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속 사연 품는 아이들, 역사 딛고 스스로 자란다

김여진 2023. 7. 28. 00:06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학생들이 눈빛도 희미하고 말이야, 이래서 나라를 지키겠어요!", "6·25 때는 남의 입속에 밥알도 빼내먹었어, 요새 아이들은 밥 귀한 걸 몰라요." 능청스럽게 교장 선생님을 흉내내는 열한살들의 재잘거림.

탁동철 작가의 장편 동화 '길러지지 않는다'에 등장하는 속초 아바이마을 아이들의 목소리다.

양양 출신으로 춘천교대를 졸업한 탁 작가는 삼척을 시작으로 속초와 양양지역 학교를 오가며 열살 안팎 아이들과 일상을 나누고 있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실향민 정착촌 아바이마을 배경
속초·양양 근무 초등교사 작가
어린이 서사 중심 지역 정서 표현
수복지구 사람들 상처도 녹여 내
고성 활동 김종숙 화가 그림도
▲ 길러지지 않는다탁동철

“학생들이 눈빛도 희미하고 말이야, 이래서 나라를 지키겠어요!”, “6·25 때는 남의 입속에 밥알도 빼내먹었어, 요새 아이들은 밥 귀한 걸 몰라요.”

능청스럽게 교장 선생님을 흉내내는 열한살들의 재잘거림. 탁동철 작가의 장편 동화 ‘길러지지 않는다’에 등장하는 속초 아바이마을 아이들의 목소리다. 동명항, 청초호, 명태할복장, 갯배 선착장을 쏜살같이 누비며, 설악산으로 해가 넘어갈때까지 뛰어노는 주인공들이다.

탁동철 작가는 이 동화에서 강원도 북쪽 바닷가 마을 아이들의 씩씩한 일상을 마을 골목골목을 따라 펼쳐놓고 있다. 고양이 달님이를 발견해서 ‘우리 모두의 고양이’로 만들고, 잘 키워보기 위해 땀 흘리는 아이들의 고군분투가 줄기를 이룬다. 그리고 그 줄기를 따라 피어나는 잎새마다 마을 어른들의 사연이 앉았다.


마을에는 휴전선 너머 고향집과 전쟁 때 손 놓친 동생이 떠올라 눈물자국 마를날 없는 단천집 할아버지, 전쟁 때 본 뻘건 하늘이 떠올라 땅만 쳐다보고 걷는 할머니가 있다.

▲ 김종숙 화가가 그린 탁동철 장편 동화 ‘길러지지 않는다’ 속 그림 작품.

함경남도 신포가 고향인 신포 아저씨와 개성공단이 문닫는 바람에 직장을 잃은 이랑이 아빠도 있다. “처음부터 잔소리꾼 할아버지로 태어나서 사는 줄 알았던” 교장 선생님도 알고 보면 마음 아픈 사연을 가진 소년이었다. 운영위원장 할아버지는 금방 고향에 갈 수 있을 줄 알고 지붕에 비가 새도 고치지 않았고, 갯배 선장 할아버지는 전쟁통에 아기 업고 설악산을 넘어 간 아내를 생각하며, 산 아래에 혼자 남았다.

동화는 이처럼 아이들이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땅, 몸과 마음을 부딪치며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어른들 사이에서 아이들은 길러지지 않는다. 그 마을의 역사를 딛고 일어나 스스로 큰다. 할아버지 눈물 자국에 함께 눈물 흘릴 줄 알고, ‘옳은 말도 너그러움이 없으면 힘을 잃는다’는 할머니 말씀을 마음에 새길 줄도 안다.

아이들은 고양이 밥값을 정정당당하게 벌기 위해 폐지도 모으고, 갯배타고 건너가 동명항까지 한참 걸어 도루묵 떼러 가보기도 했다. 직접 캐고 따온 먹을거리를 팔아 고양이 밥을 마련하는데 성공했을 때는 독자도 함께 뿌듯해지는데, 과연 이 이야기의 또다른 주인공인 고양이는 얌전히 앉아 기다리고만 있을까. 책 제목에 힌트가 있다.

책 속 그림은 고성에서 활동하는 김종숙 화가가 그려 분위기를 살렸다.

한국전쟁이 멈춘 지 70년이 흘렀지만 아바이마을 어른들이 사연은 골목에, 석호에, 항구에, 어판장에 머물러 있다. 땀범벅이 되어도 아랑곳 않고 뛰어노는 어린이들의 웃음으로, 아물지 않은 상처를 조금씩 보듬어볼 뿐이다.

▲ 김종숙 화가가 그린 탁동철 장편 동화 ‘길러지지 않는다’ 속 그림 작품.

어른과 어린이들의 서사가 함께 녹아있어 부모와 어린이들이 함께 읽기 알맞다. 속초·고성·양양을 휴가지로 정했다면 여름바다를 한껏 즐기고 돌아 온 숙소에서 넘겨봐도 좋겠다. 지난 봄에 나온 동화지만, 한여름에 다시 추천하는 이유다.

양양 출신으로 춘천교대를 졸업한 탁 작가는 삼척을 시작으로 속초와 양양지역 학교를 오가며 열살 안팎 아이들과 일상을 나누고 있다. 팟캐스트 ‘학교종이 땡땡땡’을 진행하했고, 시쓰기 등 문화예술교육에도 매진하고 있다. 현재 속초 대포초교에 근무중이다.

책 말미 작가의 말에는 정선 사북 등 강원 폐광지역 어린이들과 동시로 호흡했던 고 임길택 시인의 시 ‘나 혼자 자라는 아이들’이 인용돼 있다.

“길러지는 것은/아무리 덩치가 커도/볼품없어요.//나는/아무도 나를/기르지 못하게 하겠어요./나는 나 혼자 자라겠어요.”

까만 탄광마을에서도, 짙푸른 수복지구 바닷가 마을에서도, 아이들은 스스로 자란다. 전설처럼 들어 온 어른들의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서.

김여진 beatle@kado.net

Copyright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