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일의 좋은 정부 만들기] 퇴직연금을 연금화하려면 ‘호갱’은 면하게 해야
행정학의 세부 분야 중 규제정책이 있다. 여기에서 다루는 대표적인 주제가 ‘포획(capture) 현상’이다. 정부가 규제 대상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느슨한 규제를 행하고, 그럼으로써 애초의 목적 달성에 실패하는 것을 지칭한다. 국민의 안전이나 건강, 혹은 공정경쟁 및 환경보전 등을 위해 기업을 규제할 때 흔히 발생한다. 정부가 기업을 비롯한 다양한 이익집단에 포획되는 현상은 도처에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도 각자의 분야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것이다.
행정학 교과서는 정치인과 공무원이 공익을 추구해야 한다고 기술하지만, 현실 행정이 이익집단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다. 다만 그 정도가 문제이겠다. 이익집단 눈치 보기가 지나쳐 다수 국민의 이익을 부당하게 침해하면 곤란한 일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요즘 핫 이슈인 ‘사교육 카르텔’ 혁파도 정도가 지나쳐 선을 넘었다는 판단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내 전공 분야에서도 포획 현상은 흔한데, 그중에는 너무 심해 국민이 큰 피해를 입는 것도 여럿 있다. 퇴직연금이 그렇다. 2021년까지 5년간 퇴직연금 평균 수익률은 2% 정도다. 같은 기간 국민연금 수익률은 7%가 넘으며, 우리가 흔히 벤치마킹하는 외국 퇴직연금 수익률은 비슷하거나 더 높았다.
만약 국민연금이 퇴직연금 정도의 수익률밖에 못 냈다면 난리가 나도 한참 전에 났을 것이다. 담당자 문책은 물론이고 국민연금을 탈퇴하겠다고 목청 높이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틀림없이 국민청원도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퇴직연금은 신기하게도 조용하다. 낮은 수익률에도 불구하고 잠잠한 것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확정급여형(DB형), 확정기여형(DC형), 개인형 퇴직연금(IRP)의 세 유형으로 구분된 퇴직연금에는, 가입자는 수익률을 알 필요 없게 하거나, 수익률이 나쁜 걸 내 잘못으로 돌리게 하거나, 세금 감면을 미끼로 관심을 돌리는 등 다양한 장치가 마련돼 있다.
고의든 우연이든 가입자들이 침묵하게 짜인 구조는 퇴직연금 사업자에게는 ‘행운’이고, 규제당국에는 ‘다행’이다. 그러나 그로 인한 가입자 피해는 어떡하나. 월 급여 400만원인 사람이 30년간 퇴직연금에 가입할 때 수익률 2%와 7%가 얼마나 큰 차이를 가져오는지 따져보자.
수익률 2%로 30년 가입했을 때 원리금은 1억6000만원 정도다. 수익률이 7%면 4억원이 넘는다. 두 배가 훨씬 넘는 차이다. 이번에는 개인이 아니라 퇴직연금 전체로 계산해 보자. 2022년 퇴직연금 적립금은 336조원이다. 적립금이 300조원일 때 수익률이 2%면 수익은 6조원이지만 7%면 21조원이다. 무려 15조원 차이다. 이것도 큰 액수지만, 이게 매년 복리로 누적된다고 생각해 보라.
예를 들어 2017년 초 150조원 정도였던 적립금이 2021년까지 5년간 매년 2%가 아니라 7%의 수익률을 냈다면 2022년 적립금은 60조원 가까이 더 많아졌을 것이다. 적립금이 적을 때도 이 정도인데 앞으로 적립금이 계속 쌓이게 되면 잠재손실이 얼마나 커질 것인가. 2022년 336조원인 퇴직연금 적립금은 10년 뒤에는 거의 900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데도 계속 묵묵히 낮은 수익률을 감수해야 만 하는 것일까.
최근 논의되는 공적연금 개혁안 중에 퇴직연금의 연금화가 있다. 국민연금만으로는 노후소득 보장이 부족하니 퇴직연금과 역할을 분담하자는 것이고, 그러려면 퇴직연금을 일시금이 아닌 연금으로 수급해야 한다는 얘기다. 2021년 퇴직연금 수급자 중 연금 선택자는 4.3%였으며 나머지는 일시금을 선택했다. 연금 선택자의 적립금 평균은 1억9000만원인데 비해 일시금 선택자는 1600만원이었다. 두 집단의 적립금액이 이토록 다른 것은 거의 직장 경력 차이 때문이다.
연금 선택자는 대부분 한 직장에 평생 다닌 사람들이다. 일시금 선택자는 여러 번 직장을 옮긴 사람들이다. 직장을 옮기게 되면 기존에 부은 퇴직연금을 일시금으로 찾고, 새 직장에서는 다시 처음부터 붓게 되니 적립금이 쌓이지 않게 된다. 액수가 너무 적으니 연금으로 수급할 여지도 없다.
이로 인해 직장을 옮길 때 일시금으로 빼가는 것을 막자는 방안도 나왔다. 이직해도 계속 부으면, 퇴직할 무렵 제법 큰 액수가 될 것이고, 그러면 일시금 대신 연금을 선택할 것이라는 계산이다. 일리 있지만, 제대로 짚은 것은 아니다. 적립금액이 커서 연금 선택한 사람도 본래 의미의 연금을 선택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거의 전부 10년간 소액으로 연금을 수급하고, 10년 넘으면 일시금으로 찾는 방식을 선택했다. 일시금 대신 10년 넘게 수급하면 세금 감면 혜택이 있기 때문이다. 연금 선택 퇴직자들은 대부분 50대 후반이니 10년 후면 60대 후반이다. 본격적으로 대비가 필요한 시점에서 일시금으로 찾는 것이다.
왜 국민연금처럼 사망할 때까지 연금으로 수급하려 하지 않을까? 왜 직장을 옮기면 일시금으로 빼갈까? 구체적인 사유야 다양하겠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다. 수익률이 너무 낮기 때문이다. 일시금으로 찾아 내가 굴리면 그보다 높은 수익률을 올릴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자신의 퇴직연금 적립금이 7% 이상의 수익률을 올린다면 구태여 일시금으로 찾겠는가.
퇴직연금이 노후소득 보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나라들은 예외 없이 수익률이 우리보다 훨씬 높다. 가입자가 운용을 잘해 그런 것이 아니다. 가입자는 보험료만 내더라도, 알아서 높은 수익률을 내게 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게 정상이다. 우리만 가입자가 ‘호갱’ 노릇을 한다. 국민연금이든 퇴직연금이든, 가입자의 책무는 성실하게 보험료를 내는 것이다. 이를 잘 운용해서 안정된 노후소득을 보장하는 것은 정부의 책무이다.
수년 전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대한민국이 선진국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선진국이란 무엇인가. 젊어서 수십년 일했고, 일하는 동안 국민연금과 퇴직연금 보험료를 꾸준히 납부했다면, 누구나 안정된 노후소득을 누려야 한다. 내가 아는 한, 선진국 중에 이게 안 되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
김태일 고려대 교수·좋은예산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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