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수' 노랫말도 스크린에…'단일 언어' 한국 어쩌다 '자막의 민족' 됐나
해외는 더빙 선호하는데... 한 민족·언어 쓰는 나라 이례적
①'빨리빨리' 자막 켜고 배속으로 영상 소비하고
②소리보다 문자를 선호하는 '콜포비아' 시대의 특징
K콘텐츠 업계 그림자도... "음악·음향 과잉 연출, 배우 발성 문제도"
"믿어도 되나요 당신의 마음을~." 파도가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기타 소리가 흥겨운 최헌의 '앵두'(1978)가 흐르자 스크린엔 노란색 자막으로 가사가 줄줄이 뜬다. 노래방 TV가 아니다. 26일 오후 1시 45분 서울 은평구 진관동 롯데시네마 6관에선 김혜수·염정아 주연의 영화 '밀수'가 129분 내내 한글 자막이 달린 채 상영됐다. 한국 영화가 개봉과 동시에 한글 자막이 삽입된 채 극장에 걸리기는 한국 영화 100여 년 역사에 이번이 처음이다.
이 영화에서 노랫말은 노란색으로 대사는 흰색으로 표기됐다. 등장인물이 "우리 기름값도 못 벌어요"란 말을 하자 스크린엔 대사뿐 아니라 '브로커'라며 화자의 배역도 떴다. 이날 극장엔 일부러 한글 자막 상영관을 찾아온 비(非)청각장애인이 적지 않았다. 어머니와 함께 한글 자막 상영관을 일부러 찾아왔다는 40대 관객 이진아씨는 "넷플릭스로 드라마와 영화를 보면서 한국 영화도 극장에서 한글 자막 달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와서 보니 대사도 알아듣기 수월했다"며 "영화에 들어가 있는 몰랐던 노래랑 가사 정보도 알게 돼 훨씬 더 재미있게 봤다"며 웃으며 말했다. 허지우(19)씨도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로 자막 켜고 드라마나 영화 보는 게 익숙해 일부러 한글 자막 상영 시간에 맞춰 친구랑 같이 왔다"며 "액션 영화라면 또 한글 자막 상영 회차로 볼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영화의 한글 자막 상영은 전국 48개 극장에서 하루에 1~2회 이뤄진다. 영화진흥위원에 따르면 '밀수'를 시작으로 '더 문'(8월 2일 개봉) 등 올해 6~7편이 한글 자막 버전으로도 상영된다.
극장·지상파TV 50년 넘은 관행이 바뀌다
극장뿐만이 아니다. 한글 자막은 안방극장까지 파고들었다. SBS는 일반 시청자를 상대로 2월부터 드라마 한글 자막 서비스를 시작했다. '악귀' 등 방송 중인 드라마 재방송이 적용 대상이다. 한국 최초의 드라마 '천국의 문'이 1956년 전파를 탄 뒤 지상파 방송사에서 한글 자막이 달린 드라마를 제작하기는 67년 만이다. 재미를 부각하기 위해 그간 20여 년 동안 예능프로그램에만 달렸던 한글 자막이 드라마, 영화까지 확대 적용되고 OTT를 넘어 TV 그리고 극장까지 모든 콘텐츠 플랫폼에서 일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자막 전성시대'다.
이런 변화엔 코로나 팬데믹 2~3년 동안 미디어 환경이 바뀐 게 큰 영향을 끼쳤다. OTT 사용자는 폭증했고 드라마와 영화를 자막과 함께 보는 시청 습관은 새로운 표준으로 급부상했다. 지상파 방송사와 영화제작사가 50년 넘게 이어온 제작 관행을 바꿔 한글 자막을 최근 콘텐츠에 속속 적용하고 나선 배경이다. SBS 관계자는 "드라마 본방송에서의 한글 자막 적용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한국에서 부는 '자막 열풍'은 이례적이다. 코로나 팬데믹 때 OTT의 폭발적 소비는 세계적 현상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이민자의 나라'로 불리는 미국처럼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나라도 아니고 싱가포르처럼 공용어가 4개인 다언어 국가도 아니다. 이른바 단일 민족, 단일 언어권인 나라의 지상파 TV와 극장에서 자국 최신 드라마와 영화에 모국어로 실시간 자막 서비스가 이뤄지는 사례는 찾기 어려울 정도다. "한글 자막 서비스 도입 전에 해외 사례를 찾아봤는데 우리나라와 같은 문화적 배경(단일 민족·언어)에서 드라마에 모국어 자막을 다는 나라를 찾지 못했고"(이광순 스튜디오S CP) "외화도 일본, 프랑스 등 해외에선 더빙이 압도적으로 선호되는 반면 한국은 자막 애호가 높다"(김형호 영화시장분석가)는 게 K콘텐츠 업계 관계자들의 말이다. 다른 나라와 달리 한국의 시청자가 콘텐츠 자막에 대한 관심이 유달리 뜨겁다는 얘기다.
소리 끄고 자막만 보는 배우까지 등장한 배경
한국인은 어떻게 '자막의 민족'이 됐을까
'빨리빨리' 문화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영상도 1.25~1.5배속으로 빠르게 돌려보면서 자막에 대한 의존도가 커졌다는 해석이 나온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는 "지하철에서 자막을 켠 채 배속 재생으로 드라마·영화를 보거나 부모들이 퇴근 후 집안일을 하면서 자막을 켠 채 드라마를 보는 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콘텐츠 소비 풍경"이라며 "일상에 쫓겨 여러 일을 하면서 드라마 등을 봐 콘텐츠에 온전하게 몰입하기 어렵고, 그런 상황에서 자막으로 콘텐츠를 빠르고 쉽게 소비하는 경험이 쌓이면서 자막에 더 친숙해진 것"이라고 봤다. 배우 오연수는 이달 방송된 예능프로그램 '동상이몽2- 너는 내 운명'에서 자고 있는 남편 손지창 옆에서 소리를 무음으로 설정한 뒤 TV를 봤다. 소리를 안 들어도 재미있냐는 MC의 질문에 오연수는 "요즘엔 다 자막이 있어서"라며 웃었다. 연기를 전업으로 하는 중년의 배우도 소리 없이 자막으로만 콘텐츠를 즐기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된 것이다. 윤김지영 창원대 철학과 교수는 "정보와 콘텐츠 과잉의 시대에 빠르고 덜 힘들게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전화, 대화 등 말보다 SNS와 카카오톡 등 문자 위주로 소통의 방식이 바뀐 것도 자막의 민족이 등장한 주요인으로 꼽힌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바뀌면서 요즘 사람들은 청각보다 시각 정보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며 "소리로 정보를 주고받는 걸 불편해하고 전화 통화를 두려워하는 '콜(call)포비아' 현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문자로 된 자막이 더 정확한 정보를 준다고 믿고 받아들이기 편하다고 생각해 자막 소비가 느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자막으로 더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일부러 한글 자막이 나오는 상영관을 찾는 관객이 등장한 배경이다.
곳곳에서 부는 자막 열풍은 국내 콘텐츠 소비자들이 자막을 아예 영상의 일부로 인식하게 된 데 따른 변화로 읽히기도 한다. '멍멍이'와 글자 모양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개를 '댕댕이'로 부르는 유행에서 엿볼 수 있듯 문자를 하나의 이미지처럼 즐기는 요즘 문화의 흐름이 자막 소비 열풍의 땔감으로 작용했다는 목소리다.
다만 다른 해석도 나온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음악과 음향 효과가 강조되면서 대사 듣기가 어려워진 측면도 있다"며 "자막 열풍은 음악과 음향의 과잉 연출과 배우들의 정확하지 않은 발성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지적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서이초 교사, 학교에 열 번 상담 요청… "학부모 개인 연락 소름끼쳐"
- 동남아 여행 경비 늘어날 수도… "입국세 부과·입장료 인상"
- [단독] 개그맨 김병만, 악플러 고소 "긴 고통의 시간 견뎠죠"
- 칼부림 트라우마 확산… "휴대폰에 112 눌러놓고 걷는다"
- 주호민에 고소당한 특수교사 "학대 의도 없었다...어떻게든 학교 쫓겨나는 것 막기 위해"
- 김남국 코인 8억 원 보유... 3년 새 7억 원 불어나
- "한국이 시럽급여 퍼준다? 아니다"...선진국은 ①더 많이 ②깐깐하게 준다
- 日 배낭여행서 49일째 행방불명… 20대 청년 어디로
- 여배우에 '국민호텔녀'라고 쓴 댓글, 결국 처벌받았다
- 자폐 자녀 특수교사 신고한 주호민 “아들 두려움에 등교도 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