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부산으로 몰려든 이들, 소설로 되살린 삶들

진달래 2023. 7. 28.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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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장편소설 '잃어버린 사람'
1947년 하루의 부산 곳곳 기록영화처럼 그려
각자의 상흔 안은 귀환동포·일본인·중국인 등
갈등 구조 없이 각자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니
그 시절 보통 삶의 구슬픔 절절하게 전해져
1945년 해방 직후 부산항 부산세관 앞에 모여 있는 귀환 동포들의 모습이다. 부산시 제공

해방 후 부산은 한반도에서도 가장 격동하는 도시였다. 일본 패망 직후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일본인들이 몰려들던 부산항은 시간이 지나면서 귀환동포들로 북적였다. 일본군이 떠난 자리는 미군이 채웠다. 분주한 항구 덕에 비교적 많은 일거리 소식을 듣고 온 외지인들까지. 그렇다고 생동감만이 가득 찼다는 낙관적 얘기가 아니다. "인간만 안 귀하고 다 귀하니 말세"인 시절, 당장 한 끼 걱정하며 사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또 '잃어버린 사람' 하나 마음에 품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그 슬픔이 쉬이 사라질 수 있으랴.

올해 등단 26주년인 김숨(49) 작가의 열한 번째 장편소설 ‘잃어버린 사람’은 그런 부산을 포착해낸 작품이다. 나이도 성별도 국적도 다양한 인물의 사연을 기록영화처럼 담았다. 강제 이주 열차에 탑승한 고려인들의 여정을 그린 ‘떠도는 땅’ 이후 3년 만에 낸 장편소설이다. 이전에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흐르는 편지’(2018) 등 거센 역사의 격랑을 맨몸으로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개인의 고통을 집요하게 써온 김숨. 그의 시선이 이번에 가닿은 곳은 1947년 9월 16일 하루 동안의 부산이다. 원고지 1,800장에 달하는 긴 분량에 그날을 세밀하게 새겨 넣었다.

소설은 공동묘지 안 산비탈까지도 터전 삼아 살아가는 이들의 생활을 비추며 시작한다. 소막사든 창고든 주인 없는 공간만 있다면 사람들이 들어차 살림을 꾸리고, 부두에는 일감 찾아 서성이는 이들이 가득하다. 어디 하나 사연 없는 사람이 없다. 사연 사이사이에는 극심한 이념 갈등과 미군정의 부실하고 섣부른 행정 등 당시 시대상을 예리하게 파고든 작가의 통찰이 녹아 있다.

199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와 1998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통해 등단한 김숨 작가는 소설집 '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 '국수', 장편소설 '철' 'L의 운동화' '한 명' '흐르는 편지' '떠도는 땅' 등을 펴내고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김현문학패 등을 수상했다. ⓒ백다흠 모요사 제공

진행 방식은 어찌 보면 단조롭다. 특별한 갈등도 사건도 없다. "참말로 재미난 얘기 같은 건 없다." 하나 수많은 인간 군상의 이야기를 25부에 걸쳐 조각보처럼 매끈하게 짜 맞춰 가며 완성한 하나의 그림은 찬란하게 슬프다.

예컨대 부두에서 국수를 먹던 백씨는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질 때 아내를 잃었다. 그날을 회상하는 대목은 처참하다. "숯덩이가 돼 깨진 벽돌 조각들 위에 누워" 있던 아내의 시신을 혼이라도 붙어 있을까 조심스럽게 등에 업고 그는 중얼거렸다. 집에 가자고. 애초에 고향집에 당신을 안전하게 두고 홀로 돈 벌러 올걸 그랬다고. 해방 소식을 듣고 중국에서 돌아왔지만 마땅히 '고향'이랄 곳을 이제는 찾지 못하는 남자들도 있고,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겨우 조국을 찾았으나 다시 사창가로 떠밀려 갈 수밖에 없었던 여자들도 있다. 조선인 남편을 따라 조선에 왔는데 얼마 못가 버림받은 일본 여자는 고국으로 돌아갈 돈도 없어 부산 항구만 맴돈다. 국적이 달라도 서글프긴 매한가지다. 슬픔의 온도를 높이는 건 그런 기구한 삶이 흔하디 흔하다는 점이다. "장대한 슬픔의 파노라마"(박혜진 문학평론가)라는 표현이 꼭 들어맞는 작품이다.

잃어버린 사람·김숨 지음·모요사 발행·664쪽·2만 원

"아, 누가 날 여기에 데려다 놨을까!" 인물들은 자문한다. "애당초 어디서 시작됐는지 알 도리가 없어서, 다시 시작할 수가 없는" 세월을 생각하면 멍해지기만 한다. 강제 징용에 앞장선 동네 면서기를 원망해야 하나, 일본이나 천황을 탓해야 하나, 아니면 원자탄을 터뜨린 미군을 욕해야 할까. 원망할 대상은 "알쏭달쏭"하고 깊은 상처는 아물 길이 없다. 그래도 작가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로 시작해 한 여인의 임신 소식으로 마무리 지은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럼에도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부의 제목 '빛'은 의미심장하다.

수많은 사연은 그들의 목소리로 직접 전해진다. 독백인지 방백인지 아리송하다가 이내 깨닫는다. 이 소설은 일종의 대화집이구나.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인물들이 불쑥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들어주고 한다. 자신의 고향 얘기를 두부가 쉬는 줄도 모르고 듣고 있는 두부 장수 송씨에게 중국 여인은 "내 얘기를 들어주고 있으니 친구"라며 고마운 마음을 표한다. 그렇게 우리 역사가 '잃어버린 사람'과 독자도 이 소설로 친구가 된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잊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임으로써.

진달래 기자 az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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