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초원과 유목만으로 흉노 제국을 이해할 수 없다
위구르, 돌궐 이어 흉노 역사 복원
중국과 경합하며 400년 지속
농경-유목 이분법 넘는 유목제국 실체
흉노 유목제국사
기원전 209~216
정재훈 지음 l 사계절 l 3만원
중앙아시아 또는 유라시아에 대한 학계의 관심은 오랫동안 농경 정주문명을 중심으로 바라봤던 세계사를 비판적으로 톺는다. 그저 문명의 바깥이라 여겨왔던 초원과 그곳을 중심으로 살았던 유목민을 새로운 ‘역사 단위’로 파악해야 한다는 과제가 녹아 있다. 동서로는 태평양 연안의 만주 지방에서 동유럽까지, 남북으로는 시베리아 삼림지대에서 인도양까지, 유라시아 대륙에 명멸했던 여러 유목 제국들은 ‘바깥’에 있던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농경 문명과 서로 심대한 영향을 주고받아왔다.
이 분야의 고전인 르네 그루세의 ‘유라시아 유목제국사’(1939)를 우리말로 공역했던 정재훈 경상국립대 교수(사학과)는 ‘위구르 유목제국사: 744~840’(2005), ‘돌궐 유목제국사: 552~745’(2016) 등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며 주요 유목제국에 대한 역사를 써왔다. 이번에 펴낸 ‘흉노 유목제국사: 기원전 209~216’는 고대 유목 제국사를 총정리하는 3부작의 완성이다. 지은이는 “흉노 유목제국사를 복원하는 작업은 몽골 초원을 중심으로 한 북아시아의 유목 세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사, 나아가 세계사에서 흉노의 위상과 의미를 곱씹어보는 과정”이라 밝혔다. 위구르사도 새롭게 정리해 내년쯤 출간할 예정이다.
고비사막 남북에 형성된 ‘몽골 초원’을 무대로 삼아 기원전 3세기께부터 그 존재감을 드러냈던 흉노(匈奴)는 ‘세계 최초의 유목 제국’으로 꼽힌다. 다만 워낙 오래 전 일인데다 스스로 남긴 문헌 기록이 전혀 없어, 중국 쪽 한문 기록을 토대로 그 존재를 더듬어볼 수밖에 없다. 1924년 발굴된 ‘노용 올’ 유적을 비롯해 고고학적 발굴 성과들이 꽤 나오기도 했지만, 지은이는 “흉노는 ‘이동’, 중국은 ‘정주’라는 이분법적 접근”을 경계하며 한문 자료를 중심으로 삼고 발굴 자료와의 간극을 좁히는 데에 주력했다.
책이 전반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흉노라는 유목제국의 ‘문화적 복합성’과 ‘다원성’이다. 지은이는 사마천 ‘사기’의 ‘흉노열전’을 파고들어, 유목민의 습성에 대한 사마천의 설명이 후세에 “(불박여 사는 곳 없이 정처 없이)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닌다”(逐水草遷徒)는 풀이로 잘못 이해되어 굳어졌다고 지적한다. 가축을 키우는 유목민들에게 목초지는 유한한 것이라 일정한 범위 내에서만 ‘맴돌며’ 재생산을 할 수 있었고, 맴도는 범위는 가족 내지 씨족이 소유한 ‘분유지’(分有地)로 고정되어 있었다. 사마천은 이를 “맴돌며 옮겨다닌다”(轉移)고 표현했다. 그 의도는 유목민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중국과는 완전히 다르지만 “중국에 대응할 만큼 독자적인 체계를 갖춘 상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정처 없이 떠도는’ 것으로 풀이되는 바람에 유목민에 대한 왜곡된 고정관념이 만들어진 셈이다.
또 하나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농경에 기반한 도시국가 체제였던 중국의 범위가 확장되면서 산지 주변의 목축민들과 맺게 된 복잡한 관계다. 유목을 전문적인 생업으로 삼는 ‘호’(胡)는 초원을 중심으로 세력을 이뤘고, 기마와 궁술에 능해 ‘활 당기는 사람’(引弓之民)이라 불렸다. 그리고 도시국가와 초원 사이에는 과거 계곡을 중심으로 목축과 초보적인 농경 등에 종사했던 ‘융’(戎)을 비롯해 다양한 주민들이 다양한 생산 방식에 의지해 ‘잡거’(雜居)했다. 도시국가의 확장으로 생긴 이 ‘목농복합구역’은 농경 세계와 유목 세계가 서로의 이해를 걸고 오랫동안 경합하도록 만든 요인이었다. 흉노 입장에서 고비사막 북쪽(막북)은 생산력이 떨어지는 ‘평지 초원’이나 남쪽(막남)은 목축에 좋은 ‘산지 초원’인데다 교류·약탈 등 다양한 생산력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나라가 융을 밀어 올리고 장성을 쌓는 등 전국시대 도시국가들이 경계를 확장하는 가운데 기원전 3세기께 호가 장성 너머로 이탈한 융과 결합해 흉노로 발전했다. 전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오르도스 지역(황하의 흐름이 남북으로 크게 휘는 곳)에 ‘신진중’을 설치하고 장성을 쌓았는데, 이는 목초지를 찾아 남북 방향으로 이동해야 하는 유목민의 계절적 리듬을 가로막는 조처였다. 이에 세력을 키우며 대응한 흉노는 묵특 선우(우두머리) 때인 기원전 209년 강력한 국가 체제를 갖춘 거대한 유목제국으로 등장했고, 장성 너머로까지 영역 확장을 시도하며 한나라를 위협했다. “중국에서 온 반한 세력과 서쪽 오아시스와 유목민 모두를 통제”하게 된 흉노는 기원전 174년 한나라와 대등한 관계로 화친을 맺는 데 이른다.
강력한 기마궁사를 바탕으로 초원의 교역로를 장악했으나, 흉노는 부족한 생산력 때문에 늘 한나라의 물자 지원에 기대야 했다. 한과 흉노는 한동안 대등한 관계를 이어갔으나, 한 무제는 장건이 ‘착공’(구멍을 뚫다)을 통해 가져온 서역의 정보를 바탕으로 흉노를 고립시키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고 끝내 대대적인 ‘북벌’을 감행해 흉노를 막북으로 몰아냈다. 근거지를 잃고 막북으로 이주한 흉노는 잇딴 계승 분쟁, 자연 재해 등을 겪으며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안정적인 국가 체제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48년에는 남북 분열의 결과로 남흉노가 막남에 자리잡았지만, 그 위상은 후한에 철저히 종속되는 데 그쳤다. ‘백만 중의 큰 나라’(百蠻大國)에서 ‘백만 중의 한 나라’가 된 흉노는 216년 완전히 해체된다.
400년 이상 지속된 흉노의 역사는 농경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유목 세계가 존재했음을 말해주며, 두 세계의 각축은 “대결과 융합에만 초점을 맞춘 기존의 이분법적” 접근과는 다른 접근을 요구한다. 무엇보다 지은이는 흉노 제국 안에 정주 농경과 목농복합, 목축, 유목 등이 공존했으며, 이는 중국의 일원적 성격과 구분되는 유목제국의 “다원적이고 탈착이 가능한 이종결합적” 성격을 보여준다고 짚는다. 이후 6세기 돌궐, 13세기 몽골 등이 흉노로부터 자신들의 정통성을 끌어온 데에서 보듯 흉노는 유목제국의 원상(原像)으로,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세계사 속 또 다른 ‘역사 단위’의 존재를 웅변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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