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숨이 불러낸 1947년 9월16일 단 하루의 부산 [책&생각]
잃어버린 사람
김숨 지음 l 모요사 l 2만원
이 소설의 줄거리를 추리긴 쉽지 않은데 그래도 해보자면 “먼 데서 온” 여성 애신이 취직을 시켜준다는 친구가 있는 부산 남빈 녹정(綠町)을 찾아가는 하루의 여정이라 하겠다. 그해 봄 친구는 애신의 고향집으로 해운대 해수욕장 사진엽서를 보냈다.
물어물어 가는 길은 있는 줄도 모르던 이들이 드러나는 길이다. 애신은 북빈 바닷가 매립공사(1902~08) 품팔이로 부산에 발을 들였다는 노인을 만나고, 평생 곰장어 껍질을 벗기느라 일그러진 두 손 좀 보고 가라 푸념하며 곰장어잡이 시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노파, 고구마를 훔쳐먹고선 엄마에게 발가벗겨진 채 밖을 배회하는 사내아이를 만난다. 금붕어 장수한텐 도리 없이 어항과 금붕어 한 마리를 사고, 고리대금업으로 일본 순사보다 더 욕을 먹고도 조선인 사내와 결혼한 일본인 여성 구미코의 기구한 사연을 듣는다. 이들 또는 이들 주변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피해, 강제징용, 위안부 조선인으로 “먼 데”서 아주 “먼 데”로 떠나 제 고향이 아닌 또 먼 부산으로 겨우 돌아온, 그조차 돌아오지 못한 자들 대부분이다. 시대가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급기야 “나도 내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다는 이들.
애신은 한차례 마다함이 없이 그 ‘너절한’ 이야기들이 영영 사라질세라 듣고 새기는 듯 호응한다. 사방 뜨내기들의 말엔 사투리가 없고 억양도 없다. 작가가 복원하여 ‘역사’로 기록 중이기 때문이리라.
애신이 드디어 친구를 만난다, 살구색 저고리를 입고 파마한 채 미군 담배 한 개비를 쥐고 있는. 녹정 아니 미도리마치. 1916년 일제가 부산 서구 충무로에 만든 최초의 공창가.
친구는 일본군 위안소에서 만났던 이로 일제 패망 뒤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고향으로 가지 않고 부산 유곽에 머문 이다. 그가 묻는다.
“(부모에게) 어디에 있었다고 했어?”
“군복 만드는 공장.”
“믿으시든?” 침묵하는 애신.
“일본군 세상에서 미군 세상으로 바뀌었어.”
“너는? 고향집에 한 번도 안 갔어?”
“안 갔어.”
“언제 가려고?”
“돈 벌면.”
“부모님은 네가 부산에 있는 건 아셔?”
“편지 한 번 썼어. ‘부산에서 공장에 다니고 있어요.’”
“무슨 일 하면 돼?”
“안주 나르고, 술 따라주고, 노래 부르라고 하면 노래도 부르고.… 아, 애신아, 포로수용소에 같이 있었던 여자애도 여기 있지 뭐니!”
이 소설의 줄거리는 추려지지 않으므로 애신으로 추릴 까닭도 없다. 고향서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전보를 치기 위해 20전을 구걸하는 경태, 부산 초량 한 중국집 여주인의 사연을 들어주노라 팔아야 할 두부가 죄 상해버린 송씨, 조선인들한테 돌팔매 당하면서도 고향 선양으로 돌아가지 않은 그 중국집 여인, 남편을 따라 시모노세키에서 연락선을 탔으나 아이마저 빼앗긴 채 부산서 소금자루를 아기마냥 진 가쓰코, 어머니와 처자식을 찾던 천복, 일본에 아내를 두고 돌아와 열심히 트럭을 몰다 천복을 친 장씨의 하루 여정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애신이 그러했듯 그들 모두가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 서로의 존재를 드러내고 확인하는 이야기라거나.
작가 김숨(49)은 26일 한겨레에 “해방 뒤 귀환선을 타고 온 이들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공백처럼 지워져 있었다”며 “돌아오고, 돌아오지 못한 분들, 역사에서 그렇게 지워져 있는 분들을 복원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실로 망망한 일일 터. 소설은 1947년 9월16일 화요일 단 하루의 부산을 배경으로 한다. 그 시절 부산은 어떤 곳인가. 팔도 조선인, 중국인, 귀환자들이 몰려 길을 물어도 “열두 사람 다 자기는 여기 사람이 아니어서 모른다”는, “일자리가 넘쳐나지만 사람은 더 넘쳐나 가장 헐한 게 사람”인, 하여 만나 인사해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슬픔, 분노, 욕망, 시기, 기만, 드잡이, 회한, 굴욕, 고통의 도시다.
절망으로부터, 주변의 절망을 삼켜가며, 다시 절망으로 걸어 들어가는 애신의 짐짓 말간 태도로, 읽는 이들은 한없이 막막하다. 하지만 독후감은 줄거리에서 그러했듯 단 하나의 감정, 특히 슬픔, 으로만 추려지지 않는다. 김숨이 전체 25부 123장에 이르는 단막 수만큼이나 많은 변두리 민중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른 이유랄까.
모든 단막은 고통으로 짓이겨져 처연한데, 그 단막들이 이룬 서사는 ‘잃어버린 사람’들의 잃어버릴 수 없는 생의 의지, 계속되어야 할 삶의 당위를 장대하게 은유해낸다.
특히 언청이 여자의 9월16일이 그러하다.
남편과 금실 좋은 언청이 여자가 잃어버릴 뻔했던 아들 시종에게 동생을 가졌다고 말하기까지의 고된 하루. 다시 보니 전체 소설의 시작이 이랬다.
“땅위 세상에 쌀이 더해지고, 소금이 더해지고, 바다에 그물을 내려 잡은 물고기가 더해지더니, 곡정 까치고개서 갓 태어난 아기까지 더해져 세상 쪽으로 무게중심이 기운다.”
세상이 가물지 않는 원리부터 표명한 셈이다. 언청이 여자의 정반대에 선 이가 약사 구봉이다. 작중 가장 잘 배우고 가진 자로서, 어린아이마저 관찰하고 불신하며 매끈한 혀로 인간세계를 비관한다. 하지만 민중은 더 넓은 세계에서 하루하루 욕망 반목 화해하고 견디는 바다의 삶을 살아갈 뿐, 그 작은 구봉의 세계만 어항 속 금붕어의 것처럼 유리된 듯 보인다.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받았던 김숨은 “장소를 체화하기 위해 2018년 11월 처음 부산으로 갔다.” ‘부산’은 부산에 없어 길 가다 노인들을 보면 인터뷰했고 향토사학자를 찾았고, 과거 자료사진을 구해 읽었다. 5년 지나, 한겨레에 말하길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는 원고 1880장짜리 650여쪽의 장편 ‘잃어버린 사람’을 내놓았다. 애신을 주인공으로 한 2020년 단편 ‘초록은 슬프다’가 초석이 됐다.
“과거 작품 땐 피해자가 누구인가, 피해자는 무엇인가에만 집중했지만 이번 ‘가해자는 무엇인가’를 많이 고민했어요. 해방 뒤 재한 일본인들은 모두 여성(아내)인데, 그들 이야기가 위안부 여성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만큼이나 힘들었어요.”
1946년 9월 어느 하루의 시간은 고약해서 소설 속 흐르지 않는 듯하다. 해가 저물지 않을 듯 고통은 바통을 이어 달릴 뿐이다. 그렇게 ‘삶’이 오늘에 닿는다. 가해와 피해가 뒤섞인 세계, “(또 다른 인물인) 말똥, 쑥국과 같이 무사히 삶을 살아내고 지금까지 살아가도록 한 이들”(김숨, 한겨레 인터뷰)의 대서사시로 흐르고 흐르고 흐른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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