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승엽이한테 연락해 봐야죠" 결승전에 '경험제로' 외야수→투수 투입, 30년 전 '승짱' 우승동기의 기막힌 용병술[청룡기비하인드]
[목동=스포츠조선 정현석 기자]"투수가 없어 걱정이 돼 밤새 잠을 설쳤습니다."
"가장 힘든 고비"로 꼽았던 25일 우승후보 장충고 전. 경기 내내 앞서다 9회말 동점 홈런을 허용한 뒤 10회 결승점을 뽑아 8대7로 가까스로 승리했다. 자신이 선수로 뛰던 1993년 이후 무려 30년 만에 도달한 청룡기 결승전. 감회에 젖을 새도 없었다.
결승전에 던질 투수가 마땅치 않았다. 투구수 제한 규정과 부상 등으로 에이스 전미르를 포함, 박경도 김병준 이종석 등 4명의 투수가 등판할 수 없었다. 반면, 물금고는 상대적으로 주요 투수들의 등판이 가능했다.
야구는 투수놀음. 프로야구 롯데 출신 박정준 코치의 체계적 지도 속에 무장한 물금고 타선은 이번 대회 드라마틱한 역전승을 거두며 강한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선발투수는 장신 우완 이승헌. 하지만 뒤를 맡길 투수가 마땅치 않았다.
"당초 3~4이닝 정도를 맡길 생각이었어요. 104구로 7이닝을 던져줘서 우승할 수 있었죠. 원래 많이 던지던 투수여는데 이번 대회에 체력이 조금 떨어져 뒤에서 짧게 던지도록 했어요. 그런데 어제 연습할 때 보니 볼이 좋더라고요. 오늘 선발로 믿고 맡겨도 되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1m90, 95㎏ 거구의 우완 투수는 7안타 4사구 3개 속에서도 위기마다 날카로운 변화구로 5개의 탈삼진을 잡으며 무려 7이닝을 버텨줬다. 4-0으로 앞서고 있었지만 마무리도 문제였다.
8회 좌완 박성훈을 올렸다. 하지만 1사 후 볼넷, 3루수 실책, 볼넷으로 만루가 됐다. 절체절명의 순간.
이준호 감독은 파격적인 선택을 했다. 2번 좌익수로 선발 출전했던 좌완 박관우를 마운드에 올렸다. 경북고 유니폼을 입고 처음 서보는 마운드. 우려는 현실이 되는듯 했다.
대회 최다안타왕인 물금고 톱타자 공민서에게 밀어내기 볼넷으로 내보내며 첫 실점했다. 4-1에 다시 1사 만루.
타선은 상위타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 감독은 뚝심 있게 '초보투수' 박관우 카드를 밀어붙였다. 볼넷 후 정신을 번쩍 차렸다. 2번 강도경을 허를 찌르는 몸쪽 빠른 공으로 루킹삼진, 3번 고승현을 뜬공 처리하고 위기를 넘겼다.
9회에도 마운드에 오른 박관우는 1사 후 김우성에게 안타 하나를 맞았지만 후속타자를 병살 처리하고 세이브를 거두며 우승 세리머니 투수가 됐다.
경기 후 이준호 감독이 비하인드 스토리를 털어놓았다.
"(박)관우는 투수를 하고 싶어했는데 체격이 크지 않아(1m75,79㎏) 제가 안 시켰어요. 어제 결승전을 준비하면서 혹시나 싶어 연습투구를 시켰는데 공이 괜찮더라고요."
결승전, 최대 위기에 생초짜 투수를 올린 이준호 감독이나 그 부담을 세이브로 바꾼 박관우 모두 대단한 강심장이 아닐 수 없다.
이준호 감독은 투수 부재로 불안했던 마음을 홀로 삭혔다. 절대 선수들에게는 티를 내지 않았다.
"대회 오기 전에 물금고랑 연습경기를 했는데 우리가 10점 차 이상으로 대승을 했어요. 아이들한테 연습경기 한다는 생각으로 편하게 하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결승전이라 부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투수 고민 속 한숨도 못잔 이 감독은 "오늘은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다"며 비로소 웃었다.
삼성 라이온즈에서도 함께 뛰었다. 한양대 대신 프로로 직행한 이승엽 감독과 달리 단국대를 거쳐 1999년 삼성에 2차 12라운드에 입단했다.
입단 첫해부터 날카로운 제구력을 선보이며 불펜 필승조로 맹활약했다. 26경기(선발 2경기) 4승1패 1세이브, 5.0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부상 탓에 이후 9경기를 더 던진 후 은퇴 했다.
이준호 감독은 이승엽 감독과의 30년전 우승 추억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동대문운동장에 학생들도 버스 20대로 나눠 타고 총출동했어요. 야구장이 가득찰 정도였지요. 저는 당시 큰 활약을 못했지만 승엽이가 잘 던져주고 해서 군산상고에 7대3으로 이겼던 기억이 나요. "
여전히 이승엽 감독과 편하게 통화하는 사이. 하지만 결승전을 앞두고는 전화를 자제했다.
"승엽이가 11연승 기간 중이어서 부담스러웠고, 승엽이도 저한테 결승을 앞두고 부담 주는 것 같아 전화를 못한 것 같아요. 이따 연락해보겠습니다."
27일 잠실 롯데전에 앞서 모교의 30년 만의 우승이라는 기쁜 소식을 접한 이승엽 감독은 "역시 전통은 어디 가지 않는다. 정말 오래 걸렸다. 30년 만에 우승이라니 자랑스럽다"며 환하게 웃었다. 이어 "경북고 야구가 사그라진 게 사실인데 이번 계기로 붐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우승은 한 번 할 때 계속 쭉 해야 한다. 다음 대회도 우승하면 좋겠다"며 응원 메시지를 전했다.
정현석 기자 hschung@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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