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투자자 사전 동의권 인정”…벤처투자 업계 한숨 돌려
벤처캐피털(VC)과 사모펀트(PEF) 운용사 등 기관투자자들의 투자 기업에 대한 통제 권한을 인정하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이는 스타트업 업계와 벤처투자 업계 모두 예의주시하던 판결로, 투자자의 사전동의권을 무효로 한 원심 판결을 대법원이 뒤집으면서 기관투자자들은 한숨을 돌리게 됐다.
28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조재연 대법관)는 최근 디스플레이 제조사 뉴옵틱스가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틸론을 상대로 낸 상환금 청구 소송에서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특정 주주들에게만 사전동의권을 부여한 것은 무효라며 피투자 기업이 상환금을 반환할 이유가 없다는 원심 판결을 뒤집고 “특별한 경우 차등적 대우가 가능하다”고 판결했다.
◇”사전동의권 부여는 무효” 판결에…투자업계 위기감 고조
투자자 사전동의권은 투자자가 회사에 투자하면서 체결하는 신주인수계약서에 ‘회사의 주요 경영사항에 대해 회사와 경영진이 투자자와 사전에 협의하거나 동의를 얻도록 하는 조항’을 말한다. 양측은 이를 위반하는 경우 투자자에게 손해배상이나 위약벌을 지급하거나, 투자자가 보유하는 주식을 다수 매수하도록 하는 주식매수 청구권(풋옵션), 조기상환 청구권과 같은 제재 수단을 둔다.
틸론이 뉴옵틱스로부터 투자를 유치한 후 뉴옵틱스의 사전 동의 없이 추가 유상증자를 진행하면서 투자자 사전동의권 문제가 불거졌다. 뉴옵틱스는 2016년 12월 틸론이 새로 발행한 상환전환우선주 20만주를 20억원에 인수하기로 하면서, 추후 틸론이 신주를 발행할 경우 뉴옵틱스의 사전 동의를 받도록 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이를 어기면 투자금 상환과 함께 위약벌을 부담하도록 하는 벌칙 조항도 담았다.
하지만 틸론은 뉴옵틱스 동의 없이 26만주의 신주를 발행했고, 뉴옵틱스는 사전동의권 위반을 이유로 투자금 상환을 요청했으나 틸론이 이를 거절하면서 소송이 시작됐다. 틸론은 투자자 사전동의권 약정이 상법상 주주평등 원칙을 위반해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심은 투자자 사전동의권 약정이 상법상 기본 원리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며 틸론이 뉴옵틱스에 43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반면 2심은 뉴옵틱스와 틸론의 투자 계약에 규정된 사전동의권 조항과, 이를 이유로 한 조기 상환 및 위약벌 조항은 주주평등 원칙에 반하는 것으로서 무효라고 판단했다. 사전동의권 조항은 다른 투자자에게는 없고 뉴옵틱스에만 부여된 우월한 권리고, 상환청구권 등을 통해 실질적으로 뉴옵틱스에 투하자본 회수를 절대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므로 주주평등 원칙에 위반된다는 것이다.
주주평등 원칙은 주주가 회사와의 법률 관계에서 가진 주식 수에 따라 평등한 취급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이다. 상법상 명시적인 규정은 없으나 우리 법원은 주주평등의 원칙을 신주발행, 이익배당, 자기주식 취득이나 주식병합과 자본감소 등 전반에 적용하고 있다.
2심 판결 후 벤처투자 업계에는 위기감이 고조됐다. 기관투자자들은 대다수 투자 계약을 체결하면서 사전동의권 조항을 포함했고, 업계에서는 이것이 관행으로 굳어진지 오래됐기 때문이다. 2심 당시 판결이 확정되면 그동안 회사와 맺은 투자 계약은 물론 앞으로의 계약에도 모두 사전동의권 내용을 삭제해야 했다.
◇”특별한 경우 차등 취급 정당해” 원심 뒤집은 대법원
그러나 지난 7월 13일 대법원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특별한 사정이 인정되는 경우 사전동의권은 유효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주주평등의 원칙에 위반되는 약정은 무효라고 본 원칙은 인정하지만, 회사가 투자자 등 일부 주주에게 우월한 권리나 이익을 부여해 다른 주주들과 차등적 취급을 하는 경우에도 법률이 허용하는 절차에 따르거나, 그 차등적 취급을 정당화할 수 있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이를 허용할 수 있다는 취지다.
대법원은 차등적 취급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필요한 데 필요한 세부적인 기준도 제시했다.
①차등적 취급의 구체적 내용 및 회사가 차등적 취급을 하게 된 경위 ②차등적 취급이 회사 및 주주 전체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것인지 여부 ③일부 주주에 대한 차등적 취급이 상법 등 관계 법령에 근거를 둔 것인지, 또는 상법 등의 강행법규와 저촉되거나 채권자보다 후순위에 있는 주주로서의 본질적인 지위를 부정하는지 ④일부 주주에게 회사의 경영 참여 및 감독과 관련해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는 경우 그 권한 부여로 의사결정 권한을 제한해 주주의 의결권을 침해하는지 ⑤개별 주주가 처분할 수 있는 사항에 관한 차등적 취급으로 불이익을 입게 되는 주주의 동의 여부와 전반적인 동의율 ⑥그 밖에 회사의 상장 여부, 사업 목적, 지배구조, 사업 현황, 재무 상태 등을 고려해 일부 주주를 차등 취급하는 것이 주주와 회사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는 경우 등이다.
이번 사안에 대해서도 대법원은 소수주주인 뉴옵틱스에 사전동의권이라는 우월적 권리를 부여하는 데 틸론의 대주주가 동의했고, 뉴옵틱스의 투자금은 틸론의 유동성 확보와 자본 증가에 기여해 주주 전체의 이익이 증진됐으며, 사전동의권 조항을 통해 뉴옵틱스에 회사의 지배주주나 경영진의 경영 사항에 대한 감시·감독 목적의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다른 주주에게 손해를 발생시키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번 판결에 따라 투자자가 투자 계약을 체결하면서 회사의 주요 경영사항에 대해 사전동의권을 확보하는 기존 투자 계약 실무의 큰 방향에는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반하는 경우 회사나 대주주 등 투자계약상 이해관계인이 부담하는 위약벌 등의 제재도 유효할 것으로 분석된다. 다만 신의성실의 원칙 등에 반하는 과도한 액수일 경우 법원 직권으로 감액될 수 있다.
다만 법조계에선 주식 자체에 특별한 권리가 부여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경우에 약정도 유효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평가다. 예를 들어 현재 투자계약 실무상 투자자가 회사 주식을 제3자에게 양도하는 경우 사전동의권 등도 제3자에게 승계되도록 하는 경우가 잦은데, 이는 향후 사전동의권 등 약정이 주식 자체에 내재된 특별한 권리로 평가돼 주주평등의 원칙에 반한다는 이유로 무효 판단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또 뉴옵틱스와 틸론의 사전동의권 등 약정 대상은 주식회사의 신주발행 또는 유상증자 여부 등으로, 이는 원칙적으로 이사회의 결의가 필요한 상황이고 주주총회의 결의가 필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일부 주주가 사전동의권을 갖더라도 다른 주주의 의결권이 직접적으로 침해된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르면 주주총회 결의가 필요한 경영사항에 대해서는 투자자에게 우월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언제나 유효하다고 볼 수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대형로펌의 한 변호사는 “상법상 자본금 10억원 미만으로 이사회가 없는 회사는 이사회 결의사항이 주주총회 결의사항으로 대체돼 있어, 이런 경우 뉴옵틱스와 틸론의 대법원 판례가 그대로 적용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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