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대통령의 말
윤석열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온 나라가 출렁인다. “건폭이 완전히 근절될 때까지 엄정하게 단속해 건설현장에서의 법치를 확고히 세우라.” 검찰과 경찰이 건폭수사단을 구성해 특별단속을 벌인 지 넉 달 만에 1484명이나 검거했다. “공교육 교과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분야의 문제는 수능 출제에서 배제해야 한다.” 교육부 장관이 대통령의 지시를 전달하자 교육부 대학입시 담당 국장이 경질됐고, 수능 주관 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도 사임했다. “그동안 통일부는 마치 대북지원부와 같은 역할을 해왔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 남북대화, 교류, 협력, 인도지원에 관한 정책 수립과 같은 업무 대신 김정은 정권 타도와 자체 핵무장을 주장해 온 인사가 통일부 장관으로 지명됐다. “국민의 혈세가 그들만의 이권 카르텔에 쓰인다면 국민 여러분께서 이를 알고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비영리 민간단체에 지급한 보조금에 대한 감사를 실시해 1865건의 부정과 비리를 적발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정부와 수사기관이 일사불란하게 ‘적’을 규정하고, 색출하고. 척결한다. 그만큼 ‘말’이 권력의 효과를 낳는다. 말이 관료제적 국가기구를 통해 실제로 수행되기 때문이다. 집단이 어느 정도 커지면 관료제가 발전한다. 관료제는 집합적 목적을 가장 효과적으로 달성하도록 만들어주는 합리적 수단이다. 문제는 관료제는 집합적 목적을 스스로 설정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관료제 꼭대기는 항상 비관료제적인 카리스마적 인물이 차지해야 한다. 관료제 이론을 처음 발전시킨 막스 베버의 말이다. 카리스마는 한 집단이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가치’에서 나온다. 성스러운 가치를 체화한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집합적 목적을 설정한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도 마찬가지다. 집합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합리적 수단으로 관료제적 국가기구가 있다. 가장 꼭대기에는 대통령이 있다. 대통령은 관료제의 정점에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관료가 아니다. 고시에 붙어서 관료가 된 게 아니다. 카리스마를 갖고 있어 관료제의 꼭대기에 올라 있다. 합법적 폭력을 독점한 국가관료제는 맹목적인 목적달성에만 매달리다가 괴물로 돌변할 위험이 있다. 카리스마를 가진 대통령은 우선 이를 방지해야 한다. 대통령이 지닌 카리스마는 그가 실현하려는 가치에서 온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성스러운 가치는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내 눈앞에 있는 가족과 같은 구체적 타자를 넘어 눈에 안 보이는 일반적 타자까지 염두에 두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조절할 줄 아는 개인이 만들어간다. 자율성을 가진 개인이 창출하는 보편적인 시민연대, 이것이 민주주의의 이상이다.
민주주의는 이런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제도를 가진다. 가장 대표적인 제도가 선거다. 정당은 민주주의 이상을 실현할 공약을 내걸고 선거를 치른다. 시민은 정당이 내건 공약을 보고 대통령을 선택한다. 이런 점에서 대통령은 시민사회가 국가관료제로 보낸 ‘임시파견직’이다. 우선은 국가관료제가 괴물이 되지 않도록 민주주의 가치에 따라 조절해야 한다. 대통령은 시민사회의 위임을 받아 또 다른 임시파견직인 장관을 임명해 각 관료조직의 꼭대기로 파견한다. 더 나아가 사회 전체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더 좋은 사회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일반적인 방향’을 설정해 제시한다.
현대사회학의 문을 연 탈콧 파슨스는 권력과 영향력을 구분한다. ‘권력’이 상대방의 상황을 통제해 집합적 목적을 실현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라면, ‘영향력’은 말을 통해 상대방이 자신의 의도를 바꾸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권력이 아닌 영향력을 통해 통치한다. 영향력은 누구나 신뢰하는 ‘일반화된 상징’을 통한 의사소통이다. 민주주의 언어를 통해 소통함으로써 반대자마저 자신의 의도를 바꾸는 게 좋은 일로 여기도록 만든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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