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의 시사탐방] 양말 뒤집어 신기
영화 이야기를 하나 해야겠다. 숀 코너리가 주연한 ‘파인딩 포레스터’의 한 장면이 최근 이슈를 탐방하는 데 어떤 시사점을 던져줄 것 같아서다. 작가 포레스터는 단 한 권의 소설을 발표한 후, 수 십 년 동안 은둔해서 산다. 다른 사람들에겐 기인으로 여겨지는데, 우연한 기회에 소년 자말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게 되고 자말은 그의 집을 드나들게 된다.
어느 날 자말은 포레스터가 양말을 뒤집어 신는 것을 보고 묻는다. “양말은 왜 뒤집어 신는 거죠?” 포레스터는 당연하다는 듯 답한다. “양말에는 솔기가 안에 있어서 발가락을 아프게 하잖아.” 그러고는 장난기 넘치는 표정으로 덧붙인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뭐든 뒤집어 입고 신으면 행운이 따른다고 해서.” 자말이 의외라는 듯이 되묻는다. “그걸 믿으세요?” 포레스터는 자말의 질문이 재미있다는 듯이 “사람들이 그냥 그렇게 바라는 거지. 그렇다고 뭐 손해 볼 건 없잖아”라며 받아친다.
포레스터가 양말을 뒤집어 신은 주된 이유는 실용적이고 ‘과학적’인 것이다. 양말을 뒤집어 솔기가 밖으로 나가면 발가락은 편하다. 이렇게 신어 보면 ‘실증적’으로 알 수 있다. 뒤집어 신으면 복이 온다는 건 미신이다. 실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렇게 믿으면 즐겁고 기분이 좋아질 수 있으며 그러다가 정말 좋은 일이 생기면 복 터진 것이고, 안 그렇더라도 밑져야 본전이다. 그런 믿음을 즐기는 건 삶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다. 그래서 포레스터처럼 ‘가볍게’ 믿어야 좋다.
세상은 이런 일로 가득하다. 그런데 포레스터가 주된 것과 부수적인 것을 바꿔서 인식하고 행동한다면 이렇게 되리라. 그는 솔기 처리를 아주 잘 해서 발가락에 아무런 불편을 주지 않는 양말을 신을 때도 뒤집어 신을 것이다. 복 받는 일이 우선이고 현실적 요구는 부차적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운을 너무 바라서 양말 뒤집어 신기를 맹신하게 될 것이다. 뒤집어 신지 않으면 불안하기까지 할 것이다. 그런 믿음은 삶을 무겁게 하리라. 그러나 영화 속 포레스터는 세상을 통찰하는 혜안을 가진 현자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삶의 다양한 풍속을 절대 거부하거나 맹신하지 않고 즐기며, 미신이라면 결코 믿지 않을 젊은이에게도 쿨하게 고백할 수 있다.
최근 경찰이 ‘천공 대통령실 관저 개입 의혹’과 관련해 수사 결과를 밝혔다. 경찰은 대통령 관저 후보지였던 육군참모총장 공관을 다녀간 인물은 천공이 아니라 풍수 전문가라고 결론을 내린 상태다. 이 문제로 정치권에서 여야는 정쟁 중이다. 이 문제는 별 것 아닐 수도, 심각한 것일 수도 있다.
문제의 핵심은 누가 후보지 공관을 다녀갔는지가 아니다. 천공이 공식 허가를 받아 다녀갈 수도 있다. 아니 대통령이 도사 역술인 풍수지리가를 만날 수도 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다. 그 누구도 국민의 한 사람이고 그들의 소리도 일리가 있을 수 있다. 걱정스러운 건 대통령의 주된 관심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며 실용적인 데에 있는가, 아니면 오늘날 ‘상식’의 수준에서 그렇지 못한 데에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주된 것과 부수적인 것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는가, 아니면 뒤바꿔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혹자는 역술과 풍수지리가 왜 부수적이냐고 항변할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가 미신이라고 하는 것도 오래전에는 인류의 삶에서 주된 것이었다. 고대에는 나라의 큰일을 할 때도 신탁을 했고 신령에게 기원했다. 그러나 오늘날 상식으로는 부수적이다. 부수적이라고 해서 부정한다는 말은 아니다. 부수적인 것은 안 해도 된다는 뜻이다. 공·사의 구분만큼이나 주·부의 구분은 중요하다.
오늘날 명민한 위정자라면 굳이 그런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분야 사람들의 조언도 귀담아들을 만해서 그랬다면, 포레스터처럼 스스로 떳떳하게 밝히면 된다. 여당이 총출동해서 대통령과 대통령실을 변호하듯 논쟁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방문과 조언이 대통령의 주된 관심사였음을 방증한다.
고전적인 표현일지 모르나, 우리나라 정치인들에게는 계몽이 필요한 것 같다. 계몽의 핵심은 밝은 이성에 기반을 둔 합리적 사고다.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자 볼테르는 맹신 때문에 무력해지는 인간의 삶을 경계했다. 또한 종교적 신앙이든 무속이든 맹신하는 자가 자기를 변호하고 타인을 설득하기 위해 궤변을 만들어낸다는 사실도 경고했다.
그는 소설 ‘캉디드’에서 신의 섭리를 믿는 독실한 신앙인의 궤변을 이렇게 풍자한다. “세상 만물은 필연적으로 최선의 목적을 위해 존재합니다. 잘 보십시오. 코는 안경을 걸칠 수 있도록 생겼지요. 그래서 우리는 안경을 쓰는 겁니다. 두 다리는 분명히 바지를 입게끔 생겼지요. 그래서 우리는 바지를 입는 겁니다. 그리고 돌은 다듬어서 성(城)을 지으라고 있는 것이라서, 나리께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성을 짓고 그곳에 사시게 된 겁니다.”
이 ‘거꾸로 논리’는 어처구니없지만, 반복하다 보면 그럴듯해진다. 대통령 관저를 정하는 데에는 거꾸로 논리 또는 뒤바뀐 논리가 적용되지 않았기를 바란다. 대통령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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