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경대] 주문진

이수영 2023. 7. 28.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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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부둣가엔 명태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1970~1980년대 주문진은 풍요로움 그 자체였다.

인구는 4만명을 향해 갔고, 주문국민학교 전교생은 2000명을 넘었다.

주문진읍은 1940년 10월 1일 동해안에서 제일 먼저 읍으로 승격한 항구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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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부둣가엔 명태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여름엔 오징어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생선만큼 돈이 넘쳐났다. 인근엔 유흥주점이 즐비했다. 이름난 브랜드 가게와 양장점이 성업을 이루었다. 뱃사람들이 보름 동안 일하고 받은 임금은, 공무원 월급의 10배를 넘기도 했다. 돈을 좇아 팔도에서 모인 사내들로 항구는 붐볐다. 선주들은 수협에서 빚을 내 더 큰 배를 샀다. 고기가 얼마나 많이 잡혔던지, 삽으로 리어커에 퍼 담고 담아도 바닥은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값이 싼 생선은 바다에 버려야 했다. 잡힌 고기를 제때 팔지 못해, 그물에 말렸다. 어부의 가족들도 이사를 왔다. 신식 TV를 들여오고, 새 살림살이를 장만했다. 명태 할복을 하는 아주머니는 일을 한지 2년만에 대처에 집을 샀다고 했다. 1970~1980년대 주문진은 풍요로움 그 자체였다. 부두의 비린내는 돈 냄새와 다름없었다. 인구는 4만명을 향해 갔고, 주문국민학교 전교생은 2000명을 넘었다. 교육열이 높아 과외공부를 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까지였다. 명태와 오징어 어획량이 줄어들자, 마을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했고, 학교마다 빈 교실이 늘었다. 매일 객석을 채웠던 만보극장과 동아극장, 신일극장은 그때쯤 문을 닫았다. 양장점도, 다방도 하나둘씩 자취를 감췄다. 주문진읍은 1940년 10월 1일 동해안에서 제일 먼저 읍으로 승격한 항구도시다. 1985년 명주군 전체 인구의 37.8%인 3만4090명이 살았지만, 올해 6월 1만 6216명으로 반토막이 났다. 그렇다고 주문진의 앞날이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외지인들의 발길이 이어져 어시장을 중심으로 관광업이 활기를 띤다. 소돌 해변 BTS 촬영지와 드라마 배경이 된 방파제엔 젊은 여행객들이 진을 치고 있다. 동해북부선 역이 들어설 예정이어서 주민들의 기대가 크다.

얼마 전엔 경사스러운 일이 있었다. 강원특별자치도 제2청사인 글로벌본부가 주문진에 둥지를 튼 것이다. 읍민들은 주문진 도청 시대 개막에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모두 인구 증가와 도시 팽창을 기대하고 있다. 주문진이 옛 영화와 번영을 다시 누릴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수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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