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500편에 붙인 노래, 시 더 빛나게 할 무대일 뿐
한국 록음악의 전설 같은 그룹 ‘산울림’의 둘째 김창훈(67)이 특별한 ‘시 음악 500곡’을 선보인다. 최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그는 “김선태 시인의 ‘봄날은 간다’를 서명희 명창의 목소리와 국악 크로스오버풍 신곡에 실어 오는 10월 음원으로 발매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해부터 자신의 유튜브 채널 ‘산울림TV’에 한국 시 500편에 음을 붙인 노래 영상을 올렸다. 이를 “완성도 높은 음원으로도 힘 닿는 데까지 차례로 발매하는 것”이 그의 최종 목표다.
‘김창훈표 시 노래’의 시작은 산울림 활동 막바지 ‘전업가수’를 택했던 형 김창완, ‘입사’를 택했던 동생들의 갈림길과 맞닿아 있다. 1977년 데뷔 음반 ‘아니 벌써’를 시작으로 삼형제의 산울림은 1997년까지 총 13장 음반으로 음악성과 대중성을 다 잡으며 큰 성공을 거뒀다. 1979년 김창훈이 입대하기 직전 서울 정동 문화체육관에서 연 3000석 규모 단독 콘서트에는 약 2만명이 몰려 덕수궁 돌담길까지 텐트를 치고 줄을 섰을 정도였다. 하지만 김창훈은 “군 제대 후가 내겐 데드라인 같았다”고 했다. “1978년부터 1년 반 사이 앨범 6장을 녹음했죠. 목표가 ‘음반 100장’이었어요. 창작 욕구가 너무 불타니 방송 등 수익에는 신경을 안 썼어요. 게다가 매니저도 없이 악기 일체를 이고 지고 다녔고요. 방송 관계자 사이에 늘 ‘딴따라’ 취급을 받았는데, 당시 대기업들은 입사 나이 제한이 있어서 더 늦으면 취직도 어려울 텐데 싶었죠.”
이후 김창훈은 1982년 해태상사 입사를 시작으로 35년간 식품 유통회사에 몸담았다. 그는 “산울림 음악은 2008년에 생물학적 해체를 맞았다”고 했다. 막내 김창익이 캐나다에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해였다. 하지만 은퇴 후 인생 2막을 고민하던 김창훈은 결국 ‘음악’을 떠올렸다. 2020년 ‘산울림TV’를 개설했다. 처음에는 ‘식품 주제곡 100곡’을 올렸다.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만든다는 ‘가을 전어’부터 보리굴비, 천안 호두과자, 춘천 닭갈비…. 온갖 한국 식품의 음을 끄집어낸 뒤 다음으로 눈에 든 게 ‘시’였다. “우리말의 아름다운 유산에 곡을 붙인다는 데 보람을 느꼈죠. 이 노래가 아름다운 한국 시 문학을 알리는 데 많이 쓰였으면 했고요.”
시 노래를 쓸 땐 “시인당 무조건 시 한 편씩, 토씨 하나 원작의 단어나 배치를 절대 훼손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고 했다. ”제 노래는 그저 시를 빛나게 할 무대일 뿐이니깐요.” 대신 시 노래 하면 흔히 떠오르는 ‘포크’ ‘발라드’ 외에 록, 힙합, 탱고 등 다양한 장르의 음을 붙였다. “500명의 시를 만나니 각자의 음률을 알아서 불러주더군요. 글씨는 차분해 보이는데 그 속은 격정적일 때도 많았어요.” 그렇게 정현종 ‘방문객’, 김경린 ‘어머니의 하늘’, 박경리 ‘바느질’, 나혜석 ‘노라’, 김일엽 ‘새벽의 소리’, 박만진 ‘갈등’ 등 한국 현대시의 100여년이 담긴 500편이 멜로디를 얻었다. 주5일제로 매일 출근하듯 촬영과 편집을 직접 한 노래 영상들로 김창훈의 유튜브 채널에 올랐다.
김창훈은 특히 “시의 음률들과 씨름하다 보니 작곡의 맷집이 좋아졌다”고 했다. 이 맷집으로 “내년 초 발매할 국민 가수 박창근의 신보 제작도 맡게 됐다”고 했다. 김완선 1집 오늘밤(1986), 2집 나 홀로 뜰 앞에서(1987) 이후 그가 솔로 가수 음반의 전곡 제작과 작곡을 맡는 건 35년 만이다. 올해 말쯤 그가 5기생으로 활동한 ‘샌드페블스’의 50주년 기념 공연도 함께 열 계획이다. 샌드페블스가 1977년 MBC 대학가요제 우승을 차지한 곡 ‘나 어떡해’가 김창훈이 쓴 곡이다.
김창훈은 “현재 2027년 산울림 50주년을 위해 후배들과 ‘산울림 곡들의 리메이크 음원’을 준비 중”이라고도 했다. 형 김창완은 지난해부터 ‘산울림 45주년 LP 음반 리마스터링 전집’을 발매 중이다. 김창훈은 “까까머리 삼형제가 소꿉놀이처럼 뚱당거린 ‘흑석동 개러지록(Garage Rock·1950~1960년대 차고에서 출발한 날것의 록음악)’이 산울림의 원형”이라고 했다. 1975년 봄, 부모님이 그의 대학 입학 선물로 허름한 달동네 흑석동 자택에 일렉기타와 베이스, 앰프를 마련해줬을 때가 “산울림이 진정한 ‘밴드’로 태어난 순간이었다”고 했다. “리어카 하나 겨우 다닐 골목을 사이에 두고, 집집마다 닥지닥지 붙어 서로의 설거지 소리까지 들리던 곳이었어요. 드럼에 기타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웠겠어요? 동네 항의도 많았을 텐데, 한 말씀도 안 하고 부모님은 삼형제가 놀도록 놔둬주셨어요. 그게 산울림 창의력의 근간이 된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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