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허깨비 민족주의와 반국가 심리

2023. 7. 28.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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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을 의미하는 '민족'은 망상
北인민과 공멸 없는 통합 위해
꼭 필요한 건 자유민주 국가의식
통일 땐 '안전선' 두고 계몽 필요
경계할 것은 '국가' 아닌 '민족'
만연한 反국가 심리 터무니없어
이응준 시인·소설가

우연히 한 소년의 중학교 과정 검정고시 수험서를 접하게 됐다. 무심히 뒤적이다가, 사회과목 중 ‘통일 한국의 목표?’라는 문제에 규정된 정답이 ‘자주적인 민족국가’인 걸 보고는 마음이 무거웠다. 국정교과서가 없는 상황에서 검정고시의 내용은 교육부의 공인성에 특별히 값할 것이다. 그런데 저렇다는 것이다. ‘막말로’ 6·25전쟁은 남한이 일으켰다고 적혀 있다면 오히려 바로잡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자주적인 민족국가’라는 것은 겉이 선하고 옳게 보여 그 심각성을 인식하기가 어렵고 이런 식으로 계속 아이들의 뇌 속에 무방비로 스며든다는 점에서 끔찍하다. 물론 그런 ‘좀비 짓’을 저지르고 있는 이 사회의 어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민족’이라는 악성 바이러스가 무소불위의 정당성을 취득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993년 제14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식장에서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으며 어떤 이념이나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연설했다. 나는 이제 와서 그를 탓하고 싶진 않다. 당시 대학생이던 나도 그 말을 듣고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더랬으니까. 그건 시대적 한계, 우리 공동체의 ‘지식적 모자람’이기도 했다.

북한의 ‘한민전 방송’을 들으며 청춘을 보낸 386주사파 운동권들이 ‘자유민주화 투사’로 신분세탁을 하며 제도 정치권으로 대거 진입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연구 삼아 그들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그들의 인생에서는 그랬다는 사실만 쏙 빠져 있다. 아무튼, ‘특히’ 그날 이후로 이 나라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 개념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마치 무슨 도덕적 하자가 있는 것마냥 매도당해왔다. 하지만 더 이상 그래서는 안 되는 시점에 이르렀다. 바로 저 소년들의 미래 때문이다.

‘민족국가’라는 개념은 대략 18, 19세기를 거치며 서구에서 국민국가(nation-state)들이 생겨나, 그 ‘네이션(nation)’을 일본인들이 하필 ‘민족’이라고 번역하면서 동양으로 넘어왔다. 물론 ‘국민국가’라는 말도 사용됐지만, 혼용이 상용돼 혼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고로, 민족국가는 국민국가이고 국민국가도 국민국가를 뜻한다. 반면 김영삼 대통령이 역설하던 저 ‘민족’이란 ‘종족(race)’인 것인데, ‘동성동본 금혼(禁婚)’처럼 비과학적 망상에 불과하다. 검정고시 속의 ‘자주적 민족국가’는 ‘자주적 종족국가’다.

북한 인민들과 공멸(共滅) 없는 통합에 필요한 것은 허깨비 민족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 국가의식이다.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국가의 정신은 종족주의라는 낡은 단지 안에서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술을 만들기 위한 효모”라고 썼다. 북한 사람들은 헌법상 이미 대한민국 국민이며 통일 이후에도 당연히 그러하니 민족이라는 비좁은 거짓말에 기댈 이유가 없다. 통일 상황이 터지면, 세계 자유 세력들의 조력을 받아 북한 지역을 ‘정상화’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지금의 국경선이 국경선으로서가 아니라 ‘안전선’으로 유지된 채 정상화가 세월을 두고 진행돼야 한다. 독일 통일 뒤 독일인들이 가장 후회했던 게 바로 이 부분이고, 독일이니까 그 안전선 없이도 버틴 것이다.

통일 급변시기에는 통일 관련 상황들에 대한 대통령 행정부의 비상조치권이 헌법적으로, 법률적으로 세세하게 준비돼야 한다. 가령, 북한의 2500만 인민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대한민국 투표권을 갖게 된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민주적 대환란’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남한 사람들은 근대적 개인이라든가 자유민주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이 미진하다. 하물며 북한 인민들은 김씨 사교왕조(邪敎王朝)의 노예적 백성들이다.

진정한 통합은 북한 자체를 기억 못 하는 세대에서나 가능할 테고, 지난한 계몽의 과정에는 ‘통일 국정교과서’가 절실하다. 통일 대한민국은 어느 인종 누구든지 의무를 다하면 권리를 누리는 나라여야 한다. 공상과학 소설가이자 문명비평가 허버트 조지 웰스는 “우리의 진정한 민족은 인류”라고 갈파했다. 패망 후 일본에서는 국가주의에 대한 반성이 있었다. 통일 전과 후 우리가 경계할 것은 민족이라는 관념일 뿐 국가라는 실체는 아직도, 앞으로도 부족하니, 지금 이 사회에 만연한 반국가 심리는 터무니가 없고, 자살적(自殺的)이다. 저 소년은 ‘개방적 국민국가’에서만 행복할 것이다. 우리에겐 그 행복을 훼손할 권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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