 줄 알게 되고 천지자연처럼 살아지는 대로 산다는 게 어떤 건지를 다시 배우기 시작한다. 여기까지 와야 비로소 나무와 다른 사람으로 되는 거다. 언젠가 목포 디아코니아 모원 ‘십자가의 길’ 산책 중에 “주님, 이 길에서 아무 하신 일이 없잖습니까? 붙잡히고 재판받고 사형선고 당하고 매 맞고 넘어지고 옷 벗기고 못 박히고… 모든 동사가 피동태네요.” 말씀드렸을 때 들려주신 한마디가 새삼스레 다가온다. “그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그 일을 내가 했다.” 아아, 주님. 완전 능동과 완전 피동의 완전 합일인 사람의 사람이여!

1998년에 육필로 옮겨 책으로 낸 키요자와 만시의 ‘겨울부채’를 단숨에 읽는다. 그동안 길에서 어긋나지 않았다며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 같아 가슴이 더워진다. “우리의 참자아란 다른 게 아니다. 모든 것을 무한자의 놀라운 섭리에 맡기고 자기를 현재 상황에 있는 그대로 가만두는 것이다. …죽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은 어떤 음식이나 옷도 허락되는 대로 고맙게 먹고 입는다. 음식이나 옷이 바닥나면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인다. …사람이 자기의 ‘나’를 온전히 비우고 모든 것을 감싸 안는 여래의 큰 바다에 몸과 마음을 던져버릴 때 만사가 여래의 놀라운 역사(役事)로 바뀐다. 그는 선(善)과 악(惡), 시(是)와 비(非) 사이에서 그것들을 분별하는 일 없이 다만 여래의 역사를 목격할 따름이다.” (2023. 5. 2)

#무엇이 그런데 그렇지 않은 줄 알 거나 무엇이 그렇지 않은데 그런 줄 알았으면 속은 거다. 무엇이 이런데 저런 줄 알 거나 무엇이 저런데 이런 줄 알았어도 속은 거다. 아, 참으로 오랜 세월 속아 살았구나. 없는 걸 있는 줄 알고 있는 걸 없는 줄 알았으니. 실은 그게 아니라고, 있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만 없는 것들이고 그것들을 있게 하는 것만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있는 거라고… 면면약존(綿綿若存)이라! 노자가 이 말을 한 게 언제고 루미가 “오직 사랑! 깃대 꽂을 바탕과 바람뿐, 깃발은 아니다!”를 노래한 게 언제였던가? 이제 비로소 그 말의 뜻을 짐작게 되었으니 축하할 일인가? 한탄할 일인가? 우습다, 금방 또 속는구나? 축하할 것도 한탄할 것도 없는 세상이라면서. 그러니 입을 다무는 수밖에. 선생님, 당신에게 그랬듯이 저에게도 이 앎이 저의 삶과 죽음으로 스며들게 해주십시오. 아니, 저의 삶과 죽음이 온통 이 앎의 꽃으로 피어나게 해주십시오. 아멘.

픽사베이

#간밤에 장자(莊子)의 ‘사람소리, 땅 소리, 하늘 소리’를 읽었더니 이런 꿈이 찾아왔나? 아프리카 어디에 가서 여태 잘못 부르던 찬송 한 구절을 고쳐 부른다. 원주민 언어 ‘푸리’를 소리 아닌 뿌리로 읽은 게 오류였다. 그래서 “…교회의 소리를 들어라”가 “…교회의 뿌리를 보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 둘은 완전 다르다. 하나는 삶, 하나는 죽음이다. 소리는 누가 들어야 살고 뿌리는 눈에 띄면 죽는다. 사람이 내는 인위적 소리를 통해서 땅이 내는 자연의 소리를 듣게 되고 자연의 소리를 통해서 하늘이 내는 침묵의 소리로, 소리의 주객(主客)이 합일된 상태로, 들어가는 이것이 이른바 구도자의 길이다. 손에 잡히는 책을 펼치니 중세기 페르시아의 오마르 카얌도 비슷한 말로 한마디 보탠다. “네가 마시는 포도주와 거기 닿는 네 입술이 마침내 모든 것이 소멸하는 무(無)로 된다면, 그렇다, 허깨비였던 너 또한 속절없이 무(無)로 될 터인즉 결코 거기에서 제외될 수 없으리라.” 착각하지 말 것. 열반(涅槃, 니르바나)은 네가 성취할 수 있고 해야 하는 무엇이 아니다. 마침내 너를 삼켜 저와 하나로 되게 할 무엇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 있다는 걸 알면 됐다. 괜한 궁금증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마라.

픽사베이

#나무그늘에 앉아 졸고 있는데 뜬금없이 다가오는 한마디. “…하면서 하지 않고 가면서 가지 않는다. 기차를 보아라. 달리는 기차는 달리지 않는다. 별을 보아라. 순행하는 별은 순행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네가 네 힘으로 무엇을 한다는 착각에서 깨어나라는 말인가? 아니겠지. 누가 있어야 벗어나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하하하, 뭐를 하라는 게 아니라 그런 줄 알고나 있으라는 얘기? 싱겁다. 자리 털고 일어난다.

글 아무개 이현주 목사

***이 시리즈는 전남 순천사랑어린배움터 마루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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