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궤도 오른 일본의 반도체 부활 전략 [글로벌 현장]
2023. 7. 28. 06:01
생산 거점 절실한 미국과 이해관계 맞아…일, 무역 적자 극복 위해 반도체 산업 키워야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작년 7월 죽기 전 가장 공을 들인 활동은 일본·대만의 경제 협력이었다. 그의 최측근 의원들이 여러 차례 대만을 오갔다.”
지난 8일 아베 전 총리 사망 1주기를 맞아 사석에서 만난 아베파 소속 국회의원의 말이다. 아베 전 총리가 대만을 주목한 이유가 반도체 때문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2020년 9월 총리 자리에서 물러난 그가 대만으로 눈을 돌린 2021년 봄은 일본 반도체 산업의 분기점으로 기록될 시점이다. 2030년이면 사실상 소멸할 것으로 예상되던 반도체 산업을 소생시키려는 마지막 시도가 시작된 때다.
그해 5월 반도체전략추진의원연맹이 발족했다. 아베 전 총리는 집권 여당인 자민당 의원 100여 명으로 구성된 이 연맹의 특별고문을 맡았다. 한 달 뒤인 6월 TSMC의 구마모토 공장 유치를 기점으로 일본 정부는 반도체 전략을 발표한다. 반도체 생산 공장 신설 등에 총 2조 엔을 지원해 2030년 일본의 반도체 매출 15조 엔까지 늘린다는 내용이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22년 5월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일본 반도체 산업의 부활을 공인한 시점으로 기록될 것 같다. 5월 23일 미·일 정상 회담에서 두 나라는 반도체 협력 기본 원칙에 합의했다.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공동 대응과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출범 등 굵직굵직한 이슈에 가려져 한국에서는 이 합의를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합의로 미국 IBM과 벨기에 반도체연구인력양성센터(IMEC)가 일본에 최첨단 반도체 제조 기술을 제공하는 근거가 마련됐다.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을 체결해 세계 반도체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일본을 고사시킨 미국이 40여 년 만에 일본 반도체 산업을 부활시키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일본의 반도체 부활 전략은 본궤도에 오르고 있다. 최첨단·첨단·범용 등 3가지로 구분되는 반도체 시장별 대응은 물론 소재부터 완제품까지 반도체 공정 전체에 대해 자국 기술력이 미치지 못하는 빈자리는 채우고 강점은 극대화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부활을 위한 10년 치 로드맵을 짜 놓은 것 같다”고 말했다.
반도체 시장은 회로 선폭에 따라 크게 최첨단 반도체(2나노미터·㎚ 이하)와 첨단 반도체(12~28나노미터), 범용 반도체(40나노미터 이상) 등 세 가지로 나뉜다. 2021년 6월 반도체 전략을 발표할 당시 일본은 범용 반도체밖에 만들 수 없었다. 비어 있는 첨단 반도체 분야는 TSMC 등 해외 반도체 기업을 끌어들여 해결했다. 마지막 남은 최첨단 반도체는 일본 정부와 도요타자동차·소니 등 대표 기업들이 작년 8월 공동으로 설립한 라피더스가 맡는다.
라피더스가 2027년 2nm급 반도체를 생산하면 일본은 범용부터 최첨단 반도체까지 모두 생산하는 반도체 제조 강국으로 부활한다.
약점을 보강하는 동시에 강점을 극대화하는 전략도 마련했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반도체 소재 산업을 정부 주도로 재편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6월 말 일본 정부계 펀드인 산업혁신투자기구(JIC)는 포토레지스트 세계 1위 JSR을 약 1조 엔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일본 정부 계열 투자펀드가 JSR을 사들인 것은 해외에 적대적 인수·합병(M&A)으로 팔릴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JSR의 시가 총액은 약 7000억 엔인데 외국인 보유 지분이 54%에 달한다. 이론상 4조원이면 JSR을 인수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글로벌 사모펀드(PEF)들이 꾸준히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일본 정부가 JSR 인수를 시작으로 반도체 제조의 핵심 소재인 포토레지스트 산업을 통합할 것으로 보고 있다. 세계 5대 포토레지스트 기업 가운데 4곳이 일본 기업이다. 이들을 통합하면 일본은 세계 포토레지스트 시장의 72%를 점유하게 된다.
일본의 반도체 전략을 뜯어보면 부활의 성패는 라피더스에 달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라피더스의 공언대로 삼성전자·TSMC와 벌어진 20년의 격차를 5년 만에 채워 2027년부터 첨단 반도체 양산에 성공한다면 세계 시장의 판도가 완전히 달라진다.
한·일 반도체 전문가들의 반응은 회의적이다. 타이어와 자동차 부품을 잘 만든다고 해서 오토바이 메이커가 갑자기 포뮬러1(F1)에 출전하는 슈퍼카를 만들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주도했거나 다수의 일본 기업이 공동으로 진행한 사업 재편이 성공한 역사도 없다.
1999년 히타치제작소와 NEC의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통합한 엘피다메모리는 2012년 파산했다. 미쓰비시전기·히타치·NEC의 반도체 부문을 통합한 르네사스일렉트로닉스도 만년 적자를 면치 못하다가 공적 자금의 지원을 받았다.
자금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쉽지 않다. 최첨단 반도체를 양산하려면 10년간 5조 엔이 필요하지만 일본 정부가 지금까지 확정한 지원금은 3300억 엔에 불과하다.
물론 성공 가능성이 예상되는 요인이 없지는 않다. 라피더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전폭적인 지원이다. 아직 기술도, 생산 공장도 없는 라피더스지만 벨기에 제휴 회사 IMEC의 도움으로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두 대나 확보했다. EUV 노광 장비는 네덜란드 ASML이 독점 생산하는 최첨단 반도체 제작의 필수 장비다. 1년 생산량이 50대 안팎에 불과해 삼성전자와 TSMC가 먼저 손에 넣기 위해 신경전을 벌이곤 한다.
무엇보다 반도체 산업을 부활시키려는 일본·한국·대만 이외의 생산 거점이 절실한 미국과 EU의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지난해 일본은 전자·통신 기기에서 2조 엔 이상의 무역 적자를 냈다. 스마트폰·데이터센터 등 전자 산업에서 반도체의 비율이 점점 높아졌기 때문이다. 전기차, 생성형 인공지능(AI), 자율 주행, 차세대 이동 통신 규격(6G), 스마트 시티, 메타버스 등 급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산업은 하나같이 최첨단 반도체가 필수다. 이대로라면 2030년 일본의 전자·통신 기기의 무역 적자는 10조 엔을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자·통신 기기는 제조 강국 일본의 주력 산업 가운데 하나다. 주력 산업의 세계 시장이 커질수록 일본의 무역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악순화에 빠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인텔·IBM 같은 미국과 EU의 반도체 기업들은 대부분 개발과 설계만 담당하고 생산은 위탁하는 ‘팹리스’ 회사들이다. 중국의 위협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한국과 대만 이외에 첨단 반도체를 양산할 수 있는 제조 파트너를 확보하는 것은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됐다. 미국 시장 조사 회사 노메타리서치에 따르면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시장점유율은 44%에 달한다. 이 가운데 10nm 미만 첨단 반도체의 90%는 대만에서 생산된다. 스마트폰·데이터센터 등에 사용되는 반도체도 한국과 대만이 양산을 담당하고 있다.
일본의 반도체 전략을 담당하는 니시무라 야스토시 경제산업상은 5월 23일 한국경제신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로봇과 같은 전자 제품이 주력 산업인 일본이 반도체를 안 만들 수 없다”고 말했다.
도쿄(일본)=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
[글로벌 현장]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작년 7월 죽기 전 가장 공을 들인 활동은 일본·대만의 경제 협력이었다. 그의 최측근 의원들이 여러 차례 대만을 오갔다.”
지난 8일 아베 전 총리 사망 1주기를 맞아 사석에서 만난 아베파 소속 국회의원의 말이다. 아베 전 총리가 대만을 주목한 이유가 반도체 때문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2020년 9월 총리 자리에서 물러난 그가 대만으로 눈을 돌린 2021년 봄은 일본 반도체 산업의 분기점으로 기록될 시점이다. 2030년이면 사실상 소멸할 것으로 예상되던 반도체 산업을 소생시키려는 마지막 시도가 시작된 때다.
40년 만에 부활 맞이한 일본 반도체 산업
그해 5월 반도체전략추진의원연맹이 발족했다. 아베 전 총리는 집권 여당인 자민당 의원 100여 명으로 구성된 이 연맹의 특별고문을 맡았다. 한 달 뒤인 6월 TSMC의 구마모토 공장 유치를 기점으로 일본 정부는 반도체 전략을 발표한다. 반도체 생산 공장 신설 등에 총 2조 엔을 지원해 2030년 일본의 반도체 매출 15조 엔까지 늘린다는 내용이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22년 5월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일본 반도체 산업의 부활을 공인한 시점으로 기록될 것 같다. 5월 23일 미·일 정상 회담에서 두 나라는 반도체 협력 기본 원칙에 합의했다.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공동 대응과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출범 등 굵직굵직한 이슈에 가려져 한국에서는 이 합의를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합의로 미국 IBM과 벨기에 반도체연구인력양성센터(IMEC)가 일본에 최첨단 반도체 제조 기술을 제공하는 근거가 마련됐다.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을 체결해 세계 반도체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일본을 고사시킨 미국이 40여 년 만에 일본 반도체 산업을 부활시키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일본의 반도체 부활 전략은 본궤도에 오르고 있다. 최첨단·첨단·범용 등 3가지로 구분되는 반도체 시장별 대응은 물론 소재부터 완제품까지 반도체 공정 전체에 대해 자국 기술력이 미치지 못하는 빈자리는 채우고 강점은 극대화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부활을 위한 10년 치 로드맵을 짜 놓은 것 같다”고 말했다.
반도체 시장은 회로 선폭에 따라 크게 최첨단 반도체(2나노미터·㎚ 이하)와 첨단 반도체(12~28나노미터), 범용 반도체(40나노미터 이상) 등 세 가지로 나뉜다. 2021년 6월 반도체 전략을 발표할 당시 일본은 범용 반도체밖에 만들 수 없었다. 비어 있는 첨단 반도체 분야는 TSMC 등 해외 반도체 기업을 끌어들여 해결했다. 마지막 남은 최첨단 반도체는 일본 정부와 도요타자동차·소니 등 대표 기업들이 작년 8월 공동으로 설립한 라피더스가 맡는다.
라피더스가 2027년 2nm급 반도체를 생산하면 일본은 범용부터 최첨단 반도체까지 모두 생산하는 반도체 제조 강국으로 부활한다.
약점을 보강하는 동시에 강점을 극대화하는 전략도 마련했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반도체 소재 산업을 정부 주도로 재편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6월 말 일본 정부계 펀드인 산업혁신투자기구(JIC)는 포토레지스트 세계 1위 JSR을 약 1조 엔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일본 정부 계열 투자펀드가 JSR을 사들인 것은 해외에 적대적 인수·합병(M&A)으로 팔릴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JSR의 시가 총액은 약 7000억 엔인데 외국인 보유 지분이 54%에 달한다. 이론상 4조원이면 JSR을 인수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글로벌 사모펀드(PEF)들이 꾸준히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라피더스에 달린 부활의 성패
전문가들은 일본 정부가 JSR 인수를 시작으로 반도체 제조의 핵심 소재인 포토레지스트 산업을 통합할 것으로 보고 있다. 세계 5대 포토레지스트 기업 가운데 4곳이 일본 기업이다. 이들을 통합하면 일본은 세계 포토레지스트 시장의 72%를 점유하게 된다.
일본의 반도체 전략을 뜯어보면 부활의 성패는 라피더스에 달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라피더스의 공언대로 삼성전자·TSMC와 벌어진 20년의 격차를 5년 만에 채워 2027년부터 첨단 반도체 양산에 성공한다면 세계 시장의 판도가 완전히 달라진다.
한·일 반도체 전문가들의 반응은 회의적이다. 타이어와 자동차 부품을 잘 만든다고 해서 오토바이 메이커가 갑자기 포뮬러1(F1)에 출전하는 슈퍼카를 만들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주도했거나 다수의 일본 기업이 공동으로 진행한 사업 재편이 성공한 역사도 없다.
1999년 히타치제작소와 NEC의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통합한 엘피다메모리는 2012년 파산했다. 미쓰비시전기·히타치·NEC의 반도체 부문을 통합한 르네사스일렉트로닉스도 만년 적자를 면치 못하다가 공적 자금의 지원을 받았다.
자금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쉽지 않다. 최첨단 반도체를 양산하려면 10년간 5조 엔이 필요하지만 일본 정부가 지금까지 확정한 지원금은 3300억 엔에 불과하다.
물론 성공 가능성이 예상되는 요인이 없지는 않다. 라피더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전폭적인 지원이다. 아직 기술도, 생산 공장도 없는 라피더스지만 벨기에 제휴 회사 IMEC의 도움으로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두 대나 확보했다. EUV 노광 장비는 네덜란드 ASML이 독점 생산하는 최첨단 반도체 제작의 필수 장비다. 1년 생산량이 50대 안팎에 불과해 삼성전자와 TSMC가 먼저 손에 넣기 위해 신경전을 벌이곤 한다.
무엇보다 반도체 산업을 부활시키려는 일본·한국·대만 이외의 생산 거점이 절실한 미국과 EU의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지난해 일본은 전자·통신 기기에서 2조 엔 이상의 무역 적자를 냈다. 스마트폰·데이터센터 등 전자 산업에서 반도체의 비율이 점점 높아졌기 때문이다. 전기차, 생성형 인공지능(AI), 자율 주행, 차세대 이동 통신 규격(6G), 스마트 시티, 메타버스 등 급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산업은 하나같이 최첨단 반도체가 필수다. 이대로라면 2030년 일본의 전자·통신 기기의 무역 적자는 10조 엔을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자·통신 기기는 제조 강국 일본의 주력 산업 가운데 하나다. 주력 산업의 세계 시장이 커질수록 일본의 무역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악순화에 빠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인텔·IBM 같은 미국과 EU의 반도체 기업들은 대부분 개발과 설계만 담당하고 생산은 위탁하는 ‘팹리스’ 회사들이다. 중국의 위협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한국과 대만 이외에 첨단 반도체를 양산할 수 있는 제조 파트너를 확보하는 것은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됐다. 미국 시장 조사 회사 노메타리서치에 따르면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시장점유율은 44%에 달한다. 이 가운데 10nm 미만 첨단 반도체의 90%는 대만에서 생산된다. 스마트폰·데이터센터 등에 사용되는 반도체도 한국과 대만이 양산을 담당하고 있다.
일본의 반도체 전략을 담당하는 니시무라 야스토시 경제산업상은 5월 23일 한국경제신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로봇과 같은 전자 제품이 주력 산업인 일본이 반도체를 안 만들 수 없다”고 말했다.
도쿄(일본)=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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